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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6세손 은운공 이우식] 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月城李公墓碣銘(증통훈대부통례원좌통례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5. 15:24

□용재공(慵齋公) 6세손 은운공(隱雲公) 이우식(李雨植)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①천사공(川沙公) 환(煥) → 4世孫 금역당공(琴易堂公) 복창(復昌) → 5世孫 ③예달(禮達) → 6世孫 ②은운공(隱雲公) 우식(雨植)

 

 

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月城李公墓碣銘 幷序
(증통훈대부통례원좌통례월성이공묘갈명 병서)
-延安(연안) 金晉秀(김진수) 撰(찬)

 

公諱雨植李氏貫慶州自新羅佐命功臣諱謁平爲始祖簪組文學代不之絶有若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諱之秀官贊成諡貞烈諱揆司僕寺事諱元林著于麗季入我 祖諱蔓實吏曹判書生諱繩直官慶尙道觀察使至大司憲生諱時敏成均進士號琴湖世以淸白望名於世生諱宗準文校理 贈弘文館副提學以畢門高弟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生諱德淵參奉於公爲五代祖高祖諱胤恭參奉曾祖諱煥祖諱復昌考諱禮達公生于榮川里第墓榮川北面花亂山壬坐原公之生卒年月及配位不載譜牒槩認自先世史禍之故然意者當時雲仍分散棲屑懲於吹薤而或不爲詳記耶且墓前短碣年久剝落字沒難解只有左通禮三字此必追想以禍家復裔若非實媺行惡能署此徵也然則本職牒亡書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明矣有何置疑哉有二子萬春萬英萬春男碩弼碩馨碩楷碩弼男振和禹和女金海金洛鍾平山申萬慶碩馨男馥和碩楷男輔和玉和女密陽朴性命餘不錄於乎士之抱具藏器未克需世施化時不藏耶 黨禍餘○常未全釋歟是所以爲公歎惜也公之後孫諸老少咸患公墓久闕表顯將擬改碣計遺其族人五鍵明鎬元根請碣銘甚勤辭不獲遂按狀而叙次如右系以銘銘曰
於惟李公慵老賢裔國朝中葉想公時代世代寢遠文獻幾創後雲之愴候誰有慿通禮一衘十分之徵積蔭冥冥餘慶必昌箢彼花亂寔公之藏重修封塋一壑輝煌載竪貞珉羨域增光我銘其蹟千秋揭彰

 


●증통훈대부통례원좌통례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연안(延安) 김진수(金晉秀) 찬(撰)

 

공의 휘는 우식(雨植)이요, 경주이씨(慶州李氏)니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그 뒤로 불어 벼슬과 문장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아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월성군(月城君)을 봉한 휘 지수(之秀) 같은 분과 벼슬이 찬성(贊成)에 시호(諡號)를 정렬(貞烈)이라고 한 휘 규(揆)와 사복시사(司僕寺事)를 지낸 휘 원림(元林)이 고려 때 드러났고 아조(我祖, 조선朝鮮)에서 휘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을 생하니 벼슬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휘 시민(時敏)을 생하니 성균진사(成均進士)에 호는 금호(琴湖)니 세상에 청백(淸白)으로 명망(名望)이 높았고 휘 종준(宗準)을 생하니 문과교리(文科校理)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받은 바 있는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무오화(戊午禍, 1498)를 입으니 세상이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른다. 휘 덕연(德淵)을 생(生, 사자嗣子임, 생부는 휘 공준公準) 하니 참봉(參奉)이고 공의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윤공(胤恭)이니 참봉(參奉)이요, 증조의 휘는 환(煥)이요, 조의 휘는 복창(復昌)이고 부친의 휘는 예달(禮達)이다. 공이 연천(榮川) 자택에서 낳고 묘소는 영천(榮川) 북면(北面) 화란산(花亂山) 언덕 임좌(壬坐)에 있다. 공을 낳고 죽은 연도와 배위(配位)가 보첩(譜牒)에 기록돼있지 않다. 짐작건대 선대로부터 사화(史禍)를 당한 탓이리라 생각되나 당시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살면서 죽는데 겁이 나서 상세히 기록하지 않은 것 같다. 또 묘 앞에 짤막한 비(碑)가 있는데 해가 오래됨에 따라 글자가 헤어져서 알아볼 수 없고 다만 좌통례(左通禮)란 석 자만 알아볼 수 있으니 이는 반드시 화를 당한 집 후예(後裔)로서 실지 덕행과 아름다운 행실이 없었던들 어찌 능히 이렇게 씻으리오. 그런즉 본 직첩(職牒)은 망실(亡失)하고 없으나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가 분명하니 어찌 의심을 두리오.
두 아들을 두니 만춘(萬春)·만영(萬英)이고 만춘(萬春) 아들에 석필(碩弼)·석형(碩馨)·석해(碩楷)며 석필(碩弼) 아들에 진화(振和)·우화(禹和)고 딸은 김해(金海) 김락종(金洛鍾), 평산(平山) 신만경(申萬慶)에게 출가했고 석형(碩馨) 아들에 복화(馥和)요, 석해(碩楷)에 보화(輔和)·옥화(玉和), 딸은 밀양(密陽) 박성명(朴性命)에게 출가했고 나머지 자손은 다 수록 못 한다.
슬프다, 선비가 쓸만한 그릇을 갖추어 놓고 능히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은, 때를 만나지 못함인가 아니면은 당화(黨禍)의 액운(厄運)이 완전히 풀리지 못함인가, 이것이 공을 위해 애석한 바이다. 공의 후손 노소(老少)들이 다 공의 묘소에 비명(碑銘)이 오랫동안 없음을 근심하여 장차 비(碑)를 다시 세우기로 계획하고 그 일가 사람 오건(五鍵)·명호(明鎬)·원근(元根)을 보내서 묘갈명(墓碣銘)을 청함이 심히 정성스럽게 사양하지 못해 위와 같이 쓰고 이어서 명(銘)을 쓰니 명(銘)에 가로되
슬프다, 공은 용재선생(慵齋先生)의 어진 자손이다. 공의 시대를 생각건대 국조(國朝, 조선朝鮮)의 중간이다. 세대(世代)가 멀어지니 문헌(文獻)이 없어졌다. 뒷자손이 슬픔이여, 어느 곳에 상고할꼬 통례(通禮)란 한 직함(職銜)이 십분(十分)의 증거로다. 어두운 속에서 덕(德)을 쌓으니 남은 경사가 반드시 창성(昌盛)하리라. 울창한 더 화란산(花亂山)이여 공이 잠든 곳이라 분묘(墳墓)를 중수(重修)하니 한 구령이 빛이 난다. 이 비석을 세우니 지역이 더욱 광채나네. 내가 그 유적(遺蹟)을 새기니 천추(千秋)에 전하리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