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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5세손 인암공 이자원] 通政大夫忍庵李公墓碣銘(통정대부인암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17:51

□용재공(慵齋公) 5세손 인암공(忍庵公) 이자원(李自原)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②창랑공(蒼浪公) 기실(起實) → 5世孫 ②인암공(忍庵公) 자원(自原)

 

 

通政大夫忍庵李公墓碣銘 幷序
(통정대부인암이공묘갈명 병서)
-永陽(영양) 李裕民(이유민) 撰(찬)

 

公諱自原字順元號忍庵姓李氏貫慶州新羅佐命功臣諱謁平始祖也其後簪組世襲至勝國而有諱之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入鮮朝諱繩直官大司憲以淸白見重於朝是生諱時敏進士號琴湖以淸望名於世是生諱宗準文科校理選湖堂以佔畢金先生門第被戊午禍 贈副提學享鏡光院栢麓社世稱慵齋先生而卽公之五代祖也高祖諱德淵曾祖諱胤恭參奉祖諱燦號黙愚軒杜門晦跡修學行克紹先徽 考起實壽僉樞妣仁同張氏萬曆庚戌生公於琴溪里第自幼狀貌俊偉聰明過人王考黙愚公甚奇愛之稍長不煩敎督而文藝夙就期以門戶養親躬漁獵供甘旨晨昏定省未甞少懈及丁憂一遵家禮旣葬廬墓終制素性沈重嚴毅不脫冠帶待人接物必以其禮未甞作趨時俯仰益念絶世路爲隱名終老計凡世之窮亨得喪視之若過空浮雲佳辰令節逍遙歌詠於烟霞水石之中不知老之將至榮辱是非一無累於靈臺之上年踰入耋天爵自至陞通政階 肅廟甲戌以天年終葬于義城佳音面德川飛鳳山南麓栗冠嶝乾坐原配淸州韓氏先公沒墓雙墳附左一子琡孫男汝命汝顯汝命男必佑必點必得必熙汝顯男必進餘不錄於乎今距公之世三百有餘禩矣滄桑累變文籍蕩殘懿行實跡無得己考據其萬一斯爲可慨也己日公之九代孫在英在亨袖其世傳遺事略抄訪余于達句寓舍請公表阡之文余以非其人辭之固而請愈勤不獲己咸其爲先之篤次如右係之銘曰
慵爺賢裔黙翁肖孫公生是家高大于門世與我違榮辱浮雲九旬康强壽陞通政大年曰終生順沒寧飛鳳南麓衣舃攸藏我銘貞珉昭示無彊

 


●통정대부인암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通政大夫忍庵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양(永陽) 이유민(李裕民) 찬(撰)

 

공의 휘는 자원(自原)이요, 자는 순원(順元)이며 호는 인암(忍庵)이니 경주이씨(慶州李氏)라.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그 뒤에 벼슬이 대로 연해서 휘 지수(之秀)는 삼중대광금자광록대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 승직(繩直)은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청백(淸白)으로 조정에 중용되었고 휘 시민(時敏)을 생하니 진사(進士)에 호는 금호(琴湖)요, 청백(淸白)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고 휘 종준(宗準)을 생하니 문과교리(文科校理)로 호당(湖堂)에 뽑혔는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입은 뒤에 부제학(副提學)을 받고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백록리사(栢麓里社)에 배향(配享)되니 세상이 일컫는 용재선생(慵齋先生)이 공의 5대조가 된다. 고조는 덕연(德淵)이요, 증조의 윤공(胤恭)이니 참봉(參奉)이며 조는 찬(燦)이요, 호는 묵우헌(黙愚軒)이다.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려 학행(學行)을 닦아 능히 선조의 아름다운 자취를 이었다. 부친의 휘는 기실(起實)이니 수직첨추(壽職僉樞)고 모친은 인동장씨(仁同張氏)니 만력(萬曆) 경술(庚戌, 1790)에 공이 금계(琴溪) 자택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준결하고 총명이 과인(過人)하니 조부 묵우헌공(黙愚軒公)이 심히 사랑하시더니 장성함에 가르침을 번거로이 아니하고도 문학(文學)이 성취되니 장차 문호(門戶)에 발전을 기약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때 몸소 물에 가서 고기 잡고 산에 가서 짐승 잡아 반찬을 공괴하고 아침저녁 부모 침소를 보살피어 게으름이 없더니 부모가 별세함에 초종장례(初終葬禮)를 가례(家禮)에 따랐고 장사지낸 후에는 묘소에서 여막(廬幕)을 하고 3년을 마치다. 본 성품이 무겁고 엄하며 굳세서 의관을 벗지 않고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할 때도 반드시 예절을 맞게 하며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이름을 숨기고 늙으면서 세상에 부귀영화는 뜬구름같이 보고 명절을 당하면 연하수석(烟霞水石) 속에 읊으며 노래하여 늙음이 오는 것도 몰랐다. 영욕(榮辱)과 시비(是非)를 해서 마음에 얽매인 일이 없이 80년을 지나니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을 받았다. 숙묘(肅廟) 갑술(甲戌, 1694)에 천년(天年)으로 졸하니 의성(義城) 가음면(佳音面) 덕천비봉산(德川飛鳳山) 남록(南麓) 율관등(栗冠嶝) 건좌(乾坐) 언덕에 장사하다. 배(配)는 청주한씨(淸州韓氏)니 공보다 먼저 졸하고 묘는 쌍분(雙墳)으로 왼쪽에 있다. 생 1남 하니 숙(琡)이고 손자는 여명(汝命)·여현(汝顯)이고 여명(汝命) 남에 필우(必佑)·필점(必點)·필득(必得)·필희(必熙)요, 여현(汝顯) 남에 필진(必進)이고 나머지는 다 기록 않는다.
슬프다, 지금으로부터 공의 대가 3백여 년이라 창상(滄桑)이 여러 번 변하고 문적(文蹟)이 탕진(蕩盡)되어 당시 행적(行蹟)의 만분의 일도 상고할 수 없으니 개탄할 일이라. 공의 9대손 재영(在英)·재형(在亨)이 대로 전하는 유사(遺事)를 가지고 달구(達句) 내 집까지 찾아 공의 묘문(墓文)을 청하니 내가 적임이 아니라고 굳게 사양하니 청하는 것이 더욱 간절하여 그 조상 위하는 정성에 감동하여 대강 위와 같이 펴고 이어 명(銘)해 가로돼
용재공(慵齋公)의 어진 후예(後裔)요, 묵우헌공(黙愚軒公)의 어진 손자라. 공이 이집에 나니 문호(門戶)를 높일까 했더니 세상과 인연이 없어 영옥(榮辱)을 뜬구름과 같이 보았네. 구십을 편히 지내니 수직(壽職)이 통정(通政)이라 천년(天年)으로 세상을 마치니 순하게 살고 죽어서 편하도다. 비봉산(飛鳳山) 남록(南麓)에 의관을 묻혔네. 내가 비석에 새겨 무궁하게 보이리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