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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4세손 창랑공 이기실] 僉樞月城李公墓碑銘記(첨추월성이공묘비명기)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17:28

□용재공(慵齋公) 4세손 창랑공(蒼浪公) 이기실(李起實)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②창랑공(蒼浪公) 기실(起實)

 

 

僉樞月城李公墓碑銘記 幷序
(첨추월성이공묘비명기 병서)
-達城(달성) 徐庭桂(서정계) 撰(찬)

 

公諱起實字光益李氏系出新羅佐命大臣諱謁平爲始祖麗季三重大匡月城君諱之秀爲中祖生諱揆四宰諡貞烈生諱元林判司僕寺事生諱蔓實吏曹判書生諱繩直朝鮮初 洪武戊午生俱中生進 永樂庚子文科除楊州牧使尋遷慶尙道觀察使陞大司憲以淸白見重於世於公間六世生諱時敏號琴湖 景泰癸酉俱中生進高祖諱宗準號慵齋以佔畢門徒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 肅廟朝 贈副提學享鏡光書院栢麓里社曾祖諱德淵參奉祖諱胤恭參奉考諱燦號黙愚軒壽職嘉善杜門晦跡養德林泉修學篤行克紹先徽妣慶州金氏公生於 萬曆乙亥琴溪世庄以壽陞僉樞卒於 康熙癸卯享年八十九葬于啼鳳山癸坐原配仁同張氏公墓同麓丑坐生三男自明自原自吉明男璟原男琡吉男鶴曾玄不盡錄嗚呼公之歿距今三百餘禩墓道尙無顯刻爲後孫之所慨恨也其胄孫鼎鎬甫治金伐石協謀于族中傍孫成鎬所述遺事一通要我於龜城之舍屬不侫請銘余起而復之曰非其人而且無文者何敢當是役矧玆慈孫爲先之誠亦復何如責之益勤噫記曰先世有美而不知不仁也知而不闡不明也此亦仁明者也遂感而據其撰次如右係之銘曰
顯允公世上有羅麗文獻可徵簪組是繼琴湖古宅慵齋祖襧黙爺庭下學以詩禮晦跡武蹈篤行遵例兢兢業業先徽母替也襲壽上恭承嘉惠歸臥鳳山啼時何逮尙闕隧表殆三百歲慈孫所感伐石標揭墓道重新巒岡軆勢神理人情用伸一切不揆僭忘銘此謹製

 


●첨추월성이공묘비명기 병서 역문
(僉樞月城李公墓碑銘記 幷序 譯文)
-달성(達城) 서정계(徐庭桂) 찬(撰)

 

공의 휘는 기실(起實)이요, 자는 광익(光益)이며 성은 이씨(李氏)니 근원이 신라에서 나다.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고려말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가 중조(中祖)가 되고 휘 규(揆)를 낳으니 사재(四宰)를 역임하고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며 휘 원림(元林)을 낳으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고 휘 만실(蔓實)을 낳으니 이조판서(吏曹判書)며 휘 승직(繩直)을 낳으니 조선초(朝鮮初) 홍무(洪武) 무오년(戊午年, 1438년)에 낳다.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하고 영락(永樂) 경자(庚子, 148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제수받았다. 조금 뒤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대사헌(大司憲)에 오르니 청백(淸白)으로 세상에서 무겁게 추앙을 받았으나 공과는 6대 이상이 된다. 휘 시민(時敏)을 낳으니 호는 금호(琴溪)다. 경태(景泰) 단종(端宗) 원년 계유년(癸酉年, 1453년)에 생원(生員)에 진사(進士)에 다 합격하다. 고조의 휘는 휘 종준(宗準)이고 호는 용재(慵齋)니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입었으니 세상이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른다. 숙묘조(肅廟朝)에 부제학(副提學)을 받고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백록리사(栢麓里社)에 입향되다. 증조의 휘는 덕연(德淵)이니 참봉(參奉)이고 조의 휘는 윤공(胤恭)이니 참봉(參奉)이며 고의 휘는 찬(燦)이니 호는 묵우헌(黙愚軒)이니 수직(壽職) 가선(嘉善)이다. 문을 닫고 자취를 숨겨 산림에서 덕을 기르고 학문을 닦고 행실을 돈독히 하며 능히 선조의 아름다운 행적(行蹟)을 이어가다.
비위(妣位)는 경주김씨(慶州金氏)니 공이 만력(萬曆) 을해(乙亥) 금계(琴溪)집에서 낳다. 수직첨추(壽職僉樞)를 받고 강희(康熙) 계묘(癸卯)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89라. 제봉산(啼鳳山) 계좌(癸坐) 언덕에 안장하다. 배(配)는 인동장씨(仁同張氏)니 공의 묘소와 같은 산 축좌(丑坐)다. 3남을 낳으니 자명(自明)·자원(自原)·자길(自吉)이고 자명(自明)의 아들에 경(璟)이고 자원(自原)의 아들에 숙(琡)이며 자길(自吉)의 아들에 학(鶴)이고 증손·고손 이하는 다 수록 못 한다.
슬프다, 공이 졸한지가 지금으로부터 2백여 년이나 아직 비명(碑銘)이 없으니 자손된 자의 통탄하는 바이다. 그 후손 정호(鼎鎬)가 돌을 준비하여 족중(族中)에 협의하고 방손(傍孫) 성호(成鎬)의 지은 유사(遺事)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위촉하여 비명(碑銘)을 요구하거늘 내 일어나 대답하되 그 적임이 못 되고 글을 못 하니 어찌 이일을 감당하리오. 한데 자손이 위선하는 정성으로 독촉이 심하니 슬프다! 써 가로대 선대에서 아름다움이 있는데 알지 못하는 것은 어질지 못함이요 알면서 드러내지 않는 것은 밝지 못함이라. 이 일은 어질고 밝은 일이라 감동되어 위와 같이 쓰고 이어 명(銘)을 지으니 명(銘)에 가로대
공의 집 유래는 신라와 고려에서 전했다. 문헌(文獻)을 고증할 수 있고 벼슬이 계승했다. 금호(琴湖)에 옛집이요, 용재(慵齋)가 어진 조상이다. 묵우헌(黙愚軒) 뜰 아래서 시례(詩禮)를 배웠다. 자취를 산림(山林)에 숨기고 독실(篤實)한 행실이 준례(遵例)를 따랐고 긍긍업업(兢兢業業) 조심하여 선대 미적을 떨구지 않았네. 대대로 수직(壽職)을 내리니 공순이 혜택을 이었도다. 돌아가 제봉산(啼鳳山)에 누우니 봉이 울 때 어찌 따르랴. 오히려 묘비(墓碑)를 못 한 것이 3백 년이 지났도다. 자손들이 감화(感化)되어 돌을 세워 표(表)를 하니 묘도(墓道)가 거듭 새롭고 강만(岡巒)이 밝아졌다. 귀신의 이수와 사람의 정이 일체로 깃드니 참람(僭濫)함을 무릅쓰고 이 명(銘)을 쓰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