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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3세손 묵우헌공 이찬] 黙愚軒亭記(묵우헌정기)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5. 17:37

□용재공(慵齋公) 3세손 묵우헌공(黙愚軒公) 이찬(李燦)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③묵우헌공(黙愚軒公) 찬(燦)

 

 

黙愚軒亭記(묵우헌정기)
-豐山(풍산) 柳賢佑(유현우)

 

安東府治之西十里許有啼鳳山峰巒秀麗林壑幽邃允爲堪輿家之所指點山之腹負艮之原有墓而穹然者卽故同知中樞府事慶州李公衣舄之藏也山之下齋墻之内有亭而翼然者亦公像墓之所而扁之以公之自號曰黙愚軒也噫公即慵齋先生之曾也礪銀之脈大竹之叢鮮有凡塊而細蔟則其天姿之美才德之優何以想仰於今日而且又問詩禮乃公之箕裘也維孝維忠乃公之茶飯也篤於爲學乃公之常調也敏於修己乃公之庸行也以若負抱苟志於立揚則入館閣坐廟堂非幸也宜也而家有禍炎䑒厂+火未冷則公遂無意於世矣晦跡山樊杜門孫居所與接者乃林禽而野獸也當不黙而自然矣所與交考皆樵翁而牧叟也當不愚而自愚矣含黙而度日守愚而經歲不問世間唇舌之如何智略之如何而送盡餘景於虛牝寂寞之濱之公之當日自署顧不在斯歟若夫晚年緋玉之榮斯乃有霣自天者也豈公求而得之者哉嗚呼國朝戊甲之禍何其酷也宵奸亂舞善類虀粉則以公曾考之高風直節不能脫此增弋者勢也而覆巢之下其色慘惔室使後嗣翳而不章者幾百年矣寧不爲志士之腕腕而奮淚者耶迺者公之嗣姓諸彦深懼夫先徽之漸邈而羮墻之無所合謀鳩材就墓下齋幕之隙地而亭焉亭凡三楹中爲凉堂來爲煖室秩秩爾井井爾成之且有年矣日其後孫在旭崙鎬在郁等索記於余辭而不擭則乃作而復之曰慈孫之用心於爲先固應如是然又進於此而有一說焉夫天下之理喋喋者易流於躁妄察察者易歸於苛覈皆非君子之所取也願諸彦登亭而顧名下亭而思義黙重而以養其德性愚直而以閑其邪心無負先世隱遯之遺志則斯亭之作豈止於登臨玩賞之資而己哉或書此以歸之

 


●묵우헌정기(黙愚軒亭記) 역문(譯文)
-풍산(豐山) 유현우(柳賢佑) 기(記)

 

안동부(安東府) 서쪽 십리허(十里許)에 제봉산(啼鳳山)이 있으니 봉우리가 수려(秀麗)하고 구렁이 고요하니 진실로 산을 보는 자의 점치는 바가 될만하다. 산허리 간좌(艮坐) 언덕에 높다란 묘소(墓所)가 곧 옛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경주(慶州) 이공(李公)의 유택(幽宅)이라 산 아래 재궁(齋宮) 곁에 우뚝한 정자(亭子)가 있으니 또한 공을 사모하여 지은바 정자 이름을 공의 호를 따서 묵우헌정(黙愚軒亭)이라 한다. 묵우헌공(黙愚軒公, 이찬李燦)은 용재선생(慵齋先生, 이종준李宗準)의 증손이라 은광(銀鑛)의 맥과 큰 대(大竹)의 떨기는 흙덩이가 될 수 없나니 이제 작은 대(小竹)는 그 하늘이 준 아름다운 자질과 제덕(才德)의 훌륭함을 오늘날에도 가히 우러러 생각할 수 있고 또 시례(詩禮)를 말할진대 공의 집 대대로 내려오는 사업이요, 효(孝)와 충(忠)은 공의 집에 보통 일이고 학문을 독실히 하는 것은 공의 항상 하는 일이며 몸을 닦는데 민첩함을 공의 보통 행함이라.
이 같은 포부를 가지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데 뜻을 두었던들 대신 반열에 섞여 묘당(廟堂)에 앉았을 것이 요행히 아니라 당연한 일일 터이나 집이 화를 겪은 후 불꽃이 꺼지지 아니했으니 공이 세상에 뜻이 없음이라. 산중에 자취를 갈무리고 문을 닫고 외로이 사니 상종하는 것은 숲속의 새와 짐승뿐이니 묵묵지 아니하려 해도 자연 묵묵해지고 더불어 사귀는 자는 초동목수뿐이니 어리석지 않으려 해도 자연히 어리석어질지니 묵묵히 날을 보내고 어리석게 해를 보내면서 세상에 어떻게 떠들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묻지 않고 남은 세월을 적막한 속에서 보내나니 공이 당시 스스로 묵우헌(黙愚軒)이라고 호를 한 것이 여기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만년에 오품(五品)의 영화는 당연히 온 일이요. 어찌 공이 구하였으리오.
슬프다. 무오(戊午)의 화(禍)는 어찌 그리 혹독하였는고. 간신배가 농권(弄權)하여 현신(賢臣)들이 전멸되었으니 공의 증대부(曾大父, 용재慵齋)의 고풍직절(高風直節)로 소인들의 그물에 벗어나지 못한 것도 사실이라. 쓰러진 집 아래 그 광경이 참담하여 뒤 자손들이 가리어져서 빛을 못 본 지 몇백 년이 되었으니 어찌 지사들의 슬퍼할 바 아니랴. 이에 공의 후손들이 공의 아름다운 행적이 점점 없어질까 두려워해서 문중이 합의하고 재목을 모아서 공의 묘소 아래편 재궁 옆에 정자를 세우니 세 칸이라 가운데가 마루고 양쪽 옆이 온실이라.
지은 지 몇 해 만에 그 후손 재욱(在旭)·윤호(崙鎬)·재욱(在郁) 등이 나에게 기(記)를 청하거늘 사양하다 못하여 이 글을 쓰노니 후손이 조상을 위하여 마음 씀씀이 이와 같으나 그러나 또 한가지 할 말이 있으니 천하에 이치가 첩첩이구(喋喋利口)로 말 잘하는 자는 경망한데 흐르기 쉽고 찰찰(察察)이 잘 살피는 자는 까다로워서 남의 비행 살피기를 좋아하나니 다 군자가 취할 바 아니니 바라건대 제군은 이 장자에 올라서는 이름을 돌아보고 정자를 내려서서는 의리를 생각해서 묵중(默重)하게 그 덕을 기리고 우직(愚直)하게 그 간사한 마음을 막아서 선대의 숨어 살던 뜻을 저버림이 없으면 이 정자의 지은 것이 어찌 정자에 올라서 놀면서 구경이나 하고 마는 장소에 끝이랴. 참고가 될까 하여 이 글을 써서 주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