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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3세손 묵우헌공 이찬]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月城李公墓碣銘(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5. 17:46

□용재공(慵齋公) 3세손 묵우헌공(黙愚軒公) 이찬(李燦)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月城李公墓碣銘 幷序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鐵城(철성) 李承奎(이승규) 찬(撰)

 

郡治西啼鳳山負良之原故同中樞慶州李公幽竁也來孫在文在周責顯刻之文於承奎曰吾祖自戊甲史禍後畏約隱淪而沒世後承遵以成憲甚至生卒事行茫無據依只有譜牒若干註而己願乞一言以賁墓隧竊念杏亭故事義有所不敢辭者遂按譜而叙之公諱燦宇陽遠號黙愚軒始林之李大顯東方中世大司憲諱繩直南下家安東再傳而諱宗準文校理直節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無子以弟訓導諱公準子德淵嗣之參奉生諱胤恭參奉卽公皇考公生而杜門晦跡篤學修行克紹先徽壽除同樞其志若其跡偉非人人所企及戊午之禍不徒爲當時慘酷而至使後嗣幾百年掩翳不章嗚呼噫嘻配貞夫人慶州金氏同穴而祔生二男貴實通政起實僉樞通政男曰瑞嘉善王+享僉樞男自明通政自原自吉嘉善男立通政銘曰
无悔无憫禍之徵也克修克紹德之恒也載撰載銘信之徵也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철성(鐵城) 이승규(李承奎) 찬(撰)

 

안동군 서쪽에 제봉산(啼鳳山)이 있으니 간좌(艮坐)의 언덕에 묘소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공(李公)의 유택이라. 후손 재문(在文)·재주(在周) 두 사람이 비문(碑文)을 나 승규(承奎)에 부탁해 가로대 우리 조상이 무오사화(戊午史禍, 연산4 1498년)를 당한 뒤로 세상이 두려워 산림에 숨어 살다가 돌아가신 후로 자손들이 그 유적(遺迹)을 캐고자 하나 심지어 생졸(生卒)과 사행(事行)이 분명치 않아 상고할 길이 없고 보쳡(譜牒)에 약간 기록만 있으니 원컨대 한말[一言]을 빌러 묘소에 빛이 나게 한다고 하니 행정(杏亭) 옛일을 생각해서라도 같이 사양할 수 없어 보첩(譜牒)에 의거하여 펴노니 공의 휘는 찬(燦)이요, 자는 양원(陽遠)이고 호는 묵우헌(黙愚軒)이니 시림(始林, 경주)의 이씨(李氏)가 동방(東方)에서 크게 드러났으니 중간대에 대사헌(大司憲) 휘 승직(繩直)이 남쪽으로 내려와 안동(安東)에 터를 잡았고 두 대를 내려와서 휘 종준(宗準) 문과교리(文科校理)로 곧은 절개를 지켜 무오화(戊午禍)를 입었으니 세상이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른다. 아들이 없어 동생 훈도공(訓導公) 휘 공준(公準)의 아들 덕연(德淵)을 양자(養子)하니 참봉(參奉)을 지냈고 휘 윤공(胤恭)을 낳으니 참봉(參奉)인데 이분이 곧 공의 조부라.
공이 나면서부터 세상에 나서지 않고 학문을 독실(篤實)히 하고 행실을 닦아 선대의 유적(遺迹)을 능히 계승했고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을 받았다. 그 뜻이 청고(淸高)하고 그 행적(行蹟)이 위대하여 당시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었다. 무오사화(戊午史禍)가 당시에 참혹했을 뿐 아니라 뒤에 자손들까지 몇백 년 동안 묻혀서 빛을 못 봤으니 슬픈 일이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니 공의 묘에 합폄(合窆)이고 두 아들을 두었으니 귀실(貴實) 통정(通政)이고 기실(起實)은 첨추(僉樞)다. 통정(通政) 아들은 서(瑞)니 가선(嘉善)이고 순(王+享)이다. 첨추(僉樞)의 아들은 자명(自明)이니 통정(通政)이며 자원(自原)·자길(自吉)이고 가선(嘉善) 아들은 립(立)이 통정(通政)이다.

 

명왈(銘曰)
세상이 몰라주되 후회하고 민망히 여기지 않으니 사화(史禍)를 겪은 탓이요, 선대의 업을 능히 닦고 이으니 덕(德)이 있음이라. 글을 지어 비(碑)에 새기니 남이 믿을 것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