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게시판/기◆행장◆비명

[용재공 6세손 행포공 이립] 通政大夫月城李公墓碣銘(통정대부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5. 21:50

□용재공(慵齋公) 6세손 행포공(杏圃公) 이립(李立)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①소묵재공(小黙齋公) 귀실(貴實) → 5世孫 ①중추부사공(中樞府事公) 서(瑞) → 6世孫 ②행포공(杏圃公) 립(立)

 

 

通政大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통정대부월성이공묘갈명 병서)
-聞韶(문소) 金永煥(김영환) 謹撰(근찬)

 

公諱立字國礎號杏圃系出月城羅草昧降靈于瓢巖佐赫居世創鴻業佐命功臣謁平爲肇祖自後代有達官世襲簪組麗末有諱之秀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爲中祖是生諱揆官四宰諡貞烈生諱元林判司僕寺事生諱蔓實吏曹判書生諱繩直仕于李朝 世宗朝歷仕慶尙道觀察使至大司憲生諱時敏俱中生進號琴湖以文章淸望推重生諱宗準成朝名賢畢齋高足同時諸賢出入經筵歷揚淸華裨補弘多而昏朝匪徒搆誣淸流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於公六代以上也有諱胤恭參奉有諱燦字陽遠號黙愚壽軒嘉善有諱貴實壽通政有諱瑞壽嘉善於公爲高曾祖考俱隱德不仕妣淑人坡平尹氏秀馨女公生于 肅廟辛巳十二月十五日天資雋異才德過人文學孝友爲世師表禍家殘仍無意世路隱居林泉敎誨後進不求聞達蔚有聲華壽躋九耄三品籠秩正廟辛亥十一月十六日卒享年九十一葬子府北彌斗里甲坐之原配淑夫人安東權氏哲承女生三男長後松次海松季自松後松男漢佑漢佐海松男榮鍾自松男漢鍾以下不盡收錄於乎今去公之世殆二百載星霜矣當時之行略世遠難詳亦不可臆測惟其所感者五福之首天之所施於仁者而若公家則代有天爵子而繼父孫而繼祖世有九旬優老之典則公家之仁乃世襲之仁也豈不美哉日其九代孫在璟甫責銘於余余雖不侫感其家之事遂不辭而叙之如右係之以銘 銘曰士守本分古 今幾人今惟李公能參厥班仁厚家聲世修天職勤謹公程克紹先徽積蔭餘慶長流後昆子姓蕃衍理有丁寧瞻彼彌山幽宮之托刻銘于玆昭示千百

 


●통정대부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通政大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문소(聞韶) 김영환(金永煥) 근찬(謹撰)

 

공의 휘는 립(立)이요, 자는 국초(國礎)며 호는 행포(杏圃)니 월성(月城)에서 나왔다. 신라(新羅) 초창기에 신령이 표암(瓢巖)에 내려 혁거세(赫居世)를 도와 대업을 창조한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이 처음 조상이 되고 그 뒤부터 높은 벼슬과 도덕 문장이 대로 계승되어 고려 말엽에 지수(之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이 중간조상이 되며 이분이 휘 규(揆)를 낳으니 벼슬이 사재(四宰)에 시호는 정렬(貞烈)이고 휘 원림(元林)을 낳으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며 휘 만실(蔓實)을 낳으니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을 낳으니 세종조(世宗朝)에 벼슬하여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휘 시민(時敏)을 낳으니 생원진사(生員進士)에 합격하여 호는 금호(琴溪)니 문장(文章)과 청백(淸白)함으로 남의 무거운 추태를 받았고 휘 종준(宗準)을 낳으니 성종조(成宗朝)에 명현(名賢)이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높은 제자라 동시현인(同時賢人)들로 경연(經筵)에 출입하여 청직(淸職)을 역임하고 나라에 보필함이 많았건만 혼초(昏草, 연산군燕山君)에 간신들이 명현(名賢)들을 모함하여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입으니 세상이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른다. 공에게는 6대 이상이 된다. 휘 윤공(胤恭)은 참봉(參奉)이요, 휘 찬(燦)은 자는 양원(陽遠)이고 호는 묵우헌(黙愚軒)이니 수직가선(壽職嘉善)이며 휘 귀실(貴實)은 수직통정(壽職通政)이고 휘 서(瑞)도 수직통정(壽職通政)이니 공의 고조·중조·조부·부친이 된다. 숨어 살며 벼슬을 많이 했다.
모친 숙인(淑人) 파평윤씨(坡平尹氏)니 수형(秀馨)의 따님이다. 공이 숙종(肅宗) 신사(辛巳, 1701) 12월 15일에 낳다. 천품(天稟)이 높고 재덕(才德)이 과인(過人)하여 문학(文學)과 효우(孝友)가 세상에 사표(師表)가 됐으나 사화(史禍)를 당한 집 자선인지라 세상에 나가기를 싫어하고 임천(林泉)에 숨어 후진을 교육하고 남에게 알리는 것을 구하지 않으나 명성이 자연히 높더라. 정종(正宗) 신해(辛亥, 1791)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91이라. 안동부(安東府) 북쪽 미두리(彌斗里) 갑좌(甲坐)의 언덕에 안장하다.
배(配) 숙부인(淑夫人)은 안동권씨(安東權氏)며 철승(哲承)의 따님이니 3남을 출생하였다. 장남에 후송(後松)이요, 다음이 해송(海松)이며 끝이 자송(自松)이고 후송(後松)의 아들에 한우(漢佑)·한좌(漢佐)며 해송(海松)의 아들에 영종(榮鍾)이고 자송(自松)의 아들에 한종(漢鍾)이요, 나머지는 다 수록하지 못한다.
슬프다, 지금으로부터 공의 재세시(在世時)까지가 2백 년이 지났으니 당시의 행적(行蹟)이 세월이 오래되어 상고하기 어렵고 또 억측할 수도 없으나 오직 느낀 바는 약간 오복(五福)에 우두머리인 수(壽)는 하늘이 어진 자에 베푸는 것인 바 공의 집은 대대로 천작(天爵, 오래 살면 주는 벼슬)을 받아 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하고 손자는 조부를 계승하여 대로 90 큰 늙은이의 은전(恩典)을 받았으니 공의 집 어짊은 대로 전하는 인(仁)이 되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하루는 그 9대손 재경(在璟)이 못난 나에게 비명(碑銘)을 위촉하니 그 어진 집에 감동되어 사양치 않고 위와 같이 쓰고 이어 명(銘)을 지으니 명(銘)에 가로대
선비가 분분을 지킨 사람이 고금에 몇 사람인고. 오직 이공(李公)은 그 반열에 참례(參禮)하리라. 인후(仁厚)한 가풍이 대로 천작(天爵)을 받았네. 근검한 행실이 능히 선대 자취를 이었도다. 쌓은 음덕(蔭德)에 오는 경사가 장원하리라. 자손이 번성하니 이수가 분명하도다. 저 미두리(彌斗里) 산에 묘소가 안치되니 이 돌에 새겨서 천백(千百)에 밝게 보이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