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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1세손 갈헌공 이치준] 葛軒處士月城李公墓碣銘(갈헌처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5. 23:32

□용재공(慵齋公) 11세손 갈헌공(葛軒公) 이치준(李致俊)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①소묵재공(小黙齋公) 귀실(貴實) → 5世孫 ①중추부사공(中樞府事公) 서(瑞) → 6世孫 ②행포공(杏圃公) 립(立) → 7世孫 ②해송(海松) → 8世孫 통훈공(通訓公) 영종(榮種) → 9世孫 ②운재공(雲齋公) 시만(時萬) → 10世孫 ②갈운공(葛雲公) 동규(東圭) → 11世孫 ④갈헌공(葛軒公) 치준(致俊)

 

 

葛軒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갈헌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興海(흥해) 裵東煥(배동환) 撰(찬)

 

公諱致俊字得王+將葛軒自署也李氏籍慶州新羅佐命功臣謁平寔上祖麗季有諱之秀封月城君生諱揆官四宰諡貞烈生諱元林判司僕寺事生諱蔓實吏曹判書生諱繩直大司憲生諱時敏號琴湖俱中生進始居永嘉之琴溪村生諱宗準校理佔畢齋門人罹戊午史禍世稱慵齋先生傳四世有諱燦壽職嘉善大夫號黙愚軒有文行公九世以上也曾祖曰榮種通訓大夫祖曰時萬工曹參議號雲齋考曰東圭大邱判官號葛雲妣淑人安東金氏父聖昌 純廟癸亥公生于安東府邸李門巨里幼狀貌英俊才性過人始受學于王考公不煩敎督而自如勤勉至于十歲盡讀小學文義己通父兄長上咸奇愛之期之以門戶之望性淳孝善事二親少無子弟之過弱冠遭先考喪哀毀過踰服闋又遭內艱喪公早失怙恃至痛至心每當喪餘之日先期齊素奠需必豊潔以致如在之誠臨祭哀號如袒括時中歲移居于府西河臨里盖避城市塵囂就靜爲裕後計自是課農勸學以孝友勤儉爲一副家法常申戒子侄持身以謙謹對人以款厚鄕里咸艶服而稱頌焉庚午九月十四日考終于寢享年六十八葬于臥龍面甘厓明子峙艮坐之原配公州李氏順榮女有婦德先公五年卒墓雙墳祔右生五男一女相夏相魯相顥相䂓相謨女林奎達相夏系男敎炯女權啓哲相魯系男周炯相顥男敎炯出樂炯女權奎大沈奎燮權泳熙權永淑相䂓男周炯出晩炯相謨男益炯雲炯女金敎仁黃燦祖餘不盡錄今來請銘者公五世胄孫濟仁也銘曰
敦本而懋實樂善而好義可驗餘慶攸暨有是後嗣之昌熾

 


●갈헌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葛軒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흥해(興海) 배동환(裵東煥) 찬(撰)

 

공의 휘는 치준(致俊)이요, 자는 득장(得王+將)이며 갈헌(葛軒)은 그 호다. 경주이씨(慶州李氏)니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고려말(高麗末)에 휘 지수(之秀)는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고 휘 규(揆)는 벼슬이 사재(四宰)를 지내고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며 휘 원림(元林)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고 휘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은 대사헌(大司憲)이고 휘 시민(時敏)은 호가 금호(琴湖)니 생원진사(生員進士)에 합격하였고 처음으로 안동(安東) 금계(琴溪)에 살며 휘 종준(宗準)을 출생하니 교리(校理)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입었으니 세상에서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른다. 4대를 내려와서 휘 찬(燦)은 수직(壽職) 가선대부(嘉善大夫)요, 호는 문우헌(黙愚軒)이며 문행(文行)이 있었으니 공에게는 9대 이상이 된다. 증조는 휘 영종(榮種)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요, 조부는 시만(時萬)이니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증직(贈職) 받았고 호는 훈재(雲齋)다. 부친은 동규(東圭)니 대구판관(大邱判官)이며 호는 갈운(葛雲)이요, 비(妣)는 숙인(淑人) 안동김씨(安東金氏) 성창(聖昌)의 따님이다.
순묘(純廟) 계해년(癸亥年, 1803년)에 공이 안동부(安東府) 이문거리(李門巨里)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용모가 영준(英俊)하고 재주가 과인(過人)하더니 처음 글을 왕고(王考, 조부)에 배웠다. 조부가 가르치는데 번거롭게 꾸중을 아니 해도 스스로 힘써 부지런히 공부하더니 10세가 되어서 소학(小學)을 다 읽고 그 뜻을 통달하니 부형(父兄)들이 사랑하며 문호(門戶)를 빛낼 제목이라고 기대했었다. 성품이 착하고 효성이 있어 자제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약관(弱冠) 나이에 부친상을 당함에 슬퍼하기를 정도에 지나치고 복이 끝나자 연속해서 모친상을 당하니 공이 일찍이 부모를 잃은지라 원통한 마음이 뼈에 사무쳐서 매양 제삿날을 당하면 전일부터 목욕재계하고 어육(魚肉) 반찬을 금하고 제주(祭主)는 반드시 풍부하고 정결하게 장만하여 생존 시와 같이 성의를 다하였다. 중년에 안동읍(安東邑) 서쪽 하임리(河臨里)에 옮겨 삶은 성중(城中)의 번잡한 것을 피해서 조용히 후세를 위해 계획함이라. 이로부터 농사에 주력하고 학문을 권하며 효우(孝友) 근검(勤儉)으로 치가(治家)의 법도로 삼고 항상 자질(子侄)들을 경계하되 몸을 겸손히 하고 남을 대할 때는 너그러이 하라 하니 향리(鄕里)가 다 열복(悅服)하고 칭송하더라. 경오년(庚午年, 1870년) 9월 14일 자택에서 별세하니 향년(享年)이 66이라. 와룡면(臥龍面) 감애(甘厓) 명자치(明子峙) 간좌(艮坐)의 언덕에 안장하다.
배(配)는 공주이씨(公州李氏)니 순영(順榮)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공보다 5년 먼저 별세하니 묘는 쌍분(雙墳)으로 오른쪽에 안장하다. 생 5남 1녀 하니 상하(相夏)·상로(相魯)·상호(相顥)·상규(相䂓)·상모(相謨)요, 따님은 임규달(林奎達)에 출생하다. 상하(相夏) 양자(養子)에 교형(敎炯)이요, 따님은 권계철(權啓哲)에 출가했고 상로(相魯) 양자(養子)에 주형(周炯)이요, 상호(相顥) 아들에 교형(敎炯)이 출계(出系) 갔고 낙형(樂炯)이요, 따님은 권규대(權奎大)·심규섭(沈奎燮)·권영희(權泳熙)·권영숙(權永淑)에 출가했고 상규(相䂓) 아들에 주형(周炯)은 출계(出系)하였고 만형(晩炯)이라. 상모(相謨) 아들에 익형(益炯)·운형(雲炯)이요, 따님은 김교인(金敎仁)·황찬조(黃燦祖)라. 나머지 자손은 다 수록 못 한다. 이번에 명(銘)을 칭한 사람은 공의 5대 주손(胄孫) 제인(濟仁)이라. 명(銘)에 가로대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지(實地)에 힘을 쓰며 착한 일을 즐기고 의리를 좋아하니 낙(樂)과 경사(慶事)가 면면히 이어 이러한 후손의 창성(昌盛) 한대 증험(證驗)하리로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