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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6세손 호은공 이숙] 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湖隱李公墓碣銘(통정대부용양위부호군호은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19:35

□용재공(慵齋公) 6세손 호은공(湖隱公) 이숙(李琡)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②창랑공(蒼浪公) 기실(起實) → 5世孫 ②인암공(忍庵公) 자원(自原) → 6世孫 호은공(湖隱公) 숙(琡)

 

 

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湖隱李公墓碣銘 幷序
(통정대부용양위부호군호은이공묘갈명 병서)
-永陽(영양) 李裕民(이유민) 撰(찬)

 

聞韶之治南中里勿奄谷內山枕亥原副護軍李公衣履之藏也樂石之銘翳然尙闕于今三禩之久矣其慈孫之慨恨而悚惕者顧何如哉日公之後孫在英濟東甫訪余責銘余以不文何敢當是寄辭之固而請益勤不獲己忘僭序次按公諱琡字景亨號湖隱貫慶州新羅佐命功臣諱謁平鼻祖也歷羅麗而圭組蟬聯入鮮朝有諱繩直文科官至大司憲是生諱時敏號琴湖潛心經學慷慨有氣節生諱宗準號慵齋文校理以書狀官赴京書畵大鳴於華都以佔畢金先生之門徒被戊午禍 贈副提學寔公六代祖也高祖諱胤恭參奉曾祖諱燦號黙愚軒杜門篤學祖諱 起實壽僉樞考諱自原號忍庵壽通政妣淸州韓氏 顯廟辛丑生公容貌端凝稟性聰敏甫成童有成人之態大人公甚愛之期以門戶至於當日行治之美德業之盛杞宋莫徵是固慨恨也己中歲挈家移居于聞韶之長湖自號湖隱日與諸名勝嘯詠於山水之間樂其樂而味其眞國有優老之典陞通政副護軍 英廟甲寅終于寢配固城李氏有婦德墓同原附下生二男長汝命次汝顯汝命男必佑必點必得必熙汝顯男必進佑男美承秀承女長業珍順天人點男道永女朴來龜熙男奎永進男燁永泰永餘不錄於乎公之行蹟必有可傳者而歷代寢遠文籍蕩殘無以影想當日然公能裕後之計奮然徏居長湖世其家而雲仍蕃衍裕後昆之宏謨推可想仰矣慈孫之克闡祖烈於頹俗板蕩之日其仁明之孝亦知其所自來矣是爲之銘曰
世降而遠跡晦而沒莫徵杞宋誰敢揚花公承緖業穩保衷亦耄啣承承乃緋乃玉有崇斧堂三百星霜爰竪貞珉可闡仁明山夷石泐常視玆銘

 


●통정대부용양위부호군호은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湖隱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양(永陽) 이유민(李裕民) 찬(撰)

 

문소(聞韶, 의성義城)의 남쪽 중리(中里) 물엄곡내산(勿奄谷內山) 해좌(亥坐) 언덕에 부호군(副護軍) 이공(李公)의 묘소가 있다. 비(碑)에 새긴 글이 없는 지가 2백 년이 된 지라 자손들이 한탄하고 두려워함이 어떠할까. 하루는 공의 후손 재영(在英)·제동(濟東)이 나를 찾아 비명(碑銘)을 부탁하니 글 못하는 내가 어찌 감당하리오마는 부탁이 간절하여 참람(僭濫)함을 잊고 쓰노니 공의 휘는 숙(琡)이요, 자는 경향(景亨)이며 호는 호은(湖隱)이고 관향(貫鄕)은 경주(慶州)니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신라(新羅)·고려(高麗)를 지나면서 벼슬이 계속 트니 조선조(朝鮮朝) 들어와 휘 승직(繩直)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다. 이분이 휘 시민(時敏)을 낳으니 호는 금호(琴湖)다. 경학(經學)에 마음이 잠기고 강개(慷慨)한 기질이 있었다.
이분이 휘 종준(宗準)을 낳으니 호는 용재(慵齋)다. 문과교리(文科校理)를 지내고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서울에 가서 글과 글씨로 크게 중국에서 그 이름을 떨쳤다. 다만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당한 뒤 설원복관(雪冤復官) 부제학(副提學)을 받으니 공에게 6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윤공(胤恭)이니 참봉(參奉)이고 증조의 휘는 찬(燦)이고 호는 묵우헌(黙愚軒)이니 문을 닫고 학문을 독실(篤實)히 하다. 조의 휘는 기실(起實)이니 수직첨추(壽職僉樞)요, 부친의 휘는 자원(自原)이며 호는 인암(忍庵)이니 수직통정(壽職通政)이고 모친은 창주한씨(淸州韓氏)다.
현묘(顯廟) 신축(辛丑, 1661) 공이 나니 용모가 단정하고 품성이 총명하여 겨우 성동(成童, 15살)이 됨에 성인의 기상이 있으니 대인공(大人公, 부친)이 심히 사랑하여 문호(門戶)의 발전을 기대했더니 당시의 아름다운 행실과 융성하던 덕업을 고증할 길이 없으니 이 통탄할 일이라. 중년에 집을 옮겨 문소(聞韶)의 장호(長湖)에서 살면서 호를 호은(湖隱)이라 하고 나날이 벗으로 더불어 명승지를 찾아 산과 물을 즐기더니 나라에서 은전(恩典)이 내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이 되고 영묘(英廟) 갑인(甲寅, 1734)에 자택에서 별세하다.
배(配)는 고성이씨(固城李氏)니 부덕(婦德)이 있었고 묘는 같은 언덕 아래 있다. 2남을 낳으니 맏아들에 여명(汝命)이요, 다음이 여현(汝顯)이며 여명(汝命)의 아들에 필우(必佑)·필점(必點)·필득(必得)·필희(必熙)고 여현(汝顯)의 아들에 필진(必進)이며 필우(必佑) 아들에 미승(美承)·수승(秀承)이고 딸은 순천(順天) 장업진(長業珍)에 출가했고 필점(必點)의 아들에 도영(道永)이요, 딸은 박래구(朴來龜)에 출가했고 필희(必熙)의 아들에 규영(奎永)이며 필진(必進)의 아들에 엽영(燁永)·태영(泰永)이고 나머지는 다 수록 못 한다.
공의 행적(行蹟)이 반드시 전할만한 것이 있음 직하나 역대(歷代)가 오래되고 문헌(文獻)이 소멸하여 당시 일을 생각조차 알 수 없으나 공이 능히 뒤를 위하며 분연(奮然)히 장호(長湖)에 옮겨서 대로 그 집을 지키고 자손이 번성하니 자손을 위한 큰 계획을 가히 우러러 생각할 수 있다. 자손이 조상을 밝히는 것이 풍속(風俗)이 무너져가는 즈음이라 그 어질고 밝은 효(孝)가 또한 그 큰 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을 써 가로대
세상은 멀고 자취는 없어져 고증할 수 없으니 뉘 감히 천양(闡揚) 할까. 공이 선대(先代) 업을 이어 중심으로 보전하도다. 수직(壽職)이 내려지니 붉은 띠와 옥의 관자로다. 높은 유택(幽宅)은 2백 년이 오래 도다. 이에 비(碑)를 세워 가히 어짊을 드러내기 위해 산을 다듬고 돌을 세우니 오히려 이 색인을 보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