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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6세손 가선공 이기득] 嘉善大夫月城李公墓碣銘(가선대부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6. 17:20

□용재공(慵齋公) 6세손 가선공(嘉善公) 이기득(李氣得)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①소묵재공(小黙齋公) 귀실(貴實) → 5世孫 ②노주공(鷺洲公) 순(王+享) → 6世孫 가선공(嘉善公) 기득(氣得)

 

 

嘉善大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가선대부월성이공묘갈명 병서)
-豊山(풍산) 柳賢佑(유현우) 撰(찬)

 

公諱氣得字國永姓李氏貫慶州以新羅佐命大臣諱謁平爲始祖自後世襲冠冤高麗時有諱之秀金紫光祿大夫月城君生諱揆四宰諡貞烈生諱元林判司僕寺事生諱蔓實吏曹判書生諱繩直大司憲以淸白見重生諱時敏擢生俱中生進號琴湖有重望始居安東之琴溪生諱宗準選湖堂官之舍人被戊午禍贈副提學世稱慵齋先生無嗣以弟訓導諱公準子參奉諱德淵子之於公間五世高祖諱胤恭參奉曾祖諱燦號黙愚軒壽嘉善祖諱貴實壽通政考王+享壽通政妣安東權氏銀根女以 顯廟甲寅七月十五日生公以戊寅八月十五日終享年八十五葬于梅羅谷戌坐之原配貞夫人眞城李氏宗寧女墓與公同堋育一男遄通政通政一男漢杰漢杰一男時茂時茂一男興年興年二男泰益泰能參奉泰益二男孟赫祿赫通德郞參奉一男命赫必下不錄於乎今距公之世二百有幾十禩矣桑瀾百翻杞宋無徵曷從而知其事行之萬一而敢當闡揚之爲哉惟其所感者若使天之所施於仁者而壽則若公者其爲仁者無違矣九旬康寧子而繼父孫而繼祖連綿四世世有優老之典然則維公之仁乃世世傳受之仁也審矣豈不休哉日其後孫濟旭濟特索余以表阡之文余非其人何敢當是寄而旋感其爲先之篤僣爲之序繼之以銘銘曰
卓哉慵爺行高學博疑立昏朝旋被其毒可戒餘殃公乃退縮林下婆娑有書有屋世襲遺謨曰仁與德天鑑孔昭降此胡福黃冠颼飀奕世仙籙耄啣承承乃緋乃玉浩然歸藏于梅之麓銘玆在玆我言非黷

 


●가선대부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嘉善大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풍산(豊山) 유현우(柳賢佑) 찬(撰)

 

공의 휘는 기득(氣得)이요, 자는 국영(國永)이니 경주이씨(慶州李氏)라.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뒤로부터 벼슬이 연속하여 고려 때에 휘 지수(之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이요, 휘 규(揆)를 낳으니 사재(四宰)에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요, 휘 원림(元林)을 낳으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요, 휘 만실(蔓實)을 낳으니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을 낳으니 대사헌(大司憲)인데 청백(淸白)으로 중용되었고 휘 시민(時敏)을 낳으니 생원진사(生員進士)에 합격했고 호를 금호(琴溪)라 하니 명망(名望)이 높았다. 처음 안동(安東) 땅 금계(琴溪)에서 살았다. 휘 종준(宗準)을 낳으니 호당(湖堂)에 뽑히고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다가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당한 후 부제학(副提學)을 증직(贈職) 받았으니 세상이 칭하는 용재선생(慵齋先生)이다. 아들이 없어 동생 훈도공(訓導公) 휘 공준(公準)의 아들 참봉(參奉) 휘 덕연(德淵)을 양자(養子)로 하니 공에는 5대조 이상이고 고조의 휘는 윤공(胤恭)이니 참봉(參奉)이요, 증조의 휘는 찬(燦)이니 호는 묵우헌(黙愚軒) 수직가선(壽職嘉善)이고 조부의 휘는 귀실(貴實)이니 수직통정(壽職通政)이고 부친의 휘는 순(王+享)이니 수직통정(壽職通政)이며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 은근(銀根)의 따님이다.
현묘(顯廟) 갑인년(甲寅年, 1674년) 7월 15일에 공이 출생, 무인년(戊寅年, 1758년) 8월 15일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85세라. 매라곡(梅羅谷) 술좌(戌坐)의 산에 장사지내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진성이씨(眞城李氏) 종영(宗寧)의 따님이다. 묘는 공과 동봉(同封)이다. 1남을 낳으니 휘는 천(遄)이니 통정(通政)이요, 통정(通政)이 1남을 낳으니 한결(漢杰)이요, 한결(漢杰)이 1남을 낳으니 시무(時茂)요, 시무(時茂) 1남을 낳으니 흥년(興年)이요, 흥년(興年)이 2남을 두니 태익(泰益)·태능(泰能) 참봉(參奉)이요, 태익(泰益)이 2남을 낳으니 맹혁(孟赫)과 록혁(祿赫)이니 통덕랑(通德郞)이요, 태능(泰能) 1남에 명혁(命赫)이고 그 아래로는 기록지 못한다.
슬프다, 이제로부터 공의 시대까지 2백여 년이라 창상(滄桑)이 변하고 문헌(文獻)에 고증이 없으니 어찌 공의 행적(行蹟)에 만분의 일이라도 알고 천양(闡揚)을 하겠는가. 그 느낀 바는 하늘이 어진 자에 수(壽)를 많이 준다고 했으니 공인즉 어짊에는 들림이 없다고 본다. 90을 편히 살고 아들이 뒤를 잇고 손자가 조부를 이어 연속 4대에 안과태평(安過太平)하니 공의 어짊에 대대로 전해주는 어짊인가 하노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 그 후손 제욱(濟旭)·제특(濟特)이 나를 찾아 비명(碑銘)을 부탁하니 감당하기 어려우나 그 조상을 위하는 정성에 감동되어 서문(序文)을 짓고 명(銘)을 지으니 명(銘)에 가로대
높다 용재선생(慵齋先生)이여, 행금이 높고 학문이 넓도다. 혼암(昏暗)한 조정에 섰다가 혹독한 화(禍)를 입었도다. 또 남은 재앙이 두려워서 산림(山林)으로 물러났도다. 산림(山林)에 서식하니 글도 읽고 집도 이네. 대대로 가법(家法)을 따르니 어짊과 덕이로다. 하늘의 거울이 비쳐 밝히니 큰 복을 내리셨네. 황관(黃冠)이 나부끼니 세상 신선이 분명하다. 80 노인의 뒤를 잇는 자손은 비단(緋緞)과 옥(玉)이로다. 호연(浩然)이 살다 가니 매라골[梅羅谷] 기슭에 편하게 묻혔도다. 이에 새겨두니 나의 말이 거짓이 많으리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