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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공 14세손 건축재공 이재학] 健畜齋處士月城李公墓碣銘(건축재처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4. 12:06

□용재공(慵齋公) 14세손 건축재공(健畜齋公) 이재학(李在學)

 

【계대(系代)】 ②용재공(慵齋公) 이종준(李宗準) → 1世孫 系子 천유당공(天有堂公) 덕연(德淵) → 2世孫 ①참봉공(參奉公) 윤공(胤恭) → 3世孫 ①천사공(川沙公) 환(煥) → 4世孫 금역당공(琴易堂公) 복창(復昌) → 5世孫 ②통정공(通政公) 의달(義達) → 6世孫 ④춘식(春植) → 7世孫 系子 예석(禮錫) → 8世孫 삼우(三友) → 9世孫 ①효권(孝權) → 10世孫 ①광춘(光春) → 11世孫 주철(周哲) → 12世孫 ③심재공(心齋公) 동진(東鎭) → 13世孫 ②태악공(泰岳公) 규형(奎炯) → 14世孫 ①건축재공(健畜齋公) 재학(在學)

 

 

健畜齋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건축재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永嘉(영가) 權中煥(권중환) 撰(찬)

 

嗚呼尙忍言哉在昔靑羊赤猿歲島冠內侵國變罔極時吾王考星臺府君仗義擧討賊之計竟爲島獍輩所陷禍將不測遂避地于佳湖泰岳李公所而賴公保護之力幸得無事而公則竟以此不免極禍拊念公當日深恩厚德忘身急人之義常寤寐焉不忘于懷日公之從子俊鎬氏述其伯考健畜齋遺事使其孫杓濬請銘詩于余健畜齋公卽泰岳公之胤子也縱余非其人追念徃事不可以不文辭謹按而叙之曰公諱在學字德明號卽健畜齋姓李氏貫慶州自新羅佐命功臣諱謁平始簪組文學代不乏絶有若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諱之秀官四宰諡貞烈諱揆判司僕寺事諱元林著于麗季入本朝諱蔓實吏判諱繩直大司憲諱時敏進士號琴湖俱以淸白令望名於世諱宗準文校理 贈副提學而畢門高弟被戊午禍世稱慵齋先生高祖光春曾祖周哲祖東鎭號心齋俱隱德不仕考奎炯號卽泰岳以直道實行見稱妣義城金氏鶴峯后士人秉烈女 高宗乙丑公生于汾川之佳湖里第自髫齕以聰明才藝見稱及長受學于三從大夫晩悟公凡於經史子集及理之深粵禮之常變必深究精辯期於實通性篤孝友親在而一意承順無違咈底氣親歿而哀毀幾滅性而日省墓風雨不廢號泣如袒括時實至痛在心故也友于兄弟塤箎湛翕敎子姪御家政接人物各盡其道平居日必冠帶以朱文公十悔及笵益謙七戒書掲左右爲常目警省之資不道之言非法之行視之若凂己推此數事而可驗公平日用工之篤制行之寬也常恨家聲之不振早遊塲屋期擬顯揚見世道變而科法廢遂卷懷林泉不復夢京華軟塵與峕堂顯國省齋始榮監助橘山相公裕元金石錄蒐輯又或與省翁傷時感古每不勝山河異昔之歎矣及白狗社屋益憂憤晦跡寓趣乎書史漁釣或於佳辰令節同李廳山龍洛姜白農金+薰姜柳庵世永李梧陽貞魯李枳庵敎憲諸公嘯詠於江雲湖月便作物外高標只爲不知不慍之君子而止於乎惜哉使公而生郅隆之世處可爲之地則其事業也聲名也不止爲林下偉賢而遭世不辰竟齋志而沒豈非爲世道可慨恨者耶以七十九年壽終于甲申四月二十二日者旨大谷甲坐原同堋其藏也配義城金氏鎭禧女生三男一女男豊鎬觀鎬錫鎬出女適李裕泰豊男杓濬泰濬昇濬弘濬女適鄭寅旭洪運泰觀男頀濬源濬女適尹光重金解源錫男濟國女適姜吉昌宋秉斗金周煥權寧浩金旭煥餘不錄銘曰在朝而有立揚君子在野而有隱德君子健畜齋李公吾知其爲隱德君子也玆銘于珉永詔來後君子也

 


●건축재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健畜齋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가(永嘉) 권중환(權中煥) 찬(撰)

 

슬프다, 차마 말할쏘냐 옛날 을미(乙未, 1895) 병신년(丙申年, 1896년)에 왜구가 침입하여 나라에 변괴가 극심하니 나의 조부에게 참을 수 없는 의거로써 왜적을 치려고 하다가 결국 적에게 함몰되니 화(禍)가 조부 신변에 미치게 됨에 가오동(佳湖洞) 태악이공(泰岳李公) 있는 곳에 피신하여 이공(李公)의 보호하는 힘을 얻어 다행히 무사함을 얻었으나 이공은 이 일로 해서 극형을 면치 못했으니 당시 공의 깊은 은혜와 두터운 덕(德)이 자기 자신은 잊고 남의 급한 일에 구원하던 의리를 생각하면 자나 깨나 가슴에 잊을 날이 없더니 공의 종자(從子, 족하族下) 준호(俊鎬) 씨 그의 백부(伯父) 건축재공(健畜齋公)의 유사(遺事)를 지어서 그 손자 표준(杓濬)으로 하여금 비명(碑銘)을 나에게 청하니 건축재공(健畜齋公)은 곧 태악공(泰岳公)의 자제라.
내가 비록 부족하나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사양할 수만도 없어서 펴 가로대 공의 휘는 재학(在學) 자는 덕명(德明) 호는 건축재(健畜齋)요, 성은 이씨(李氏) 관은 경주(慶州)니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으로부터 시작하여 벼슬과 문장(文章)이 대로 끊이지 않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 휘 지수(之秀)와 사재(四宰) 벼슬을 지낸 정렬공(貞烈公) 휘 규(揆)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휘 원림(元林) 같은 분이 고려말에 드러났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휘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휘 승직(繩直)은 대사헌(大司憲)이요, 휘 시민(時敏)은 진사(進士)에 호는 금호(琴湖)니 함께 청백(淸白)으로 세상에 명망(名望)이 높았고 휘 종준(宗準)은 문과교리(文科校理)로 부제학(副提學)을 받았으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를 입었으니 세상에서 용재선생(慵齋先生)이라고 부른다.
고조는 광춘(光春)이요, 증조는 주철(周哲)이며 조부는 동진(東鎭)이요, 호는 심재(心齋)니 숨어서 벼슬을 아니 했고 부는 규형(奎炯)이요, 호는 태악(泰岳)이니 정직(正直)과 실행(實行)으로 칭찬을 들었다. 비(妣)는 의성김씨(義城金氏) 학봉(鶴峯) 후손 사인(士人) 병렬(秉烈)의 따님이니 고종(高宗) 을축년(乙丑年, 1865년)에 공이 분천(汾川) 가호리(佳湖里)에서 낳다.
어릴 때부터 총명(聰明) 재예(才藝)로 칭찬을 받으니 장성하여 삼종대부(三從大夫) 만오공(晩悟公)에게 수업을 받는다. 경서(經書)의 이수(理數)의 깊음과 예서(禮書)의 상변(常變) 함을 반드시 깊이 연구하고 올바르게 분별하여 기필코 통달했으며 성품이 효도와 우애에 돈독하여 어버이 계실 때는 순종하는 데 뜻을 두어 거슬리는 일이 없었고 돌아가신 후에는 슬퍼함이 극심하여 생명까지 위태로웠고 성묘를 매일 하되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산소에서 애통함이 초상시(初喪時)와 같으니 통심(痛心)이 마음속에 항상 있음이라. 형제간에 우애하고 자질을 가르치고 가정을 다스림과 사람을 수접(酬接)하는데 각각 도리를 다하며 평상시 기거할 때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주문공(朱文公, 주희朱憙)의 십회시(十悔詩, 십회훈十悔訓)1) 와 범익겸(笵益謙) 칠계서(七戒書)2) 를 좌우에 걸어놓고 항상 눈으로 보고 깨우치고 살피는 자료로 삼고 도리가 아닌 말과 법도에 안 맞는 행실은 보기만 해도 몸을 더럽히는 것같이 했으니 이 두어 가치 일들을 미루어 보아도 공의 평일 공부에 독실함과 행동의 실상이 있음을 증험할 수 있다. 항상 문호(門戶)가 드러나지 못함을 한탄하고 일찍부터 과장(科場)에 나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기약했으니 세상이 변천되고 과거법(科擧法)이 폐지됨을 보고 산림(山林)으로 돌아와서 서울의 변화한 것은 꿈도 아니 꾸고 시당현국(峕堂顯國), 선재시영(省齋始榮)과 더불어 귤산상공유원(橘山相公裕元)의 금석록(金石錄) 수집을 돕고 또 성옹(省翁)으로 더불어 시대를 한탄하고 옛일을 회상하며 강산이 옛날과 달라지는 것을 한탄하더니 경술년(庚戌年, 1910년) 국치(國恥) 이후에는 더욱 근심하고 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취를 갈무리고 취미를 글 읽기와 고기 낚는데 부치고 혹 명절 때면 이청산용락(李廳山龍洛)·강백농훈(姜白農金+薰)·강유암세영(姜柳庵世永)·이오양정로(李梧陽貞魯)·이지암교헌(李枳庵敎憲) 등 제공(諸公)으로 더불어 강·구름·호수·달에 시를 읊고 휘파람을 불며 물외(物外) 한 운(韻)을 지어 남이 모른다고 해도 성내지 않는 군자(君子)만 되고 말았으니 아깝다. 공에게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나서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던들 그 사업이나 그 명성이 산림(山林)에 어진 이로 드높여졌을 것을 세상을 잘못 만나 뜻만 가지고 죽는 것이 끝이었으랴. 이어서 세상을 위해 한탄하지 않으리오. 79년에 향수(享壽)하고 갑신(甲申, 1944) 4월 22일에 졸하니 기지대곡(耆旨大谷) 갑좌(甲坐) 산등봉이 그 묘소다.
배(配)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진희(鎭禧)의 따님이다. 3남 1녀를 출생하니 남에 풍호(豊鎬)·관호(觀鎬)·석호(錫鎬)와 따님은 이유태(李裕泰)에 출가했고 풍호(豊鎬) 남에 표준(杓濬)·태준(泰濬)·승준(昇濬)·홍준(弘濬)이요, 여는 정인욱(鄭寅旭)·홍운태(洪運泰)에 출가했고 관호(觀鎬) 남에 호준(頀濬)·원준(源濬)이요, 여는 윤광중(尹光重)·김해원(金解源)에 출가했고 석호(錫鎬) 남에 제국(濟國)이요, 여는 강길창(姜吉昌)·송병두(宋秉斗)·김주환(金周煥)·권영호(權寧浩)·김욱환(金旭煥)에 출가했다. 나머지는 다 기록 못 하고 명(銘)하여 가로대
조정에 있어서는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군자(君子)가 있고 산림(山林)에서는 덕(德)을 숨기고 사는 군자(君子)가 있으니 건축재(健畜齋) 이공(李公)은 내가 아노니 덕(德)을 숨기고 사는 군자(君子)로다. 비(碑)에 새겨 뒤에 오는 군자(君子)에 알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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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문공(朱文公, 주희朱憙)의 십회시(十悔詩, 십회훈十悔訓) : 중국 남송(南宋) 때 (bc 1200년경) 회암(晦庵) 주희(朱熹)선생이 열 가지 모든 일에는 항상 때가 있고, 때를 놓치면 뉘우쳐도 소용없음을 강조한 말이다. 01.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 02. 불친가족소후회(不親家族疏後悔), 03. 소불근학노후회(少不勤學老後悔), 04. 안불사난패후회(安不思難敗後悔), 05. 부불검용빈후회(富不儉用貧後悔), 06. 춘불경종추후회(春不耕種秋後悔), 07. 불치원장도후회(不治垣墻盜後悔), 08. 색불근신병후회(色不謹愼病後悔), 09. 취중망언성후회(醉中妄言醒後悔), 10. 부접빈객거후회(不接賓客去後悔)
2) 범익겸(笵益謙) 칠계서(七戒書) : 범익겸좌우명왈(范益謙座右銘曰) 일불언조정이해변보차제(一不言朝廷利害邊報差除)요, 이불언주현관원장단득실(二不言州縣官員長短得失)이요, 삼불언중인소작과악지사(三不言衆人所作過惡之事)요, 사불언사진관직추시부세(四不言仕進官職趨時附勢)요, 오불언재리다소염빈구부(五不言財利多少厭貧求富)요, 육불언음설희만평론여색(六不言淫媟戲慢評論女色)이요, 칠불언구멱인물간색주식(七不言求覓人物干索酒食)이니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