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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순위공 5세손 이재소] 處士公墓表陰記(처사공묘표음기)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3. 19:57

□충순위공(忠順衛公) 5세손 이재소(李再熽)

 

【계대(系代)】 ①충순위공(忠順衛公) 이숭준(李崇準) → 1世孫 순릉참봉(順陵參奉) 덕림(德林) → 2世孫 ③이(苡) → 3世孫 系子 증공조참의공(贈工曹參議公) 응조(應祚) → 4世孫 성극(成極) → 5世孫 ④재소(再熽)

 

 

處士公墓表陰記(처사공묘표음기)
-傍后孫(방후손) 俊鎬(준호) 撰(찬)

 

公諱再熽字君晦姓李系出新羅佐命功臣諱謁平之後也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諱之秀官四宰諡貞烈諱揆判司僕寺事諱元林著于麗季入我 朝吏曹判書諱蔓實大司憲諱繩直進士諱時敏號琴湖俱有淸望忠順衛諱崇準寔公之五六世以上也高祖諱德林蔭仕順陵參奉曾祖諱苡祖諱應祚萬曆壬辰白衣戰亡 贈工曹參議考諱成極妣眞城李氏善鳴之女萬曆丁巳公生于永嘉之琴溪村幼而有聰慧之才長而有沈黙之氣見稱於人甞從伯兄進士公徃拜于敬堂張先生佩服潛修之工不求聞達不屑擧業爲晦養自靖之計而兄弟四人同居一室友愛尤篤塤箎和唱公序居最季乙丑遭大人公喪年纔八世常有靡逮之恨事伯兄如嚴父無言不告無事不問克盡誠敬和悅備至如是而行義著於鄕聲聞膾灸於口遠近章甫相與之推詡而百拙庵柳公稷其尤也 顯廟甲辰卒葬于琴溪仕望洞艮坐原配安東權氏後配丹陽禹氏暹之女生三男二女男長壽次壔次疇女適黃中煜權亨震皆禹氏出也壽男晋錫壔嗣男胤錫疇男震錫晋男國鳴胤男琴鳴餘不錄嗚呼當時則家聲爀爀文物彬彬又其晠際也出而需世則可以振朝綱扶世敎也人而政家則亦可以述先業遺後謨也而竟以隱淪晦跡爲終老計至今三百餘年之間聲響寥寂人無得以稱焉爲雲仍者慨恨所不己者抑何如哉意者深懲乎自先世連仍士禍故而然歟今其後孫直東海東甫猶恐其先徽之愈久愈泯詢謨諸宗營竪表石責陰記於俊鎬顧余非其人而况世遠難詳者乎系在傍裔寔感爲先之誠不敢以不文辭叅考譜牒畧記傳聞之所一二撰次云爾

 


●처사공묘표음기(處士公墓表陰記) 역문(譯文)
-방후손(傍后孫) 준호(俊鎬) 찬(撰)

 

공의 휘는 재소(再熽) 자는 군회(君晦)고 성은 이씨(李氏)니 계통은 신라좌명공신(新羅佐命功臣)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 된다.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 휘 지수(之秀)와 사재(四宰) 벼슬에 정렬(貞烈)의 시호(諡號)를 받은 휘 규(揆)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휘 원림(元林)은 고려(考慮) 말엽에 드러난 분이고 이조(我朝,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이조판서(吏曹判書) 휘 만실(蔓實)과 대사헌(大司憲) 휘 승직(繩直)과 진사(進士) 휘 시민(時敏) 호 금호(琴湖)가 함께 청망(淸望)으로 명망이 높았고 충순위(忠順衛) 휘 숭준(崇準)은 공의 5·6대 위이고 고조의 휘는 덕림(德林)이니 음직(蔭職) 순릉참봉(順陵參奉)을 지냈고 증조 휘는 이(苡)와 조의 휘는 응조(應祚)는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1년)에 전사(戰死)했는데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증직(贈職) 받았다. 부친 휘는 성극(成極)이요, 모친은 진성이씨(眞城李氏) 선명(善鳴)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정사년(丁巳年, 1617년)에 공이 안동(安東)의 금계촌(琴溪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장성해서는 침묵함이 있어 남의 칭찬이 있었다. 일찍부터 백씨(伯氏, 재환再煥)를 따라 경당(敬堂) 장선생(張先生, 장흥효張興孝)에 글을 배워 허영(虛榮)이 없는 가르침을 깊이 새겨 과거에는 생각이 없고, 은인자중하여 4형제가 한방에 거처하면서 우애가 두터워 부르면 따르고 하더니 4형제 중 공이 가장 끝으로 을축년(乙丑年, 1625년)에 부친이 작고하니 공의 나이 겨우 여덟 살이라 항상 따르지 못함을 한탄하고 백형(伯兄, 재환再煥) 섬기기를 부친과 같이하여 무슨 말이라도 삼지 않음이 없고 무슨 일이라도 묻지 않음이 없어서 경애(敬愛)와 정성을 다하여 화목하고 즐거움이 가득하니 의리가 있다는 소문이 향당(鄕黨)에 드러나고 입에 오르내려 원근(遠近)의 현사(賢士)들이 서로 자랑하고 추대하니 그중에도 백졸암(百拙庵) 류공직(柳公稷)이 가장 더한 사람이었다. 현묘(顯廟) 갑진년(甲辰年, 1664년)에 졸하니 금계(琴溪) 사망동(仕望洞) 간좌(艮坐) 터에 장사하다.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요, 후배(後配)는 단양우씨(丹陽禹氏) 섬(暹)의 따님이다. 3남 2녀를 두니 장(長)에 수(壽), 차에 도(壔) 차에 주(疇)요, 2녀는 황중욱(黃中煜)·권형진(權亨震)에 출가하니 모두 우씨(禹氏) 소생이다. 수(壽)의 남에 진석(晋錫)이오, 도(壔)의 양자(養子)에 윤석(胤錫), 주(疇)의 남에 진석(震錫)이고 진석(晋錫)의 남에 국명(國鳴)이요, 윤석(胤錫)의 남에 금명(琴鳴)이고 나머지는 다 기록지 않는다.
슬프다, 공이 당시는 가성(家聲)이 혁혁(爀爀)하고 문물(文物)이 빈빈(彬彬)한데 또 밝은 세상이라 나가서 세상을 위하여 일했으면 조정에 기강을 진작할 것이오, 들어와 집을 다스리면 또한, 선대 업적을 이어서 후세에 모범을 전하였으련만 마침내는 자취를 숨겨 일생을 살았으니 3백 년 지금까지 적막하게 아무 명성도 들림이 없으니 자손 된 자가 어찌 한탄이 없으리오. 무슨 일로 처세를 그렇게 했을까 생각건대, 선대로부터 연이은 사화(士禍)를 당한 탓이었는가 후손 직동(直東)·해동(海東)이 세월이 오래되면 아름답던 자취가 더욱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일가들과 상의하여 표석(表石) 세우는 일에 합의하고 그 음기(陰記)를 나 준호(俊鎬)에게 부탁하니 내가 자격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대수가 오래된 일이라 자세한 일은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방후손(傍後孫)의 위치에 있어서 조상을 위하는 정성에 감동하여 사양치 못하고 보첩(譜牒)에 상고하고 전해 들은바 한두 가지 모아서 이에 쓰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