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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9세손 덕봉공 이수영] 德峯李公墓碣銘(덕봉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19:44

□용재공(慵齋公) 9세손 덕봉공(德峯公) 이수영(李秀永)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②창랑공(蒼浪公) 기실(起實) → 5世孫 ②인암공(忍庵公) 자원(自原) → 6世孫 호은공(湖隱公) 숙(琡) → 7世孫 ①여명(汝命) → 8世孫 ①필우(必佑) → 9世孫 ②덕봉공(德峯公) 수영(秀永)

 

 

德峯李公墓碣銘(덕봉이공묘갈명) 幷序(병서)
-永陽(영양) 李裕民(이유민) 謹撰(근찬)

 

聞韶治南金城山下霞洞長車峴乙坐原崇四尺而封者卽德峯李公之阡也公諱秀永字仲漢號德峯慶州人始祖諱謁平新羅佐命功臣自是也襲簪組弘儒碩德連世繼承麗系有諱之秀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是生諱揆官至四宰諡貞烈公入鮮朝有諱蔓實吏曹判書是生諱繩直大司憲是生諱時敏進士號琴湖俱以淸白令望名於世生諱宗準文校理選湖堂翰林 贈副提學遊佔畢金先生門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享鏡光栢麓院寔公之九代祖也高祖諱自原號忍庵曾祖諱琡號湖隱自安東移居于韶州長湖里子孫仍世居焉王考諱汝命考諱必佑妣竺山全氏尙書元發后 英祖戊寅生公于長湖里第稟賦聰頴才諝過人不煩敎督而誦讀不懈文理夙成屹然若老成襲家庭詩禮之學日用常行皆從彜倫上做將去孝友天植在親側左右周旋唯諾恭謹無違咈志體之養未嘗之絶及丁內外憂殮襲葬祭必誠必愼勿之有悔公年己踰不悔而三年廬于墓側哭泣嶊割如不自勝自少不屑業專心聖賢之學融貫經傳而於庸學心經尤用工體認而服行之是以隱微之中而戒愼恐懼勤靜語黙之際而整齊嚴肅表裏交養世間榮辱視之若過空浮雲暇日則與親友或登山而採或臨水而漁管雲霞而吟風月不知老之將至竟以 純祖甲申十一月二十日卒葬于金城面霞洞長車峴乙坐原配咸陽朴氏春榮女咸陽郡忠佐后丙子生丙午五月初一日卒墓德谷後山乾坐生三男二女男爵根萬根鍾宅女都福興八莒人金麗遜義城人爵根男玉雨道雨萬根男星雨和雨鍾宅男祿雨賢雨根雨女朴泰運密陽人具德喜綾城人李坤峻碧珍人餘不錄於乎公之世己近二百年矣文籍散逸當日事行無得以詳考是固可恨也日公之後孫在英在燮訪余請以銘墓余以不文固辭而請愈勤不獲己謹依行錄忘僭叙次如右係之以銘曰
慵翁賢裔湖隱之世令德旣崇迨公趾美孝源百行事親養志弄我烟月養我天眞優哉遊哉守我靑氈有侐斧堂長峴之麓刻之貞珉可微來百

 


●덕봉이공묘갈명(德峯李公墓碣銘) 병서(幷序) 역문(譯文)
-영양(永陽) 이유민(李裕民) 근찬(謹撰)

 

문소(聞韶, 의성義城)의 남쪽 금성산하(金城山下) 하동장거현(霞洞長車峴) 을좌(乙坐) 언덕에 사척(四尺) 봉분(封墳)은 덕봉이공(德峯李公)의 유택(幽宅)이라. 공의 휘는 수영(秀永)이요, 자는 중한(仲漢)이며 호는 덕봉(德峯)이니 경주이씨(慶州李氏)다.
시조의 휘는 알평(謁平)이니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이고 이로부터 높은 벼슬과 홍유(弘儒) 석덕(碩德)이 대를 이어오더니 고려 말에 휘 지수(之秀)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고 아들 휘 규(揆)를 낳으시니 벼슬이 사재(四宰)에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아들 휘 승직(繩直)을 낳으시니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요, 이분이 휘 시민(時敏)을 낳으시니 진사(進士)에 호는 금호(琴湖)니 청백(淸白)으로 세상에 명망(名望)이 높았고 금호공(琴湖公)이 휘 종준(宗準)을 출생하니 문과교리(文科校理)로 호당(湖堂)과 한림(翰林)에 뽑혔고 나중에 부제학(副提學)을 증직(贈職) 받았다.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당했는데 세상에서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르고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백록리사(栢麓里社)에 입향했으니 공에게 9대조가 되고 고조의 휘는 자원(自原)이요, 호는 인암(忍庵)이며 증조의 휘는 숙(琡)이요, 호는 호은(湖隱)이니 이분이 안동(安東)으로부터 의성(義城) 장호리(長湖里)에 옮겨왔고 자손이 대대로 살아왔다. 조부의 휘는 여명(汝命)이고 휘는 필우(必佑)요, 모친은 축산전씨(竺山全氏) 상서(尙書) 원발(元發)의 후손이다.
영조(英祖) 무인년(戊寅年)에 장호리(長湖里) 자택에서 출생하니 총명한 자질을 타고나서 재주가 과인(過人)하여 엄한 교육을 아니 해도 글을 읽고 외우기를 게을리 아니했고 문리(文理)가 일찍 트이어 노성(老成)한 사람과 같이 가정시례지학(家庭詩禮之學)을 계승하여 일상행동이 예의에 따라 했고 효우(孝友)는 천성이라 양친 곁을 떠나지 않고 좌우주선(左右周旋)에 공순하고 삼가서 뜻과 몸에 맞도록 봉양했고 내외상(內外喪)을 당해서는 초종장례(初終葬禮)에 정성을 다했으며 많은 나이에도 시묘삼년(侍墓三年)을 하는 동안 애통함을 견디지 못했었다. 젊어서부터 과거에는 뜻이 없고 학문에만 전심하여 성경현전(聖經賢傳)에 능통하면서도 중용(中庸)·대학(大學)에 더욱 전심체득(傳心體得)하여 행동에 옮겨 남이 안보는 은미(隱微)한 속에서도 일동일정(一動一靜)을 늘 조심하고 몸단속을 엄숙히 하여 표리(表裏)가 다름이 없었다. 세상에 영욕(榮辱)은 뜬구름과 같이 보고 여가(餘暇) 있으면 친한 벗과 산에 올라 약초를 캐고 냇가에 가서 고기도 낚으며 풍월(風月)을 읊어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더니 마침 순조(純祖) 갑신년(甲申年) 11월 20일에 세상을 뜨니 금성면(金城面) 하동(霞洞) 장거현(長車峴) 을좌산(乙坐山)에 안장하다.
배(配)는 함양박씨(咸陽朴氏) 춘영(春榮)의 따님이요, 함양군(咸陽郡) 충좌(忠佐)의 후손이다. 병자년(丙子年)에 나고 병오년(丙午年) 5월 초 1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덕곡후산(德谷後山) 건좌(乾坐)에 있다. 3남 2녀를 출생하니 작근(爵根)·만근(萬根)·종택(鍾宅)이요, 따님은 팔거(八莒) 도복흥(都福興), 의성(義城) 김여손(金麗遜)에 출가했고 작근(爵根)의 아들은 옥우(玉雨)·도우(道雨)요, 만근(萬根)의 아들에 성우(星雨)·화우(和雨)요, 종택(鍾宅)의 아들에 녹우(祿雨)·현우(賢雨)·근우(根雨)며 딸은 밀양(密陽) 박태운(朴泰運), 능성(綾城) 구덕희(具德喜), 벽진(碧珍) 이곤준(李坤峻)에 각각 출가했고 나머지 자손은 다 수록 못 한다.
오호라 공의 시대가 2백 년이 가까우니 문적(文籍)이 없어져서 공의 행하던 일이 상고(上考)할 수 없는 것이 한탄스러운 일이다. 어느 날 공의 후손 재영(在英)·재섭(在燮)이 나를 찾아 비문(碑文)을 부탁하니 내 글을 잘못한다고 사양하나 청함이 더 간절함으로 말지 못하여 참람(僭濫)함을 있고 위와 같이 쓰고 명왈(銘曰)
호은공(湖隱公)은 용재선생(慵齋先生)의 어진 자손이다. 조상의 덕이 높으니 공이 좋은 점을 이었도다. 효도란 일백 행실에 근본이 되니 어버이 뜻과 몸에 맞도록 봉양했도다. 나의 자연을 즐겨하여 나의 천진(天眞)을 길렀도다. 훌륭하게도 가풍(家風)을 잘 지쳤도다. 만년 유택(幽宅)은 장현(長峴)의 기슭일세. 비석에 새겨서 백세(百世)에 증거를 살게 하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