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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9세손 만재공 이복화] 司僕寺正月城李公墓碣銘(사복시정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5. 17:07

□용재공(慵齋公) 9세손 만재공(晩齋公) 이복화(李馥和)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①천사공(川沙公) 환(煥) → 4世孫 금역당공(琴易堂公) 복창(復昌) → 5世孫 ③예달(禮達) → 6世孫 ②은운공(隱雲公) 우식(雨植) → 7世孫 ①청담공(淸潭公) 만춘(萬春) → 8世孫 ②석형(碩馨) → 9世孫 만재공(晩齋公) 복화(馥和)

 

 

司僕寺正月城李公墓碣銘 幷序
(사복시정월성이공묘갈명 병서)
-傍后孫(방후손) 俊鎬(준호) 撰(찬)

 

維我族先祖 贈司僕寺正公衣屨之藏在榮州邑治之東未五里丹雲洞負亥之原尙欠銘典其後孫諸公惕焉合謨將伐石而表顯使其族人五鍵濟景甫袖其世傳遺事略抄謬屬於俊鎬曰今府君易簀己近二百餘年之久矣咳唾典型俱爲杞宋而家聲零贊所傳者只此而己雖欲請銘於秉筆大家狀本未備尤所未安也第念攷據採輯未必誇張而詳其實者莫過於族中信筆也敢固以請願惠一言于墓道以爲徵信之資子而無諾吾祖事行終歸湮沒爲雲仍者之無窮恨也語未半而泫然涕淚俊鎬累辭非其人而事係族先誼不敢終辭謹按其遺事攷諸譜牒而叙之曰公諱馥和字蘊汝姓李貫慶州新羅佐命功臣諱謁平之後也麗季有諱之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是生諱揆官四宰諡貞烈是生諱元林判司僕寺事是生諱蔓實入我 朝吏曹判書是生諱繩直大司憲以淸白見重於 朝是生諱時敏進士號琴湖以淸望名於世是生諱宗準文校理 贈副提學以佔畢門徒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於公間九世高祖諱禮達曾祖諱雨植祖諱萬春僉樞考諱碩馨妣慶州金氏舜文女英廟甲辰七月初三日公生于丹雲里第幼有至性纔免抱凡所以安親體悅親心者多有凡兒所不及人皆稱嘆及長儀貌淸粹氣量宏深驕矜不形於色奢華不近於身親賢如不及惠人如不足務大體而不拘少節亦不肯與世俯仰一區泉石樂我境界隱居行義一生用工無非垂裕後昆恢張門戶之計則是所謂隱德制行之大要也嗚呼當時行略世遠難詳而亦不可臆揣然公旣不求於世無功名事業之可顯者而文獻蕩佚嬍行實跡無得以攷徵殊爲可恨然根固之葉茂遠之流長積善之餘慶是固同然之理也今公之後姓蕃衍頗有未艾之狀有積必發之理推此可以相仰者也以正廟庚子正月十八日卒享年五十七配慶州崔氏成梁女生二男長光朝 贈左承旨次光德朝男周璧 贈參判周政周衎出女適黃中喆金命錫禹時龜劉聖運金時鍊權相夏德男周漢璧男相麟壽嘉善餘不盡錄係之以銘曰
人道本惟孝興友公是之懋繩先裕後蘊而不顯惟德之媺銘不敢夸恐傷厥志

 


●사복시정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司僕寺正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방후손(傍后孫) 준호(俊鎬) 찬(撰)

 

나의 족선조(族先祖) 증직(贈職) 사복시정공(司僕寺正公)의 묘소가 영주군(榮州郡) 동쪽 5리가 덜 되는 단운동(丹雲洞) 해향(亥向)을 등진 언덕 위에 있다. 아직까지 비(碑)와 명(銘)이 없더니 그 후손 여럿이 죄송히 여겨 장차 돌을 깎아 세우기로 의론을 모아 그 족인(族人) 오건(五鍵)·제건(濟景) 군이 그 세전유사(世傳遺事)를 간직하고 준호(俊鎬)에게 부탁해 가로대 이제 부근이 별세한 지가 2백 년이 가까움에 음성과 모형이 함께 아득해지고 가운이 쇠퇴하여 전하는 것이라곤 이것뿐이니 비록 문헌(文獻) 병필대가(秉筆大家)에 글을 청한다고 하더라도 글을 지을 자료가 없으니 더욱 미안한 일이라.
생각건대, 없는 일을 과장할 필요는 없고 모여진 자료에 의거해서 그 실지나 자세히 쓸 뿐은 족친(族親)을 믿는 거로 왔으니 한 말씀 묘문(墓文)을 지어 후일 증신(證信)의 자료나 되게 해달라면서 간곡히 청해 가로되 만일 이를 거절하면 조상의 일은 영영 적막 속에 빠지리니 자손된 자의 무궁한 한(恨)이 된다면서 말을 마치고 눈물까지 짓거늘 준호(俊鎬)가 자격이 없다고 몇 번이나 사양해 보았으나 사정이 또한 족(族) 선조(先祖)가 되는 분임으로 끝끝내 사양치 못하고 그 유사(遺事)와 보첩(譜牒)에 의거해서 써 가로대 공의 휘는 복화(馥和) 자는 온녀(蘊汝) 성은 경주이씨(慶州李氏)니 신라(新羅)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인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고려말에 휘 지수(之秀)는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이요, 이분이 휘 규(揆)를 생하니 벼슬은 사재(四宰)요,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며 이분이 휘 원림(元林)을 생하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요, 이분이 휘 만실(蔓實)을 생하니 아조(我朝, 조선朝鮮)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이분이 또 휘 승직(繩直)을 생하니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청백(淸白)으로 조정에 중용되었고 이분이 휘 시민(時敏)을 생하니 호는 금호(琴湖)고 벼슬은 진사(進士)인데 청백(淸白)으로 당시 명망이 높았다. 이분이 휘 종준(宗準)을 낳으니 문과교리(文科校理)로 부제학(副提學)을 받았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입으니 이분이 용재선생(慵齋先生)이다. 공에게는 9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예달(禮達)이요, 증조의 휘는 우식(雨植)이며 조의 휘는 만춘(萬春)이고 벼슬은 첨추(僉樞)이며 부친의 휘는 석형(碩馨)이며 모친은 경주김씨(慶州金氏) 순문(舜文)의 따님이다.
영묘(英廟) 갑진년(甲辰年, 1724년) 7월 3일에 공이 단운(丹雲) 본택(本宅)에서 났다. 어릴 때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더니 크면서 어버이 몸을 편하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함이 뭇 아이들이 따르지 못함이 있으니 사람마다 칭송했고 장성해서는 용모가 청수(淸粹)하고 국량(局量)이 넓고 깊이 교만한 빛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은 몸에 가까이하지 않으며 어진 사람을 친하대 따라 미치지 못하는 것같이 하고 남에게 은혜를 베풀되 부족한 것같이 하고 큰일에 힘쓰되 적은 일에는 구애되지 않고 세상으로 더불어 행동을 한가지 하기를 즐거워 아니하고 한 구역을 맡아서 즐기며 숨어서 의리를 행하니 평생에 공부가 뒷자손 잘되게 하고 문호(門戶)를 여는 데 있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덕을 숨기고 행동에 힘을 쓴 요결이다.
슬프다, 당시 행적(行蹟)이 대가 멀어서 자세히 알 수 없고 또 억측할 수도 없으나 공이 세상에 구하지 않고 따라서 공명사업(功名事業)에 드러남도 없는데 문자(文字)마저 없으니 아름다운 행적(行蹟)을 상고할 곳이 없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나 뿌리가 단단한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근원이 깊은 물은 흐름이 길다하니 적선(積善)한 집에 경사가 남는다는 것과 동일한 이치라, 이제 공의 후손이 번창하여 발전할 형상이 많으니 쌓음이 있으면 발복(發福)하는 이치를 이로 미루어 가히 알지라.
정묘(正廟) 경자년(庚子年, 1780년) 1월 18일에 졸하니 향년(享年)이 57이라. 배(配)는 경주최씨(慶州崔氏) 성량(成梁)의 따님이다. 2남을 생하니 장자(長子)에 광조(光朝)니 증좌승지(贈左承旨)요, 차에 광덕(光德)이며 광조(光朝)의 아들에 주벽(周璧)이니 증참판(贈參判)이요, 주정(周政)·주간(周衎, 출계出系)이고 딸은 권중철(黃中喆)·김명석(金命錫)·우시구(禹時龜)·유성운(劉聖運)·김시연(金時鍊)·권상하(權相夏)에 출가했고 광덕(光德)의 아들에 주한(周漢)이고 주벽(周璧)의 아들에 상인(相麟)이니 수직가선(壽職嘉善)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 못 하고 이어 새겨 가로대
사람의 도리는 효도(孝道)와 우애(友愛)인데 공이 이에 노력했고 선조를 본받고 자손에 두터이 하며 속에 쌓아놓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덕의 아름다움이라 새김에 과장하지 않는 것은 그 뜻을 상할까 함이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