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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5세손 영초공 이준호] 嶺樵處士月城李公墓碣銘(영초처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4. 13:55

□용재공(慵齋公) 15세손 영초공(嶺樵公) 이준호(李俊鎬)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①천사공(川沙公) 환(煥) → 4世孫 금역당공(琴易堂公) 복창(復昌) → 5世孫 ②통정공(通政公) 의달(義達) → 6世孫 ④춘식(春植) → 7世孫 系子 예석(禮錫) → 8世孫 삼우(三友) → 9世孫 ①효권(孝權) → 10世孫 ①광춘(光春) → 11世孫 주철(周哲) → 12世孫 ③심재공(心齋公) 동진(東鎭) → 13世孫 ②태악공(泰岳公) 규형(奎炯) → 14世孫 ②재석(在奭) → 15世孫 ③영초공(嶺樵公) 준호(俊鎬)

 

 

嶺樵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영초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延安(연안) 金晋秀(김진수) 撰(찬)

 

乃城治南虎坪山獨瑟峰枕艮之原有四尺新封即近故嶺樵處士李公之藏也其胤濟敦甫䝴其家傳一通屬晋秀撰幽堂之銘余瞿然曰壯矣哉纔經樹襄居然營儀物耶感其誠孝乃按狀而叙之曰公諱俊鎬字英魯號嶺樵慶州人新羅佐命功臣諱謁平爲肇祖至麗季月城君諱之秀爲分派祖諱揆官四宰諡貞烈諱蔓實入我 朝吏曹判書諱繩直慶尙觀察大司憲以淸白見重於朝生諱時敏進士號琴湖以淸望名於世生諱宗準文校理 贈弘文館副提學以佔畢高弟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於公十五代祖累傳至高祖諱周哲曾祖諱東鎭號心齋祖諱奎炯號泰岳純剛至正爲世推重考諱在奭俱隱德不仕妣南陽洪氏忠貞公應后炳義女高宗壬寅二月三日生公于佳湖里第自幼姿性醇實才諝出倫稍長受業于伯父健畜齋公不煩提而文理自解常以遠大期之見時事日非晦跡林泉絶意外慕劬經問禮究尋爲己任事親極志軆之養處兄篤友愛之道世紛漸極己丑移卜於川城之虎坪即先世鄕也堂廡次團聚士友日益相從如權道煥金昌祺洪性源諸勝友每徵逐而討襟懷甞以先事極勞心力琴溪先所山板己至他人所有而俾致還退甲戌修大同譜於大田戊寅琴溪齋舍重建庚子修派譜壬寅印布慵齋先祖文集是皆公誠力所致也偶以無何之崇數年沉綿享年七十七而考終即戊午九月二十三日也配和順金氏鎭淸女生四男三女男濟敦入承繼父之宗濟說濟膺濟弼女豊山柳時哲延安金思善安東金忠顯敦男根厚根原根廈女義城金東文說男根秀弼男根益時哲男壯夏洪俊思善男宇基東奎忠顯男玖年餘不錄於乎余旣托契又孚志氣綢繆須仗不以凡常自擬歲寒之期忽分各天遽作幽明之恨今托名牲繫赤不爲私分攸幸耶因爲之銘銘曰
姿淳德厚志潔行媺時乎不齋抱具而晦七十年坎壇於山野之間慥慥劬工千百歲永秘於大谷之陽疇不爲恫縱不于躬餘慶必昌獨瑟峰崔有封增光爰樹貞珉羡域輝皝義銘其最昭示無疆

 


●영초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嶺樵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연안(延安) 김진수(金晋秀) 찬(撰)

 

내성(乃城) 남쪽 호평산(虎坪山) 독슬봉(獨瑟峰) 간좌(艮坐)의 언덕에 넉 자 높이 새로 모은 것이 옛 영초처사(嶺樵處士) 이공(李公)의 묘소다. 그 아들 제돈(濟敦)이 가장(家狀) 한 통을 써가지고 나에게 묘소에 세울 비명(碑銘)을 위촉하니 내 놀래 가로대 장하다, 겨우 3년을 지난 오늘 벌써 비석을 경영하는가. 그 효성에 감동하여 가장(家狀)에 의거 쓰노니 공의 휘는 준호(俊鎬)요, 자는 영로(英魯)며 호는 영초(嶺樵)니 경주인(慶州人)으로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고려말에 이르러서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가 분파(分派) 조상이 되며 휘 규(揆)는 벼슬이 사재(四宰)에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며 휘 만실(蔓實)은 아조(我祖, 조선朝鮮)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휘 승직(繩直)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니 청백(淸白)으로 조정에 중용되었고 휘 시민(時敏)을 낳으니 진사(進士)고 호는 금호(琴湖)니 또한 청백(淸白)으로 세상에 명망(名望)이 높았다. 휘 종준(宗準)을 낳으니 문과교리(文科校理)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증직(贈職)되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입으니 세상에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 부른다. 공에게는 15대조가 되고 여러 대를 지나 고조의 휘는 주철(周哲)이고 증조의 휘는 동진(東鎭)이며 호는 심재(心齋)고 고조의 휘는 규형(奎炯)이고 호는 태악(泰岳)이니 순강(純剛)과 지정(至正)으로 세상에서 추존(推尊)을 받았고 부친의 휘는 재석(在奭)이니 다 은덕(隱德)이 있으나 벼슬을 아니 했고 모친은 남양홍씨(南陽洪氏) 충정공(忠貞公) 응(應)의 후손인 병의(炳義)의 따님이다.
고종(高宗) 임인(壬寅, 1902) 2월 3일 가호리(佳湖里) 자택에서 출생하다. 어릴 때부터 성품(性稟)이 순실(醇實)하고 재주가 뛰어나더니 장성함에 백부(伯父) 건축재공(健畜齋公)에게 글을 배울 때 엄하게 아니 하여도 문리(文理)가 통하니 장차 원대한 기약을 했더니 세상일이 날로 글러짐을 보고 산림(山林)에 자취를 숨겨 외부 세상과는 생각을 끊고 경서(經書)를 연구하고 예(禮)를 물으며 어버이를 섬김에 뜻과 몸의 봉양을 극진히 하고 형 대접을 더욱 돈독 우애하더니 세상 어지러움이 극에 달함에 기축년(己丑年)에 천성(川城, 내성奈城)의 호평(虎坪)으로 옮기니 곧 선대의 고향이라. 사우(士友)들을 모아 날로 상종하여 권도환(權道煥)·김창기(金昌祺)·홍성원(洪性源) 제씨(諸氏)로 매양 왕래하며 회포를 열고 매양 조상 일로 심력을 다하여 금계(琴溪) 선조산판(先祖山坂)이 남의 소유가 된 것을 힘을 기울여 되돌려냈고 갑술(甲戌)에 대전(大田)에서 대동보(大同譜)를 닦았으며 무인년(戊寅年)에 파보(派譜)를 닦고 금계(琴溪) 재궁(齋宮)을 중건(重建)했고 경자년(庚子年)에 파보(派譜)를 다시 닦고 임인년(壬寅年)에 용재선생문집(慵齋先生文集) 출판 반포하였다. 공의 성력(誠力)으로 이룬 바라 우연히 와병(臥病)하여 수년을 침면(沉綿)하다. 77의 향년(享年)으로 별세하니 무오년(戊午年, 1978년) 9월 23일이라.
배(配)는 화순김씨(和順金氏) 진청(鎭淸)의 따님이니 4남 3녀를 두다. 아들은 제돈(濟敦)이니 출계하고 제설(濟說)·제응(濟膺)·제필(濟弼)이고 따님은 풍산(豊山) 류시철(柳時哲), 연안(延安) 김사선(金思善), 안동(安東) 김충현(金忠顯)에 출가했고 제돈(濟敦)의 아들에 근후(根厚)·근원(根原)·근하(根廈)고 딸은 의성(義城) 김동문(金東文)에 출가했으며 제설(濟說)의 아들에 근수(根秀)고 제응(濟膺)의 아들에 계자(季子) 근하(根廈, 생부는 제돈濟敦)이고 제필(濟弼)의 아들에 근익(根益)이며 류시철(柳時哲)의 아들에 상하(壯夏)·홍준(洪俊)이고 김사선(金思善)의 우기(宇基)·동규(東奎)며 김충현(金忠顯)의 아들에 구연(玖年)이고 나머지는 다 수록 못 한다.
슬프다, 내가 교분에 또 의기가 상합(相合) 함이 범상치 않아 백세(百歲)를 기약했더니 홀연히 하늘을 달리하고 유명(幽明)의 한(恨)을 지었도다. 이제 이름을 붙이노니 사사로운 인정으로 생각 않음이 다행할 진지 명(銘)을 쓰노니 명(銘)에 가로되
자질은 순수하고 덕(德)은 두터우며 뜻은 맑고 행실은 아름답다. 때를 만나지 못하여 경륜(經綸)을 않고 세상을 뜨니 70년 동안 산야(山野)에서 뜻을 얻지 못했도다. 독실(篤實)하게 공부하여 천만년을 기약했더니 대곡(大谷)의 양지쪽에 갈무리니 뉘 아니 슬퍼할까. 비록 몸은 갔으나 남은 경사는 장원하리라. 독슬봉(獨瑟峰)이 높으니 광채가 더했고 비석을 세우니 지경은 찬란하다. 그 으뜸을 새겨서 무궁하게 보이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