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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2세손 옥계공 이상기] 處士慶州李公墓碣銘(처사경주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5. 23:13

□용재공(慵齋公) 12세손 옥계공(玉溪公) 이상기(李相璣)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①소묵재공(小黙齋公) 귀실(貴實) → 5世孫 ①중추부사공(中樞府事公) 서(瑞) → 6世孫 ②행포공(杏圃公) 립(立) → 7世孫 ②해송(海松) → 8世孫 통훈공(通訓公) 영종(榮種) → 9世孫 ②운재공(雲齋公) 시만(時萬) → 10世孫 ②갈운공(葛雲公) 동규(東圭) → 11世孫 ③임일재공(臨溢齋公) 갑준(甲俊) → 12世孫 ④옥계공(玉溪公) 상기(相璣)

 

 

處士慶州李公墓碣銘(처사경주이공묘갈명) 幷序(병서)
-從五代孫(종오대손) 仁根(인근) 謹撰(근찬)

 

日四從祖順鎬氏謂余曰吾先世皆有碣銘獨吾曾王考墓尙闕信銘爲人後者悚莫甚焉願君患賜一言以免爲先不考之責余嘆曰猗歟壯哉數年前己巳旣竪碣于高祖之墓未幾年又欲曾祖之墓余雖不當其任感其誠孝不敢固辭依其譜牒所載平日所聞於門父老者而叙之公諱相璣字舜汝自號曰玉溪姓李氏貫慶州新羅佐命功臣諱謁平爲肇祖麗朝金紫光祿大夫月城君諱之秀爲中祖鮮朝有諱宗準弘文館校理被戊午禍後贈副提學號慵齋先生是爲顯祖諱榮鍾諱時萬諱東圭判官諱甲俊是爲高曾祖考妣安東金氏龍彬女西紀一八三六年丙申生公于河臨本苐公神彩壯大宇量濶達有長子風耕讀之餘垂釣於河臨之濱獲魚而孝奉雨親兄弟五人一室同居友愛尤篤斷念宦路逍遣林泉粤癸酉之年當王考之喪襄禮時喪路險峻靈輀不得前進公拔木轉石平坦開路無事安葬其義勇誠孝驚動一時天嗇仁壽卒以一八八七年丁丑十一月九日享年四十二葬于平恩面梧云里壬坐原配安東金氏永運女有婦德生一男四女男大炯女適安東金昌鎭慶州金正一安東權寧豊安東權寧甲大炯男在慶女適淸州鄭準欽在慶生三男三女長重鎬次順鎬光鎬女適安東金載年宣城李基助安東權寧萬餘不收錄銘曰禀公之質兮寬厚長碩猗公之行兮孝友敦睦公不壽兮天胡吝嗇世代久遠兮恐其湮蹟今此銘之兮悠久不泐


從五代孫 仁根 謹撰

 


●처사경주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處士慶州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종오대손(從五代孫) 인근(仁根) 근찬(謹撰)

 

어느 날 사종조(四從祖) 순호(順鎬) 씨 나에게 말하기를 이리 선대 묘소에 다 비문(碑文)이 있는데 증조부 묘소에만 비(碑)가 없으니 자손된 도리에 죄송함이 막심(莫甚)하니 원컨대 군(君)은 글 한 수 지어주면 조상에 불효한 죄를 면할까 하노라. 장하고 아름답다. 효심이여! 수천 년에 고조 묘전(墓前)에 비(碑)를 세우고 얼마 되지 않아 또 증조 묘비(墓碑)를 세우고자 글을 청하니 내 어찌 사양할 수 있으리오. 불문이나 대강 적노니 공의 휘는 상기(相璣)요, 자는 순여(舜汝)며 호는 옥계(玉溪)니 성은 이씨(李氏) 관은 경주(慶州)로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가 중조(中祖, 분파조分派祖)가 되며 조선조(朝鮮朝) 때 휘 종준(宗準)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무오년(戊午年, 1498년)에 사화(史禍)를 입었고 뒤에 부제학(副提學)을 받았으니 호는 용재선생(慵齋先生)이다. 이분이 현조(顯祖)가 된다. 휘 영종(榮鍾), 휘 시만(時萬), 휘 동규(東圭) 판관(判官), 휘 갑준(甲俊) 위의 분이 고조·증조·조부·부친이 되고 모친은 안동김씨(安東金氏)니 용빈(龍彬)의 따님이다.
서기 1836년 병신년(丙申年)에 하임(河臨)마을에서 공이 출생하셨다. 공은 체격이 장대하고 도량이 넓어 장부의 기상이었다. 글 읽고 밭 가는 시간 외에는 냇가에 가서 고기를 잡아 양친의 구미를 맞추어 드렸고 형제 다섯 분이 한방에 거처하면서 우애가 돈독하셨다. 계유년(癸酉年)에 조부상을 당했을 때 상로(喪路)가 험준하여 행상이 못 나가 공이 앞에서 나무를 뽑고 돌을 구부려 평탄하게 길을 닦아 무사히 장사를 지냈다. 1887년 정축(丁丑) 11월 9일에 별세하니 연세가 겨우 42라 통탄할 일이다. 산소는 평은면(平恩面) 오운리(梧云里) 임좌(壬坐) 산에 장사지내다.
배(配)는 안동김씨(安東金氏) 영운(永運)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1남 4녀를 낳으니 남에 대형(大炯)요, 딸은 안동(安東) 김창진(金昌鎭), 경주(慶州) 김정일(金正一), 안동(安東) 권영풍(權寧豊), 안동(安東) 권영갑(權寧甲)에 각각 출가했다. 대형(大炯) 아들에 재경(在慶)이요, 따님은 청주(淸州) 정준흠(鄭準欽)에 출가했고 재경(在慶)이 3남 3녀를 두었으니 중호(重鎬)·순호(順鎬)·광호(光鎬)이고 딸은 안동(安東) 김재년(金載年), 선성(宣城) 이기조(李基助), 안동(安東) 권영만(權寧萬)에 출가했다. 나머지는 다 수록 못 한다.
명왈(銘曰) 공의 타고난 자질은 관후(寬厚)하고 장대하다. 아름다운 공의 행실은 부모 형제에 효우하고 돈독하다. 공이 오래 살지 못함이여, 하늘이 어찌 무심한고. 세월이 오래되니 행적이 없어질까 두렵구나. 이제 돌에 새겨 오래도록 남으리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