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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5세손 낙암공 이윤호] 洛庵處士慶州李公墓碣銘(낙암처사경주이공묘갈명)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5. 18:23

□용재공(慵齋公) 15세손 낙암공(洛庵公) 이윤호(李崙鎬)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 4世孫 ①소묵재공(小黙齋公) 귀실(貴實) → 5世孫 ①중추부사공(中樞府事公) 서(瑞) → 6世孫 ①계희(繼禧) → 7世孫 系子 도선(道善) → 8世孫 ①덕주(德柱) → 9世孫 系子 시백(時白) → 10世孫 동신(東新) → 11世孫 정준(正俊) → 12世孫 系子 첨추공(僉樞公) 상의(相懿) → 13世孫 系子 운봉공(雲峯公) 능형(能炯) → 14世孫 ①초산공(樵山公) 재문(在文) → 15世孫 낙암공(洛庵公) 윤호(崙鎬)

 

 

洛庵處士慶州李公墓碣銘(낙암처사경주이공묘갈명)
-族孫(족손) 仁根(인근) 撰(찬)

 

安東府西玉洞草田乙坐原三尺封故處士公幽宅也公沒後六年卒未臘公之長胤濟義甫請顯銘於不侫余非其任公黙愚軒諱燦之十三代胄孫余之族大父也義不敢辭略叙之如左公諱崙鎬宇公玉號洛庵姓李氏貫慶州新羅開國元勳諱謁平爲鼻祖麗朝金紫光祿大夫月城君諱之秀爲中祖入朝鮮朝贈副提學諱宗準以佔畢齋金光生之高足被燕山之禍世稱戊午賢流之首號曰慵齋先生是爲顯祖高祖諱正俊曾祖諱相懿祖諱能炯考諱在文字德弼妣平康蔡氏宗黙女樊巖濟恭后有婦德西紀一九一○年庚戌生公于府之西河臨之本第公生而異凡長而專心學文分明爲先事親之道終身非懈日與文友鳳隱河相八西岡權寧成半洲柳賢佑隱樵林秉暉小窩安國鎔鳳城琴基東諸賢傾觴討詩消遣林泉悠悠然自樂以無何之崇奄忽棄世於一九八七年丙寅六月十四日享年七十七配安東金氏邦漢女有婦德一九○九年己酉生卒於壬戌三月二十五日葬于與夫君墓所同原乙坐雙墳生四男三女長濟羲次濬燮濟昌濟學女適安東權五鍵興海裵錫熙安東金道顯濟羲男並東永東元東女適安東權奇卓綾城具雲起密陽朴赫洙龍宮全尙鴻濬燮男明東佑東亨東女適安東權日燮濟昌男東直東漢東俊女適安東權寧哲濟學男東洙餘煩不收錄銘曰鶴山南草田原崇三尺乃公阡山水明子孫賢薦禋羲萬斯年

 


●낙암처사경주이공묘갈명 역문
(洛庵處士慶州李公墓碣銘 譯文)
-족손(族孫) 인근(仁根) 찬(撰)

 

안동부(安東府) 서쪽 옥동(玉洞) 초전(草田)에 있는 을좌(乙坐) 묘는 옛 처사공(處士公)의 유택(幽宅)이라. 공이 별세한 지 6년만인 신미년(辛未年) 겨울에 공의 장자 제희(濟羲) 비문(碑文)을 나에게 부탁하니 내가 그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없으나 공은 묵우헌(黙愚軒) 휘 찬(燦)의 13대손이요, 나의 족대부(族大父)가 되는지라 감히 사양할 수 없어 아래와 같이 쓰노니 공의 휘는 윤호(崙鎬)요, 성은 이씨(李氏)며 본관은 경주(慶州)니 신라개국원훈(新羅開國元勳)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고려조(高麗朝)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가 중간시조[中祖, 분파조分派祖]가 되고 조선조(朝鮮朝)에 증부제학(贈副提學) 휘 종준(宗準)이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연산군(燕山君) 때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당한 분이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하니 현조(顯祖)가 된다. 고조의 휘는 정준(正俊), 증조의 휘는 상의(相懿), 조부의 휘는 능형(能炯), 부친 휘는 재문(在文) 자는 덕필(德弼)이요, 어머니는 평강채씨(平康蔡氏)니 종묵(宗黙)의 따님이니 번암(樊巖) 제공(濟恭)의 후손이다.
서기 1901년 경술(庚戌)에 하임(河臨)말 본택(本宅)에서 출생하다. 공이 나면서 기특히 생겼고 크면서 학문(學文)에 열심히 하며 조상을 섬기는 도리와 부모를 봉양하는 바를 분명히 하여 죽을 때까지 게을리 않았다. 날마다 글 하는 친구 봉은(鳳隱) 하상팔(河相八), 서강(西岡) 권영성(權寧成), 반주(半洲) 유현우(柳賢佑), 은초(隱樵) 임병휘(林秉暉), 소와(小窩) 안국용(安國鎔), 봉성(鳳城) 금기동(琴基東) 제현(諸賢)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시(詩)를 지으며 임천(林泉)에서 즐거이 세월을 보내더니 한때의 병환으로 1987년 병인(丙寅) 6월 14일에 별세하니 향년(享年)이 77세라.
배위(配位)는 안동김씨(安東金氏) 방한(邦漢)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1909년 기유(己酉)에 나시고 임술년(壬戌年) 3월 25일에 별세하니 남편 묘소 곁에 안장하다. 4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에 제희(濟羲)요, 다음에 준섭(濬燮)·제창(濟昌)·제학(濟學)이고 딸은 안동(安東) 권오건(權五鍵), 흥해(興海) 배석희(裵錫熙), 안동(安東) 김도현(金道顯)에 출가했고 제희(濟羲) 아들은 병동(並東)·영동(永東)·원동(元東)이요, 딸은 안동(安東) 권기탁(權奇卓), 능성(綾城) 구운기(具雲起), 밀양(密陽) 박혁수(朴赫洙), 용궁(龍宮) 전상홍(全尙鴻)에 출가했고 준섭(濬燮)의 아들은 명동(明東)·우동(佑東)·형동(亨東)이요, 딸은 안동(安東) 권일섭(權日燮)에 출가했으며 제창(濟昌)의 아들에 동직(東直)·동한(東漢)·동준(東俊)이요, 딸은 안동(安東) 권영철(權寧哲)에 출가했으며 제학(濟學)의 아들에 동수(東洙)다. 나머지는 다 수록하지 못한다.
명왈(銘曰) 학가산(鶴駕山) 남쪽 초전(草田) 언덕에 석 자 높이 묘소는 공의 유택(幽宅)이라. 산수(山水)가 맑고 자손 이어지니 오랫동안 향화(香火)를 이으리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