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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10세손 오천공 이경혁] 鰲川公行狀(오천공행장)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3. 16:35

□판사공(判事公) 10세손 오천공(鰲川公) 이경혁(李暻赫)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②연와공(蓮窩公) 말손(末孫) → 3世孫 유경(有慶) → 4世孫 ①선공감공(繕工監公) 순년(舜年) → 5世孫 ②화남공(華南公) 여격(汝格) → 6世孫 系子 동지중추부사공(同知中樞府事公) 춘영(春榮) → 7世孫 ①인담공(林潭公) 희백(希白) → 8世孫 ②쌍오당공(雙梧堂公) 처인(處仁) → 9世孫 ③동옥(東玉) → 10世孫 ①오천공(鰲川公) 경혁(暻赫)

 

 

鰲川公行狀(오천공행장)
-府使(부사) 李忠翼(이충익) 撰(찬)

 

猗我靑邱介處海左壤地偏小謂之小華者以其人文之宣朗禮義彬與而 聖作五百年間天賦之孝道德之行昭著方冊者有非蠡管之所可窺測至若鰲川公繼世才行近古所罕也己未春余宰玆邑聞有才望之士乃公之孫竹窩居士而文章德業最著賁飾南州之冠冕不求聞達隱居講道搢紳章甫聞其華剌傾盖諮訪不止以月數也余亦景慕高風以書面爲莫逆者久矣其男衡雨袖緝曾王考家狀來款請誌余素鹵莾雖不獲文辭顧其家君之契雅裒其前人之贊述遂以爲記謹按公姓李諱敬赫字聖彦號鰲川系出慶州羅初佐命元臣諱謁平麗季金紫光祿三重大匡尙書左僕射月城君諱之秀之後本 朝吏曹參議諱思剛之九世孫也高祖諱春榮右尹曾祖諱希白參奉祖諱處仁號雙梧考諱東玉妣全州崔氏日柱女 英廟癸亥三月二十六日公生于龍城府西林村天姿溫粹德容端重事親家雖屢空無闕甘滫克殫誠孝祭先不懈禮容冀格神明與宗黨悅叙情話克遵敦睦居家踐實學行備至修齊此豈非十室之忠百行之源歟粤在壬稔鬱攸之餘先世文獻盡入灰燼泯沒無微極爲曠世之痛矣公僑㝢玆土闢一精舍坐如泥塑雖咬菜飮瓢安貧自適每切思鄕之懷咏觴文酒暢叙幽情又與鄕朋評竹題花玩究諸史終始不渝孝其親而信友宅其仁而得智然則申公闡揚士流推重非私伊公也如此孝行如此才德埋沒遐土一未見采其或公議之携貳歟秉筆百載之下者猶不勝感歎况裔孫哀慕之心益復如何哉公卒于 純祖丁丑六月十九日葬于蔚山德洞匏谷負壬之原配淸州韓氏世白女生四男二女男長諱光郁次諱光顯次諱光淳次諱光喆女長水原白思弘次坡平尹宗一也光郁配高靈金氏聖珏女生二男一女男長希達次英達女廣州安興石繼配慶州金氏雲祥女生二男長徽鍾號竹窩次綦鍾內外孫曾玄總幼七十餘人盡不能僂指而庭訓襲出公之餘蔭施于雲仍者歟余悶沒無傳敢忘陋拙略敍其槩以示欽慕者贊曰
瓢巖降靈翊羅肇基綿綿厥緖百世本支惟公禀性好德秉彞邈然寡儔卓乎不覊根仁達孝百行中規誠竭供旨禮腆戯粢悅親情話孔懷怡怡倫敍敦睦樂諧壎箎孜孜爲善檏古賢姿淮橘南渡盤錯根枝隱居行義花竹鰲崖單瓢陋巷雅操自持庶幾顔樂克殫董慈君子若人不忒其儀無形有錫福履艾綬裕後蕃昌玉樹蘭芝純古+單斯享訐謨厥貽庭訓襲出才望最奇是祖是孫名滿門楣疇若公孝天實禀爲截彼南岡松栢特垂想像高風水長山崎於萬斯年德音不衰曷以揮揚申公有詩永示天休銘焉在玆

 


●오천공행장(鰲川公行狀) 역문(譯文)

-부사(府使) 이충익(李忠翼) 찬(撰)

 

우리 청구(靑邱)는 바다 왼쪽에 있어 땅이 적으나 소중화(小中華)1) 라고 한 것은 그 문필(文筆)이 명랑하고 예의가 있음이니 5백 년마다 성인(聖人)이 나서 하늘이 풍부한 효(孝)와 도덕(道德)을 행한 사람이 역사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나 좁은 안목으로는 다 보고 측량할 수 없으나 오천공(鰲川公) 같은 이는 대를 이어 행한 효행(孝行)은 근고(近古)에 드문 일이라. 기미년(己未年) 봄에 내가 이 읍(邑)을 맡아 왔을 때 유망한 인사를 들으나 공의 손자 죽와거사(竹窩居士)로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가장 높아 남주(南州)에서 으뜸이 되나 남이 아는 것을 바라지 않고 숨어서 살며 도를 닦아 진신(搢紳) 군자(君子)들이 그 이름을 듣고 찾는 것이 한 달 두 달이 아니라 나도 또한, 그 높은 덕행(德行)을 사모하여 글로서 서로 통해 막역한 친구가 된 지 오래더니 그 아들 형우(衡雨)가 자기 증조부 행장록(行狀錄)을 가지고 나를 찾아 글을 청하니 내가 원래 노둔함으로 글을 잘못 배웠으나 선친과의 교분을 돌아보고 전인(前人)들의 기록을 참고로 해서 이에 쓰노라.
공은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경혁(暻赫)이며 자는 성언(聖彦)이요, 호는 오천(鰲川)이니 경주(慶州)로 본관을 쓴다. 신라(新羅)초에 좌명원신(佐命元臣) 휘 알평(謁平)과 고려(高麗) 말기에 금자광록(金紫光祿) 삼중대광(三重大匡)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이요, 본조(本朝,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이조참의(吏曹參議) 휘 사강(思剛)의 9대손이라. 고조의 휘는 춘영(春榮)이니 우윤(右尹)이요, 증조의 휘는 희백(希白)이니 참봉(參奉)이요, 조의 휘는 처인(處仁)이니 호는 쌍오(雙梧)요, 고의 휘는 동옥(東玉)이요, 비(妣)는 전주최씨(全州崔氏) 일주(日柱)의 따님이니 영묘(英廟) 계해(癸亥) 3월 26일에 용성부(龍城府) 서림촌(西林村)에서 공이 출생하다.
공은 자품(姿禀)이 온화하고 순수하며 중후(重厚)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집은 비록 가난하나 입에 맞는 음식은 떨구지 않기 위하여 성(誠)과 효(孝)를 다하며 선조 제사 때는 예절에 어긋남이 없이하여 신령의 흠격(歆格) 함을 기원하고 일가친척으로 정담을 나누어 배행(百行)의 근본이 아닐까. 저 임오년(壬午年)에 화재로 선대문적(先代文籍)이 다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것이 없으니 후세 자손들의 아픔이라. 공이 이곳에 우거(寓居) 하면서 정자(亭子) 몇 칸을 짓고 그 안에 앉아 나물 먹고 물 마셔도 가난을 이기고 도를 즐기며 고향 생각이 간절하면 글과 술로 객회(客懷)를 달래며 심정을 위로하고 또 지방 친우(親友)로 글도 지으며 경사(經史)도 연구하여 시종(始終)이 여일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붕우(朋友)에 유신(有信)하며 아진 마을에 집을 짓고 지혜롭게 살아가니 신공(申公)이 찬양하고 사류(士流)들이 높이 추대함이 공이요, 사사로움이 아니라 이 같은 효행과 이 같은 재덕(才德)이 지방에 부쳐서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했으니 당시 공론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백여 년 뒤에 붓을 잡은 내가 감탄을 금치 못할진대, 그 자손의 마음이야 오죽하랴. 공의 순조(純祖)임금 정축(丁丑) 6월 19일에 별세하니 울산(蔚山) 덕동포곡(德洞匏谷)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다.
배(配)는 청주한씨(淸州韓氏) 세백(世白)의 따님으로 4남 2녀를 출생하니 장남에 광욱(光郁)이요, 다음이 광현(光顯)·광순(光淳)·광철(光喆)이요, 따님은 수원(水原) 백사홍(白思弘)·파평(坡平) 윤종일(尹宗一)에 출가했다. 광욱(光郁)의 배(配)는 고령김씨(高靈金氏) 성각(聖珏)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출생하니 장남에 희달(希達)이요, 다음이 영달(英達)이요, 따님은 광주(廣州) 안흥석(安興石)에 출가했고 계배(繼配)는 경주김씨(慶州金氏) 운상(雲祥)의 따님으로 2남을 출생하니 장남에 희종(徽鍾)이요, 호는 죽와(竹窩)며 다음 기종(綦鍾)이 내외손(內外孫) 증손·현손이다. 어린 것이 70여 인이라, 일일이 기록할 수 없으나 모두 비범하니 공의 음덕(蔭德)이 자손에 믿음이 아닐까. 내가 공의 미덕이 전함이 없을까 민망히 여겨 졸렬하나마 대략 기록하여 후인에 보이노라.
찬왈(贊曰) 신령한 표암공(瓢巖公)이 신라(新羅)를 도와 창업하였다. 길이길이 전하여 백세(百世)의 시조(始祖)로다. 공의 품성(禀性)이 덕(德)을 닦고 떳떳하였으니 훌륭함이 짝이 없고 높으면서 든든하다. 어짊에 근본하여 효(孝)를 행하니 백행(百行) 중에 모범이요, 정성을 다해 봉양하고 예(禮)를 다해 제사 지내며 친척 간에 도모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니 옛 현인의 자질로 착한 일을 부지런히 하였다. 남쪽으로 와서 뿌리를 박고 숨어 살며 의리를 행하니 오애(鰲崖)에 화죽(花竹)이라. 적막한 구렁에 한 표주박으로도 밝은 지조는 변치 않으니 안자(顔子)2) 의 낙(樂)3) 과 동씨(董氏)4) 의 자비로다. 현인(賢人) 군자(君子)들이 그 품의에 복종하다. 보이지 않는 복을 주어 자손이 번창하며 가훈(家訓)을 세섭하여 장래 희망이 현저하니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 명망이 문중(門中)에 자자하니 뉘라서 공의 효(孝)를 따를까. 하늘이 내렸도다, 높은 유풍(遺風)을 추모하니 물은 깊고 산은 높도다. 천만 년을 내려가도 덕음(德音)이 끊이지 않으니 어떻게 찬양할꼬. 신공(申公)의 글이 이내 아름다움을 길이 전하기 위해 여기에 새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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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중화(小中華) : 조선 시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 빗대어서,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며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 안자(顔子) : ‘안회(顔回)’를 높여 이르는 말.
안회(顔回) :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자는 자연(子淵)이다. 자(字)를 따서 안연(顔淵)·안자연(顔子淵)이라고도 부른다. 학덕이 높고 재질이 뛰어나 공자의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그러나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빈곤하고 불우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성내거나 잘못한 일이 없으므로,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받들어졌다. 그래서 안자(顔子)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3) 안자(顔子)의 락(樂) : 인욕(人欲)을 초월하여 천리(天理)에 심취한 즐거움. 논어 용야(雍也)에 “한 그릇 밥에 한 표주박 물로 누추하게 살아간다면 남들은 걱정 그칠 날이 없겠지만 회(回)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좋아하고 있으니, 참 어질다, 회 그 사람.” 하였다.
4) 동자(董子) : 동중서(董仲舒)로 중국 전한 때의 대학자로 한때는 학문에 열중하여 3년 동안이나 자기집 밭을 들여다보지 않기까지 하였다고 전해진다. 『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

 


追記(추기)
-族人(족인) 泰炯(태형) 記(기)

 

往在戊午秋余自花田陞莅蔚閫亞營矣聞有竹窩居士才德拔萃文章牖世爲嶠南宗匠而願一執摯力擬造門奉綠有魔坐衙匝月又陞折衝階交龜在即故雖願識荊未設徐榻而歸心常懸慕者久矣今見鰲川先生狀即吾宗文而文望超世仰若山斗巍然有不可追之像恍然有未親炙之歎又况其胤文學卓越宜乎鰲川有其孫竹窩有其子家庭之訓世襲不墜雖欲著揚季公先我實其蹟拙文蕪辭何敢贅一然而余景慕之忱不能貞己敢題其尾

 


●추기(追記) 역문(譯文)
-족인(族人) 태형(泰炯) 기(記)

 

지난 무오년(戊午年) 가을에 내가 화전(花田)으로부터 울주아영(蔚州亞營)에 승진해와서 죽와거사(竹窩居士)의 재덕(才德)이 뛰어나고 문장(文章)이 출중하여 남쪽 으뜸이란 말을 듣고 한번 보기를 원해서 문호(門戶)를 찾을까 했더니 인연이 없는 탓인지 부임한지 월(月)여에 절충장군(折衝將軍)이란 벼슬에 올라 곧 떠나야 할 형편이라 만나보지도 못하고 떠나는 마음 연연했더니 이제 오천선생(鰲川先生)의 행장(行狀)을 보니 곧 우리 문중(門中) 어른이라. 명망이 세상에 뛰어나서 높이 우러러 가히 다를 수 없는 현상이라 보고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항차 그 아들 문학(文學)이 탁월하다 하니 오천공(鰲川公)은 손자를 잘 두었고 죽와(竹窩)는 아들을 잘 두었으니 가정의 훈계를 대를 이어 떨구지 않았도다. 내 비록 발천(發闡)하고자 하니 먼저 이공(李公)이 했네. 그 실적(實績)을 기록하고자 하나 글이 짧아서 어찌 만일을 기록하랴. 내 그 추모하던 정성으로 말미(末尾)에 추기(追記)하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