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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순위공 9세손 도사공 이정영] 都事月城李公墓碣銘(도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3. 19:27

□충순위공(忠順衛公) 9세손 도사공(都事公) 이정영(李正榮)

 

【계대(系代)】 ①충순위공(忠順衛公) 이숭준(李崇準) → 1世孫 순릉참봉(順陵參奉) 덕림(德林) → 2世孫 ①장사랑공(將仕郎公) 창(菖) → 3世孫 ①응복(應福) → 4世孫 系子 성영(成楹) → 5世孫 ①진사공(進士公) 재욱(再煜) → 6世孫 ③천구(天耉) → 7世孫 ②진국(鎭國) → 8世孫 한승(漢承) → 9世孫 도사공(都事公) 정영(正榮)

 

都事月城李公墓碣銘 幷序
(도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傍后孫(방후손) 俊鎬(준호) 撰(찬)

 

嗚呼人家興替固理之所無常者也公之世遠而家聲浸湮幾乎不振迺者其後孫諸公惕焉謨竪珉使其族人濟大周鎬甫齎其遺蹟畧干記責銘於俊鎬事係宗先感其誠欽其義不敢終辭惟其所錄殊甚疎略太半蠹蝕生卒年月及制行細節無得以攷徵余生數百年之後顧安敢縣想臆說犯謬妄之罪哉辭之無己則書祖先世德之媺仍孫受蔭之厚以詔來後可乎按公諱正榮字春彦姓李貫慶州新羅佐命大臣諱謁平之後也至麗季有諱之秀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諱揆官四宰諡貞烈諱元林判司僕寺事入我朝諱蔓實吏曹判書諱繩直仕于 世宗朝至大司憲以淸白見重於 朝諱時敏進士號琴湖以淸望名於世諱崇準忠順衛諱德林蔭仕 順陵參奉於公八世以上也累傳而高祖諱再煜進士曾祖諱天耉祖諱鎭國考諱漢承妣光山金氏以某年月公生于魯林里第幼而聰警長而淸介雖貧不以貨利自累亦不俯仰於世視不義之富貴如塗泥然甞受 除都事不就儉約自守欿然無所問學而至於人物長短義利曲直明辨詳審暸然如指掌慢戯不出於口怠倣不形於貌責己則厚而怒人甚寬盖其純心實行從本然之發而小無假僞則此豈餙幅衒名者所可侔議哉以某年月日卒葬于永嘉郡治之南魯林陽村後山亥坐原配安東權氏墓合封生四男長光秀次光被次光表次光潤秀嗣男順雨表男基雨潤男順雨出和雨順男相輔基男相佐相欽相憲相建和男相植相連餘不盡錄係之以銘曰
必遜而直儀肅而溫業守于家蔭流來昆遙遙厥緖可期綿連順化全歸魯林之原嗚呼可忘遺風不泯我撮其蹟玆銘于珉

 


●도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都事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방후손(傍后孫) 준호(俊鎬) 찬(撰)

 

슬프다, 인간이 흥하고 쇠하는 것이 천 리의 무상함이라. 공이 살던 세상은 멀어지고 가정은 침체해져서 공의 당시 행적(行蹟)이 암흑 속에 묻혀버릴 것 같으니 후손들 이를 염려하여 비(碑)를 세우기로 합의하고 족인(族人) 제대(濟大)·주호(周鎬)가 그 유적(遺蹟) 약간 가지고 나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하니 이일이 족친(族親)의 일이고 그 정성과 의리에 감동되어 사양치 못하고 그 유적(遺蹟)을 상고해보니 내부 간략하고 태반이 좀이 먹어 출생하고 별세한 연월일도 알 수 없고 행적(行蹟)조차 상고할 길이 없으니 수백 년 뒤에 출생한 내가 어찌 감히 그때 일을 억측해서 그릇되고 망연된 죄를 범할 수 있겠는가. 다만 선조의 세덕(世德)과 자손이 받은 두터운 음덕(蔭德)이나 기록해서 후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옳은 진저.
공의 휘는 정영(正榮) 자는 춘언(春彦) 성은 경주이씨(慶州李氏)니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휘 알평(諱謁)의 후손이라. 고려(高麗) 말엽에 이르러 휘 지수(之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이요, 휘 규(揆)는 벼슬이 사재(四宰)를 지내고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며 휘 원림(元林)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고 아조(我朝, 조선朝鮮)에 와서 휘 만실(蔓實)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휘 승직(繩直)은 세종조(世宗朝)에 벼슬을 해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 청백(淸白)함으로써 조정에 중용되었고 휘 시민(時敏)은 진사(進士)로 호는 금호(琴湖)니 청백(淸白)으로써 명성이 높았고 휘 숭준(崇準)은 충순위(忠順衛)요, 휘 덕림(德林)은 음직(蔭職) 순릉참봉(順陵參奉)이니 공에게는 8대 이상이 된다. 고조의 휘는 재욱(再煜)이니 진사(進士)요, 증조의 휘는 천구(天耉)며 조의 휘는 진국(鎭國)이고 고조의 휘는 한승(漢承)이요, 비위(妣位)는 광산김씨(光山金氏)라.
공이 노림리(魯林里)에서 났으니 출생 연월일은 미상이다. 공이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장성해서는 청백개결(淸白介潔)해서 비록 가난하나 재리(財利)에 구속되지 않고 세상 사람과 이해관계에 초월하여 의리 아닌 부귀는 흙과 같이 봤다. 일찍 도사(都事)를 제수(除授)받았으니 취임치 않고 검소하게 살면서 학문을 물을 곳이 없음을 물만으로 여기며 남의 장단점이며 의리의 옳고 그른 것을 밝게 살펴 손바닥 가르치듯 하였고 희롱하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고 게으름과 거만한 빛은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며 자신의 잘못은 많이 꾸짖고 남은 너그러이 용서하니 대게 그 행실과 마음가짐이 천성에서 나왔고 거짓 꾸밈이 없었으니 어찌 허위로 행동하여 공명을 구하는 무리와 같이 의논할쏘냐. 연월일 미상으로 공이 졸하니 안동군(安東郡) 남쪽 노림양촌(魯林陽村) 뒷산 해좌(亥坐) 자리에 장사하다.
배(配)는 안동권씨(安東權氏)니 묘는 합폄(合窆)이다. 4남을 두었으니 장남에 광수(光秀)요, 다음이 광피(光被)·광표(光表)·광윤(光潤)이고 광수(光秀)의 양자(養子)에 순우(順雨)요, 광표(光表)의 남에 기우(基雨)고 광윤(光潤)의 남에 순우(順雨)니 출계(出系)요, 다음이 화우(和雨)며 순우(順雨) 남에 상보(相輔)요, 기우(基雨) 남에 상좌(相佐)·상흠(相欽)·상헌(相憲)·상건(相建)이고 화우(和雨) 남에 상식(相植)·상연(相連)인데 나머지는 다 기록지 않는다.
명왈(銘曰). 마음이 순하고 곧으며 용모는 엄숙하고 따스하며 사업은 가정을 잘 지켰고 음덕(蔭德)은 자손에게 흘렸으니 아득한 그 전통이 끊기지 않을 것을 기약하리. 순하게 살다가 온전히 돌아가니 노림의 언덕일세. 슬프다, 있을쏜가 끼친 미풍(美風)이 사라지지 않으리라, 내가 그 행적(行蹟)을 간추려 이 비(碑)에 새기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