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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4세손 구재공 이재구] 懼齋月城李公墓碣銘(구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5. 22:15

□용재공(慵齋公) 14세손 구재공(懼齋公) 이재구(李在龜)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①소묵재공(小黙齋公) 귀실(貴實) → 5世孫 ①중추부사공(中樞府事公) 서(瑞) → 6世孫 ②행포공(杏圃公) 립(立) → 7世孫 ①후송(後松) → 8世孫 ①한우(漢祐) → 9世孫 ②춘식(春植) → 10世孫 상인(尙仁) → 11世孫 연암공(蓮巖公) 지범(之範) → 12世孫 ②상우(相遇) → 13世孫 ③정형(鼎炯) → 14世孫 구재공(懼齋公) 재구(在龜)

 

 

懼齋月城李公墓碣銘(구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眞城(진성) 李晩煃(이만규) 撰(찬)

 

人非父母不生欲孝子固夫人之情也而鮮能行之者由未克實用其誠誠則天必鍳之降以不時之物古有王祥今有李君國瑞也君諱在龜月城人勝國世諱之秀金紫三重封月城君入本 朝諱繩直觀察使間一世諱宗準弘文校理號慵齋以佔畢門人廢痼戊午禍子諱德淵參奉後有諱之範篤志力學有遺集生諱相遇子諱鼎炯娶淸州韓氏國榮女以 上皇癸酉五月二十七日生君氣淸容端孩提時己能一心愛親稍長恪勤子職問寢親膳必誠必敬日就隣傳歸卽返面罔或小懈在親側愉色滿容有命疾趨有見詳告異味必手進養極志體人感其義或助供需亦度義而受母傷哀毀幾滅性父甞病懣然憂灼足不履地病口惟思生鯉時天寒氷合君直趨洛濱泣㦝漁父反以匪時無言+卞辭之君乃自剖氷下釣得尺鯉歸供果得神效及後丁艱斷指注血以延須臾哭泣頓絶方蘇初終葬祭克禮無憾三年哭墓風雨不廢因羸瘁成疾己亥十二月十三日卒遠近莫不泣下曰孝子亡矣葬芙蓉山水溶洞庚向原配順興安氏泰鎬女生一女適李昶應鄕人以至行不容泯晦具狀呈營邑竟不報余觀世之以孝矯俗于恩者或有名不副實之歎而乃若君之隱居躬修不求人知一事一行悉出誠心實做所以天鍳之人慕之可擬於吉之篤倫也嗣子周鎬亦醇勤人方博求文字營輯實記來余請表阡文以朴上舍勝振所撰傳來眎傳者固信士也辭不獲依其言叙之系以銘銘曰
鑒純誠而不卑年兮請從以質聞異行而不入告兮亦無以註然猶芳名之永垂兮乃我用不諛之筆

 


●구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懼齋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진성(眞城) 이만규(李晩煃) 찬(撰)

 

사람이 부모가 아니면 태어나지 못하니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마다 인정이나 능히 행하는 자가 드문 것이 능히 그 정성을 다하지 않는 데 있으니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반드시 살피시고 때아닌 물건을 내려주시나니 옛날에 왕상(王祥)이 있으니 지금은 이군(李君) 국서(國瑞)가 있도다.
군(君)의 휘는 재구(在龜)요, 월성인(月城人)이니 선대 휘 지수(之秀) 금자삼중대부(金紫三重大夫)에 월성군(月城君)을 봉(封)하였다. 아조(我朝,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휘 승직(繩直) 관찰사(觀察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한 대를 지나 휘 종준(宗準)이 홍문교리(弘文校理)에 호는 용재(慵齋)니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입었고 자의 휘는 덕연(德淵)이니 참봉(參奉)이요, 뒤에 휘 지범(範篤)은 독실히 글을 배워 유집(遺集)이 있다. 휘 상우(相遇)를 출생하고 휘 정형(鼎炯)은 청주한씨(淸州韓氏) 국영(國榮)의 따님에 장가들어 상황(上皇) 계유년(癸酉年, 1872년) 5월 27일에 군을 출생하다. 군(君)은 기운이 맑고 부모가 단정하여 어릴 때부터 한마음으로 어버이를 사랑하더니 크면서 자식 된 도리를 다하여 밤에 잠자리를 묻고 조석(朝夕)에 반찬을 살피되 반드시 성의껏 또 공경을 다 하고 날마다 이웃 스승에 글을 배우고 돌아오면 부모님에게 보고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부모 곁에 있을 때는 환한 빛이 얼굴에 가득히 하고 명령이 있을 때면 빨리 나오고 들어오며 본 것이 있으면 자세히 고하며 다른 음식이 있으면 손수 들려서 뜻과 몸을 지극히 봉양하니 사람들이 그 의리에 감동하여 혹 도와주는 바 있더라도 반드시 의리에 맞는지 헤아려 받고 모친상에 너무 슬퍼하여 생명이 위태로울 뻔했고 부친 병환 때는 극심이 가득하여 밭이 땅에 디뎌지지 않았으며 병든 입에 산 잉어를 생각하니 어부(漁父)는 겨울이라 때는 엄동이라 얼음이 얼었는데 낙동강(洛東江)으로 달려가서 어부를 보고 울면서 간청을 하니 어부는 겨울이라 잡을 수 없다고 거절하거늘. 군(君)이 스스로 얼음을 깨고 낚시를 드리워서 한 자나 되는 잉어를 잡아 집에 돌아와서 봉친(奉親)했으니 과연 신통한 효력을 얻었고 뒤에 부친이 절명하는지라 재빨리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흘려 넣으니 잠시나마 연명을 시켰으나 천명(天命)으로 별세하니 너무 심히 애통하여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다. 장례와 제사를 유감없이 치르고 삼 년을 묘소를 찾아 통곡하되 비바람에도 끊임이 없었으니 그로 인하여 병이 되어 기해년(己亥年, 1898년) 12월 13일에 졸하니 원근(遠近)이 울지 않는 이 없고 효자(孝子)가 죽었다고 슬퍼하더라. 부용산(芙蓉山) 밑 수용동(水溶洞)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하다.
배(配)는 순흥안씨(順興安氏) 태호(泰鎬)의 따님인데 1남을 생하여 이창응(李昶應)에 출가하다. 향중(鄕中)에서 지극한 효성을 묻어둘 수 없다 하여 모든 사실을 갖추어 감영(監營. 도청)에 주달(奏達)하였으나 희보(喜報)가 없었다.
내가 보건대, 세상에 효도로 은전(恩典)을 받은 자 중에는 이름이 있되 상실이 없음이 간혹 있으나 군(君)과 같은 숨어서 몸소 닦아 남이 알아줌을 구하지 아니하고 한가지 행실이 다 성심과 실지에서 나옴이라 하늘이 살피시고 사람들이 사모하기를 가히 옛날 인륜(人倫)에 독실(篤實)하는 사람에 비길지라 양자(養子) 주호(周鎬) 또한 근실한 사람이라 널리 문자(文字)를 구하고 실기(實記)를 모아서 나에게 와서 비문(碑文)을 청하니 박상사승진(朴上舍勝振)이 지은 바가 전해와서 보이니 전하는 사람이 믿어온 선비라 그 말에 의기하여 쓰고 이어서 명(銘)을 하니 명(銘)에 가로대
순박한 효성을 살피면서 수명은 주지 않으니 모를 일이며 남다른 행실을 듣고도 위에 고하지 않으니 기록할 것도 없으나 꽃다운 이름이 영구히 전할지니 내 아첨하지 않는 붓으로 쓰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