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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7세손 청담공 이만춘] 僉知中樞府事月城李公墓碣銘(첨지중추부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5. 15:36

□용재공(慵齋公) 7세손 청담공(淸潭公) 이만춘(李萬春)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①천사공(川沙公) 환(煥) → 4世孫 금역당공(琴易堂公) 복창(復昌) → 5世孫 ③예달(禮達) → 6世孫 ②은운공(隱雲公) 우식(雨植) → 7世孫 ①청담공(淸潭公) 만춘(萬春)

 

 

僉知中樞府事月城李公墓碣銘 幷序
(첨지중추부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興海(흥해) 裵東煥(배동환) 撰(찬)

 

李君五鍵元根宇燮訪余南城寓舍請其先僉樞公墓曰吾祖衣履之藏在榮川北花亂山負壬原舊有短碣前面只書僉樞月城李公之墓歲久剝落方圖改竪擬略述隂記而世代寢遠文獻無徵平日行嬍無得以 詳焉以傳聞於先父老者則有之者先祖戊午禍變之後若爾殘裔流離竄伏苟全性命不求人知而至僉樞公世居剛州以耕讀爲業謹守家法得享遐壽蒙優老典訓子孫以孝友勤儉爲要符後嗣稍衍僅能維持家戶者寔公餘蔭之攸暨也今不敢揣摩社撰爲誣先之歸只託世系生卒及配位墓所垂示來後庶不違於自來儉約家䂓矣惟執事念先契之重惠一言也顧不侫非其人而第觀慈孫之意不在於闡揚先懿只爲表阡以備後患則不必以拙訥終辭按公諱萬春字子華實慶州新羅佐命功臣諱謁平爲上祖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月城君諱之秀爲分派祖官四宰諡貞烈諱揆判司僕寺事諱元林著于麗季入鮮朝諱蔓實吏曹判書諱繩直大司憲生諱時敏號琴湖進士端宗癸酉禍坐禁錮生諱宗準文校理 贈副提學以畢門高弟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公七世以上也高祖曰煥曾祖曰復昌祖曰禮達考曰雨植丁未公生于榮川世第壬午某月日卒配仁同張氏舜教女生三男碩弼碩馨碩楷弼男振和禹和女金洛鍾申萬慶馨男馥和楷男輔和玉和女朴性命曾以下蕃不錄銘曰
名祖令裔晠代隱倫守分耕讀樂我林樊有隕自天優老覃恩厚蔭攸暨來仍式蘩琢此玄石垂日+示千春

 


●첨지중추부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僉知中樞府事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흥해(興海) 배동환(裵東煥) 찬(撰)

 

이군(李君) 오건(五鍵)·원근(元根)·우섭(宇燮)이 나를 남성(南城) 집으로 찾아와서 그 선조 첨추공(僉樞公) 묘갈명(墓碣銘)을 청해 가로되 내 선조의 묘소가 영천(榮川) 북쪽 화란산(花亂山) 임좌(壬坐) 언덕에 있으니 옛날에 짤막한 비석이 있었는데 전면에 다만 첨추(僉樞) 월성이공(月城李公)의 묘라고만 쓰여 있으니 세월이 오래됨에 헤어져서 다시 고쳐세우기로 계획하고 대략 음기(陰記)를 짓고자 하나 대수(代數)가 오래되어 문헌(文獻)을 고증할 길이 없어 평일 행적(行蹟)을 자세히 알 수 없고 선부(先父)에게서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 선조가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당한 뒤로 쇠잔한 자손들이 떠돌며 숨어 살아 목숨만 보전하고 남이 아는 것을 피했고 첨추공(僉樞公) 대에 이르러 강주(剛州, 영주榮州)에 살면서 밭 갈고 글 읽는 것으로 업을 삼고 가법(家法)을 지켜서 높은 수(壽)를 얻은 후 수직(壽職)의 은전(恩典)을 받았고 자손을 가르치되 효우(孝友)와 근검(勤儉)을 좌우명(座右銘)으로 삼더니 후손이 번성하여 근근이 문호(門戶)를 유지하니 이것이 다 공의 음덕(蔭德)이 미친 바라.
이제 감히 억측으로 글을 지어 조상을 속이는 일은 부당하니 다만 대수와 삶과 죽음과 배위(配位)와 묘소나 밝혀 후손에게 보이는 것이 전해 내려온 검소한 집 규모에 어긋남이 없을 터이니 좌하(座下)는 선대의 세의를 생각하여 한 말을 달라하니 돌아보건대 내가 그 적임이 아니나 자손의 뜻이 선조를 표양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묘소에 표(表)를 해서 후환(後患)을 막자는데 있음을 보고 반드시 졸문(拙文)이라고만 사양할 수 없어 쓰노니 공의 휘는 만춘(萬春)이요, 자는 자화(子華)며 관향(貫鄕)은 경주(慶州)니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이 상조(上祖)가 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가 분파(分派) 조상이 되며 사재(四宰) 벼슬에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인 휘 규(揆)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낸 휘 원림(元林)이 고려 말에 드러났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은 대사헌(大司憲)이고 휘 시민(時敏)을 낳으니 호를 금호(琴湖)고 벼슬은 진사(進士)로 단종(端宗) 계유(癸酉) 화(禍)를 입어 금고형(禁錮刑)을 받았다.
이분이 휘 종준(宗準)을 낳으니 문과교리(文科校理)로 부제학(副提學)을 받았다. 점필재(佔畢齋)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를 입으니 세상에서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른다. 공에게는 7대 이상이 되고 고조의 휘는 환(煥)이요, 증조의 휘는 복창(復昌)이고 조부 휘는 예달(禮達)이며 부친의 휘는 우식(雨植)이니 정미(丁未)에 영천(榮川) 자택에서 낳고 임오(壬午)에 졸하다. 배(配)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순교(舜教)의 따님이다. 3남을 출생했다. 맏아들이 석필(碩弼)이고 다음이 석형(碩馨)·석해(碩楷)며 석필(碩弼)의 아들에 진화(振和)·우화(禹和)고 딸은 김락종(金洛鍾)·신만경(申萬慶)에 출가했고 석형(碩馨)의 아들에 복화(馥和)며 석해(碩楷)의 아들에 보화(輔和)·옥화(玉和)고 딸은 박성명(朴性命)에 출가했다. 증손 밑으로는 다 수록지 않는다. 명(銘)을 지으니 명(銘)에 왈
이름 있는 조상 어진 자손으로 여러 대를 숨어 살았도다. 밭 갈고 글 읽으며 산림(山林)에서 즐겼도다. 죽는 것이 천명(天命)이니 늙어서 은전(恩典)을 입었네. 두터운 음덕(蔭德)이 미쳐서 자손이 번성하다. 이 돌을 새겨서 천추(千秋)에 보이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