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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3세손 태악공 이규형] 泰岳處士月城李公墓碣銘(태악처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4. 11:28

□용재공(慵齋公) 13세손 태악공(泰岳公) 이규형(李奎炯)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①천사공(川沙公) 환(煥) → 4世孫 금역당공(琴易堂公) 복창(復昌) → 5世孫 ②통정공(通政公) 의달(義達) → 6世孫 ④춘식(春植) → 7世孫 系子 예석(禮錫) → 8世孫 삼우(三友) → 9世孫 ①효권(孝權) → 10世孫 ①광춘(光春) → 11世孫 주철(周哲) → 12世孫 ③심재공(心齋公) 동진(東鎭) → 13世孫 ②태악공(泰岳公) 규형(奎炯)

 

 

泰岳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태악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永嘉(영가) 權相圭(권상규) 撰(찬)

 

公姓李氏諱奎炯字致登泰岳其號也生 憲宗癸卯 高宗丙申歿小川紫芝坪甲坐原其墓也其孫俊鎬請余以顯銘於乎余誠頑人也於公之墓豈待請而後銘耶公儀貌端潔氣度剛介怠慢不說於身妄悖不出於口人非善不交物非義不敢利海慾浪無得以易其操是以雖早遊塲屋屢渡淸○而未曾一步向終南捷徑逮至甲午時局變而科法廢遂絶意榮途養拙林泉玩樂書史而敎子弟義方嘯詠湖居而約漁樵爲伴囂然而忘世乙未秋日冦內搶 坤宮遇害鄕人士擧義旋爲討復計而推吾先君子爲主盟明年丙申有 詔罷義旋先君子釋兵隱小川之菱湖距公之居僅數弓許與公晨夕從徃謹義理傾心肺許以歲寒之盟其年秋日虜肆虐欲害先君子而率兵入菱湖先君子賴公指揮避地于窮峽賊以公爲先子心交盛兵威詰問其隱處敺辱無不至公抗言終不屈竟以此沈綿而終世臨終戒諸子曰死生命也愼勿怨尤於人恬然而逝於乎爲知友死者古亦罕聞也眼見凶鋒刼砲死生立判而始終抗言以無所聞知者世有幾人乎若使公處干城之位而任存亡之責則忘身殉國之忠豈多讓於古之㤠士哉公早孤事伯兄如事親居母夫人憂哀毀幾滅性而尙能葬祭以禮友于弟極其湛翕晩始析戶戒子姪財無爾我盖其篤於倫行而推及於朋友也然而地褊世亂晦而不章孰知余言之非阿好也李氏貫月城以新羅佐命功臣謁平爲肇祖高麗月城君之秀爲受貫祖我鮮大司憲繩直諱時敏號琴湖諱宗準文科選湖堂號慵齋以佔畢金先生門弟被戊午禍 贈副提學享鏡光院栢麓社於公間十三世曾祖諱光春祖諱周哲考諱東鎭妣綾城具氏致黙女栢潭先生后配義城金氏秉烈女鶴峯先生后生四男在學在奭在壽在昌出在學三男豊鎬觀鎬碩鎬出一女適李裕泰在奭三男逵鎬晩鎬俊鎬在壽一男冕鎬在昌嗣男碩鎬後生一男曰成鎬銘曰
孝於親友於兄弟急亂於友抵死靡悔可驗其所養之大玆銘于碣以彰其晦

 


●태악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泰岳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 찬(撰)

 

공의 성의 이씨(李氏)요, 휘는 규형(奎炯)이고 자는 치등(致登)이며 호는 태악(泰岳)이다. 헌묘(憲廟) 계묘(癸卯, 1843)에 나서 고종(高宗) 병신(丙申, 1896)에 졸하니 소천자지평(小川紫芝坪) 갑좌(甲坐) 언덕이 그 묘소다. 그 손자 준호(俊鎬)가 나에게 공의 비명(碑銘)을 부탁하니 나는 참으로 완악한 사람이로다. 공의 묘비명(墓碑銘)의 청함을 받은 뒤에야 명(銘)을 지을쏜가.
공은 의모(儀貌)가 단결(端潔)하고 성품이 간직하여 몸가짐이 게으르지 않고 입으로는 망언(妄言)을 내지 않으며 착한 사람이 아니면 사귀지 않고 불의의 물건은 취하지 않으니 이해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도 그 지조는 바꾸지 못한다. 이러므로 비록 일찍이 과장(科場)에 놀아 낙방도 하였건만 한 번도 부정한 길을 걷지 않더니 갑오년(甲午年) 시국이 변천함에 이르러 과거법(科擧法)이 폐지되니 다시 영화의 길에는 마음을 끊고 임천(林川, 산간 두메 마을을 말함)에서 수향하며 시서에 락을 부쳐 자제들에게는 옳은 일을 가르치고 산과 물에 소창하여 나무하고 고기 잡은 것으로 짝을 하여 세상일을 잊었더니 을미년(乙未年, 1895) 중전이 일인데 시해당하니 향중(鄕中) 인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복수를 계획하고 나의 선친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더니 명년(明年) 병신(丙申, 1897)에 의병을 파하라는 조서가 있어 군사를 해산하고 소천(小川) 땅 능호(菱湖)에 숨으니 공의 사는 곳과는 치적의 사이라.
공과 조석으로 왕래하며 의리를 강론하고 심폐(心肺)를 기울여 사생의 사귐을 맺었으니 그해 가을에 일본이 혹독한 정치를 펴서 나의 선친을 행하고자 군졸을 이끌고 능호(菱湖)에 들어오니 선친께서 공의 지휘에 따라 궁벽(窮僻)한 곳에 피하였더니 왜적들이 공이 나의 선친과 교분이 좋다 해서 공에게 병기로 위협하고 나의 선친 숨은 곳을 물으며 가진 곤욕을 다 보이나 공이 종시 굴하지 아니하였으나 마침내는 이로 인하여 세상을 마칠세 임종(臨終)에 제자에게 경계해 가로대 죽고 삶이 천명이니 남에게 원망을 말라 하고 세상을 뜨니 슬프다.
저기의 벗을 위하여 죽음은 옛날에도 듣기 드문 일이라 눈앞에 흉악한 살인 무기를 봄에 죽고 사는 것이 그 자리에서 판단하겠거늘 시종 불굴하고 항변했으니 이런 분이 세상에 몇 사람이나 있을까. 만일 공에게 나라를 지키는 직위에 처해서 존망의 책임을 맺었으면 내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을 충성심이 어찌 옛날 충신에 양보하랴. 공이 일찍 부친을 여의고 백형(伯兄) 섬기기를 부친 섬기듯 했고 모부인(母夫人) 상중(喪中)에는 너무 애통하여 사경까지 이르렀으나 오히려 장례와 제사를 예(禮)로 했고 동생과 우애가 지극해서 만년에 집은 나누었으나 재산은 네것 내것이 없으며 그 인륜에 돈독히 하여 붕우(朋友)까지 믿음이라. 그러나 사는 지방은 너무 춥고 세상은 어지러워 숨은 덕이 빛이 나지 못했으니 내 말이 아첨함이 아닌 것을 뉘 알리요.
이씨(李氏)의 관향(貫鄕)은 경주(慶州)로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고려(高麗) 월성군(月城君) 지수(之秀)가 관향(貫鄕)을 받은 조상이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과 휘 시민(時敏) 호 금호(琴湖)와 휘 종준(宗準) 호를 용재(慵齋)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혔다고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년(戊午年, 1498년) 화(禍)를 입은 후 부제학(副提學)을 증직(贈職) 받고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백록리사(栢麓里社)에 입향(入享) 하니 공에게는 13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광춘(光春)이요, 조의 휘는 주철(周哲)이요, 고의 휘는 동진(東鎭)이고 비위(妣位)는 능성구씨(綾城具氏) 치묵(致黙)의 따님이니 백담선생(栢潭先生, 구봉령具鳳齡) 후예(後裔)다. 배(配)는 의성김씨(義城金氏) 병렬(秉烈)의 따님이니 학봉선생(鶴峯先生, 김성일金誠一) 후손(後孫)이며 4남을 출생하니 재학(在學)·재석(在奭)·재수(在壽)·재창(在昌)은 출계(出系)하고 재학(在學) 3남에 풍호(豊鎬)·관호(觀鎬)·석호(碩鎬)니 출계(出系)이고 1녀는 이유태(李裕泰)에 출가했고 재석(在奭) 3남은 규호(逵鎬)·만호(晩鎬)·준호(俊鎬)고 재수(在壽) 1남에 면호(冕鎬)며 재창(在昌) 양자(養子)에 석호(碩鎬)인데 뒤에 1남을 생하니 성호(成鎬)라. 명왈(銘曰)
어버이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붕우(朋友)의 곤란을 구원하기에 급급하니 밝게 죽어 후회함이 없으니 그 기른 바가 큼을 증험(證驗)하도다. 돌에 새겨 그 숨은 빛을 찬란케 하리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