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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공 11세손 사과공 이종택] 司果月城李公墓碣銘(사과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3. 18:42

□충민공(忠愍公) 11세손 사과공(司果公) 이종택(李鍾宅)

 

【계대(系代)】 ②충민공(忠愍公) 이명민(李命敏) → 1世孫 ④건석(乾石) → 2世孫 석환(碩還) → 3世孫 ①득남(得南) → 4世孫 경립(敬立) → 5世孫 시건(時建) → 6世孫 ①지영(芝英) → 7世孫 ①진사공(進士公) 춘경(春慶) → 8世孫 ④벽진(壁鎭) → 9世孫 ①윤배(潤培) → 10世孫 길화(吉和) → 11世孫 ①사과공(司果公) 종택(鍾宅)

 

 

司果月城李公墓碣銘 幷序
(사과월성이공묘갈명 병서)
-延安(연안) 金晋秀(김진수) 撰(찬)

 

尙州治北內西之黑石後山枕离而有一封者即故司果慶州李公之藏也公諱鍾宅字根弼李氏以新羅佐命大臣謁平爲上祖至麗季有曰之秀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世承官赫四傳至諱繩直入我 世宗朝進士官至大司憲以淸白見重於朝生諱命敏號知止堂繕工監副正 端廟潜邸時己受調護之命及癸酉謂以黨瑢謀叛與金宗瑞同時被禍至 肅廟朝 贈兵曹參判諡忠愍配享寧越八忠臣祠生諱建石先考公被禍之日生甫三朔在於乳婢得免因保育於仲父諱靡敏謫所有遺書藏于家世於公間十代也高祖諱春慶曾祖諱壁鎭祖諱潤培考諱吉和妣金海金氏公以 哲宗丙辰生于內西之新村第有異質凡所嬉戱設陳習儀指揮同類抑揚進退觀者無不嘆賞曰此兒能成大器及長風儀志氣不于齷齪而凛然若豁達威武幾無所不能也常恨家聲之久湮不振自意需世顯敭以暢門戶而一出柴扉擢點虎榜庶或期展所志矣時己非昔晩膺一司果之識想其無用武之地故慨然不意進就卷而深藏以述先遺後爲自擬而時或寓酒每不禁新亭之淚銅駝之懷矣年七十四終即己巳八月五日也配江陵金氏南原梁氏墓拜在黑石同原有一男貞雨貞雨男相勳相喆相演相容女適金敬培喆男淑炯餘不錄於乎公禀魁毅之氣秉有爲之志而卒蹭蹬不遇坎坷林壑可勝惜哉公之孫相喆甫欲竪碣表墓囑其族丈俊鎬氏述遺事一通而責銘於不侫晋秀素以不談累辭不獲謹按狀而叙次之系以銘曰
猗公所禀質淳氣昻內實其媺何用不臧早懷超志將擬展步終閼其施奈命不偶仍闇自珍鞱光歛鍔乃治兵園垂裕後劃誠心攸積冥報是應兟兟嗣慶曷匪斯證生居新村死歸黑石欝彼佳城山蒼水碧存歿何憾永安公魄我銘其最昭揭羡域

 


●사과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司果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연안(延安) 김진수(金晋秀) 찬(撰)

 

상주군(尙州郡) 북쪽 내서(內西) 흑석후산(黑石後山) 오좌(午坐)에 봉(封)한 것이 곧 사과(司果) 경주이공(慶州李公)의 묘소라. 공의 휘는 종택(鍾宅)이오, 자는 근필(根弼) 성은 이씨(李氏)니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이 윗 조상이 되고 고려(高麗) 말에 이르러 휘 지수(之秀)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이 있으니 대대로 높은 벼슬을 이어 왔다. 4대를 내려와서 휘 승직(繩直)은 아조(我朝,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진사(進士)로서 대사헌(大司憲) 벼슬을 이르렀으니 청백(淸白)함으로 조정에 중히 쓰이다. 휘 명민(命敏)을 낳으니 호는 지지당(知止堂)이요, 벼슬은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이다. 단종(端廟) 세자(世子) 때 보호하라는 왕명을 받았더니 계유(癸酉) 1453년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과 배반(背叛)을 꾀했다 하여 김종서(金宗瑞)와 동시에 화(禍)를 입었다. 뒤에 숙묘조(肅廟朝)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충민(忠愍)이라는 시호(諡號)가 추증됐고 영월(寧越) 팔충신(八忠臣) 사당(祠堂)에 배향(配享)됐다.
막내아들 건석(建石)은 부친이 화(禍)를 당할 때 난지 겨우 석달(三月)이라. 유모한테 있었기 때문에 화(禍)를 면하고 중부(仲父) 휘 미민(靡敏) 적소(謫所)에 가서 길렀다는 유서(遺書)가 있어 대대로 보관하고 있으니 공에게는 10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춘경(春慶)이요, 증조의 휘는 벽진(壁鎭)이며 조의 휘는 윤배(潤培)고 부친의 휘는 길화(吉和)고 모친은 김해김씨(金海金氏)니 공이 철종(哲宗) 병진년(丙辰年, 1856년)에 내서(內西) 신촌(新村) 자택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어 아이들과 노는 데도 진(陳)터를 만들고 호령하고 지휘하는 흉내를 하니 보는 자 기특히 여겨 이 아이가 나중에 큰 재목이 될 것이라고 하더니 장성하면서 풍채와 지기(志氣)가 좁지 않고 늠름한 기상이 활달하며 무술도 능하지 아니함이 없더니 항상 가문(家門)이 오래도록 한미한 것을 한탄하고 세상에 나가서 훌륭하게 되어 문호(門戶)를 빛내리라 하고 집을 나가 호방(虎榜) 무과(武科)에 합격하니 뜻하는 바를 이를까 하고 기대했으나 그때가 옛과 달라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늦게야 사과(司果)란 직책을 받으니 생각건대 무술을 쓸만한 처지가 못 되므로 벼슬길에 더는 나갈 뜻이 없어 고향에 돌아와 조상에 대한 사업과 후손에 끼칠 일이나 생각하고 때로 술에 취하면 신정(新亭)에 눈물과 동타(銅駝)의 회포를 금치 못하다. 향년(享年)이 74에 졸하니 기사년(己巳年, 1929년) 8월 5일이라.
배(配)는 강릉김씨(江陵金氏)와 남원양씨(南原梁氏)니 묘는 흑석동(黑石同) 갗은 산이다. 1남을 두니 정우(貞雨)고 정우(貞雨) 남에 상훈(相勳)·상철(相喆)·상연(相演)·상용(相容)이며 여는 김경배(金敬培)에 출가했고 상철(相喆)의 남에 숙형(淑炯)이니 나머지는 다 기록 못한다.
슬프다, 공의 크고 굳센 기질을 타고 하고자 하는 뜻을 가졌으나 마침내 때를 잃고 만나지 못하여 산림(山林)에 묻혔으니 아깝지 않으랴. 공의 손자 상철(相喆)이 비(碑)를 세워 묘표(墓表)를 하고자 그 족장(族丈) 준호(俊鎬) 씨에 위촉하여 유사(遺事)를 지어서 나를 찾아 비명(碑銘)을 부탁하니 나는 불민(不愍)함으로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해 삼가 가장(家狀)에 따라 지으니 명왈(銘曰)
공의 성품은 기질이 순박하고 기상은 헌앙(軒昂)하다. 안으로는 아름다움이 충실하니 어느 곳에 쓰인들 착하지 않으리오. 일찍이 높은 뜻을 품고 장차 걸음을 옮기려 했는데 마침 그 쓰임이 막히니 운명이 어찌 합하지 않는가. 이에 숨어서 자중하니 빛이 갈무려 지고 칼날은 거두었네. 전토(田土)를 다스려서 자손 위에 계획하니 성심껏 쌓은 바라 보답이 없을쏘냐. 자손들이 창성(昌盛)하니 이것이 증거가 아닐쏘냐. 살아서는 신촌(新村)에 있고 죽어서 흑석(黑石)으로 돌아가니 울창한 가성(佳城)이여 산과 물이 푸르도다. 죽고 삶에 유감이 없으니 공의 혼백이 길이 편하리라. 내 그 으뜸을 새겨서 밝게 이곳에 게시하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