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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순위공 5세손 진사공 이재욱] 成均進士月城李公墓碣銘(성균진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3. 19:16

□충순위공(忠順衛公) 5세손 진사공(進士公) 이재욱(李再煜)

 

【계대(系代)】 ①충순위공(忠順衛公) 이숭준(李崇準) → 1世孫 순릉참봉(順陵參奉) 덕림(德林) → 2世孫 ①장사랑공(將仕郎公) 창(菖) → 3世孫 ①응복(應福) → 4世孫 系子 성영(成楹) → 5世孫 ①진사공(進士公) 재욱(再煜)

 

 

成均進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성균진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傍后孫(방후손) 俊鎬(준호) 撰(찬)

 

維我傍先祖成均進士公玄宅在永嘉之南內一直菊谷向午之原而尙欠銘典今其後孫濟大周鎬甫惕焉謀伐石表阡而銘詩之責謬及於俊鎬噫公之世遠而家聲浸湮文獻蕩佚無由攷尋其德行藐玆蒙陋顧何敢臆揣妄說哉竊甞讀柳百拙庵公斥廡疏時事所錄則公亦與之俱唱而嶺之縉紳齊聲聯章者也公之兄弟及從班中六人諱啣俱載錄中然則公之爲善類主盟而門戶之望交遊之盛推此可想仰矣但其時則 孝廟盛際也黨論己固儒賢之陞廡崇拜或有年齒之高下德位之憂劣而互相擯斥則不得不然者矣顧其跡隱微寥寥無聞於三百餘年之久而人莫之稱焉豈非慨恨者耶公諱再煜字景含姓李貫慶州新羅佐命功臣諱謁平之後也至麗季有諱之秀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是生諱揆官四宰諡貞烈是生諱元林判司僕寺事是生諱蔓實入我 朝吏曹判書是生諱繩直大司憲是生諱時敏進士號琴湖是生諱崇準忠順衛於公五世以上也高祖諱德林蔭仕 順陵參奉曾祖諱菖將仕郎祖諱應錄考諱成楹妣晉州河氏之淵女萬曆丙午公生于安東琴溪村幼而岐嶷長而穎敏學而精深聲華籍甚與從兄進士再煥甞受業于張敬堂門甚見器重 崇禎壬午中司馬試亦與之聯榜同其室同其師同其榜者也所罕有之事也顯晦有時盛衰在理當時之所躬行而體得者可謂顯而盛而自然無意於進就幾乎不振而竟沒世焉天之於公何施之豊而報之嗇也嗚呼噫嘻配順天張氏峻仁女生三男三女男長天基次天逵次天耉女適柳宗河玉崇尹商後基男鎭邦鎭華女適李亨甲權大有逵男元錫耉男鎭岳鎭國女適柳晩華曾玄以下不盡錄系之以銘曰
早旣好學從師益篤洋水搴蓮可期敭歷卷懷自靖沋泯懿蹟文獻無徵孰不兢惕菊谷之原君子玄宅山高水長遺風不泐載刻貞珉昭示千億

 


●성균진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成均進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방후손(傍后孫) 준호(俊鎬) 찬(撰)

 

나의 방선조(傍先祖) 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의 묘소가 영가(永嘉) 남쪽 일직(一直) 국곡(菊谷) 오향(午向)의 언덕에 있으나 비를 세우고 새기지 못했으니 그 후손 제대(濟大)·주호(周鎬) 군이 근심해서 돌을 세워 표함을 모의하고 글은 나 준호(俊鎬)에게 부탁하니 슬프다. 공이 세상에 살다가 간지가 대수는 오래됐고 유적(遺蹟)과 문헌(文獻)은 흩어졌고 그 덕행(德行)을 찾고자 하나 찾을 길이 없으니 나와 같은 후생이 감히 억측(臆測)하여 망녕(妄寧)되게 말할 수 있으리오. 일찍 류백(柳百) 졸암공(拙庵公) 착무소(斥廡疏)를 읽었는데 그때 일을 기록에 의하면 공도 또한 합세하여 궐기함에 영남(嶺南)의 사대부들이 일제히 일어나 소장에 연판한지라. 공의 형제 사촌 중 여섯 분의 명함이 그 기록 중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공이 명사들과 사이에 주동이 됐고 문호(門戶)에 대한 망수와 공의 위치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때인즉, 효종(孝宗) 성시라 당파싸움도 이미 굳어졌고 명현(名賢)을 승무(陞廡)시켜 숭배(崇拜)하는 데는 혹 연령의 차별과 덕망의 고하를 봐서 서로 반대하는 것이니 부득이한 그때의 형편이다. 그때 자취가 적막한 가운데 묻혀 3백 년 동안 듣지 못했다 하여 세상 사람이 알지도 못하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닐까.
공의 휘는 재욱(再煜)이요, 자는 경함(景含)이며 성은 이씨(李氏) 관향(貫鄕)은 경주(慶州)니 신라좌명공신(新羅佐命功臣)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고려(高麗) 말엽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 지수(之秀)가 있고 이분이 휘 규(揆)를 낳으니 사재(四宰)의 벼슬을 역임하고 시호(諡號)를 정렬(貞烈)이라 했고 이분이 원림(元林)을 낳으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벼슬을 했고 이분이 만실(蔓實)을 낳으니 아조(我朝, 조선朝鮮)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이분이 승직(繩直)을 낳으니 대사헌(大司憲)이요, 이분이 시민(時敏)을 낳으니 진사(進士)에 호를 금호(琴湖)라 했고 이분이 숭준(崇準)을 낳으니 충순위(忠順衛)라. 공의 5대조 이상이고 고조의 휘는 덕림(德林)이니 음직(蔭職)으로 순릉참봉(順陵參奉)이며 증조 휘는 창(菖)이니 장사랑(將仕郎)이 고조부의 휘는 응록(應錄)이며 고의 휘는 성영(成楹)이고 비(妣)는 진주하씨(晉州河氏) 지연(之淵)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병오년(丙午年, 1606년)에 안동(安東) 땅 금계촌(琴溪村)에서 공이 났다. 어려서 기이했고 크면서 영민(穎敏)하여 배움이 정일하고 깊어서 명성이 자자하더니 종형(從兄) 재환(再煥)과 장경당(張敬堂, 장흥효張興孝) 문하(門下)에서 수업하니 심히 큰 재목으로 보였다. 숭정(崇禎) 임오년(壬午年, 1642년) 사마시(司馬試)에서 종형(從兄) 재환(再煥)과 함께 합격하니 한집에서 자라 또 한 스승 아래서 배워 같은 방에 합격한 일은 세상에 드문 일이라 드러남과 어두움이며 성함과 쇠함이 다 이수에 있으니 당시 공이 행하던 일은 드러나고 성운(盛運)에 속할 것이요. 자연(自然)이 진취(進就)에 뜻이 없어 이상 출세를 못 하고 세상을 마치니 어둡고 쇠운(衰運)에 속한지라 하늘은 어찌하여 공에게 베풀기는 두터이 하고 거둠은 인색한고. 슬프고 슬프다.
배(配) 순천장씨(順天張氏) 준인(峻仁)의 따님이다. 3남 3녀를 두니 맏아들에 천기(天基), 다음이 천규(天逵)·천구(天耉)요, 따님은 류종하(柳宗河)·옥숭(玉崇)·윤상후(尹商後)에게 출가했다. 천기(天基)의 남에 진방(鎭邦)·진화(鎭華)요, 따님은 이형갑(李亨甲)·권대유(權大有)에게 출가했고 천규(天逵)의 남에 원석(元錫)이요, 천구(天耉)의 남에 진악(鎭岳)·진국(鎭國)이고 따님은 류만화(柳晩華)에 출가했다. 증손(曾孫)·현손(玄孫)은 다 기록지 않는다.
새겨 가로대, 어릴 때 이미 배움을 좋아해서 스승을 찾아 독실(篤實)히 했도다. 물에서 련(蓮)을 건지고 밝은 역사 기약했더니 포부를 굽혀 적막하게 사니 떳떳한 자취가 숨어버리고 문헌(文獻)도 상고할 수 없으니 뉘 아니 슬퍼하리. 국곡(菊谷)의 언덕은 군자(君子)의 잠든 곳이라 산은 높고 물 깊으니 끼친 유풍(遺風)은 흩어지지 않으리. 이 비석에 새겨서 억천(億千)에 맑게 보이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