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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12세손 죽와공 이휘종] 盆城金氏墓誌(분성김씨묘지)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3. 18:10

□판사공(判事公) 12세손 죽와공(竹窩公) 이휘종(李徽鍾)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②연와공(蓮窩公) 말손(末孫) → 3世孫 유경(有慶) → 4世孫 ①선공감공(繕工監公) 순년(舜年) → 5世孫 ②화남공(華南公) 여격(汝格) → 6世孫 系子 동지중추부사공(同知中樞府事公) 춘영(春榮) → 7世孫 ①인담공(林潭公) 희백(希白) → 8世孫 ②쌍오당공(雙梧堂公) 처인(處仁) → 9世孫 ③동옥(東玉) → 10世孫 오천공(鰲川公) 경혁(暻赫) → 11世孫 ①난파공(蘭坡公) 광욱(光郁) → 12世孫 ③죽와공(竹窩公) 휘종(徽鍾)

 

 

盆城金氏墓誌(분성김씨묘지)
–承旨(승지) 嚴耆永(엄기영) 撰(찬)

 

夫不儉其親者送死之禮也有誌其墓者壽藏之表也謹按盆城金氏乃竹窩李徽鍾之配白村諱文起之後晩圃鳳陽之季女也夫人以 純祖壬戌十一月初十日生年十八歸于竹窩公竹窩慶州人蘭坡光郁之子金紫光祿月城君諱之秀之後官同樞贈右尹春榮之六世孫也有二男四女男曰衡雨行雨女曰蔚山朴載楹東萊鄭裕興靈山辛潤赫次未及筓衡雨娶杞溪兪氏致文女生一男一女今皆幼行雨娶淸安李在淵女生一女今幼朴載楹生一男二女今皆幼鄭裕興生二男曰景寬大寬辛潤赫生二男一女男曰元植亨植女今幼內外子女孫總若干人夫人自幼壼範正修有貞烈之慕婦德純備篤至孝之行其爲遊嬉也雖獲微物必獻于父母次分諸兄遍及而後乃食凡所嘉柔旨甘非父母諸兄之餕未嘗一入口年纔十歲聰慧絶倫女紅之工過眼輒解間習諺書博通蘋藻之禮晩圃公每惜其不爲男子身而及嫁入門之初先舅見其姿眇而儀女+間氣溫而心淑有女士人之德鍾愛曰新婦之吉祥端正實乎吾家福也家素貧剝井曰蕭然殆無承祀庇宗之道然尙敦睦好施予當食而聞人之飢輟箸而與之方織而聞人之凍裂機而贈之少無斳色奉祭祀克殫其誠凡得異物必藏貯以供籩實事舅姑承順無違晨昏以褻服不敢進後以先舅宿患三年苦劇刀圭無方而築壇于靜處每夜禱北斗不廢雨雪誠心所格天感勿藥之效化行閨壼足於聽聞無親疎內外莫不稱孝事君子情甚摯嘗曰主饋者吉婦之事學問者君子之道則豈可餒於畎畒入於墻面乎李公亦佳暫言不窺田園務盡餘力徹夜勤讀夫人喜而不寐亦以治續爲業存之黽勉岡有曠缺家道稍饒如是者十年李公文學最著南州此豈非刑于妻而出來者耶夫人卒于 憲廟戊午十月十五日葬于蔚山溫北面鰲山康子洞負子之原鳴呼以此烈孝之德何嗇其壽命之蹇而奪之速也今於永訣之時爲其雲仍者豈無痛纏風樹攀誥泣血之心哉其男衡雨袖先妣行狀屢款請誌余雖文拙蕪辭世有親炙者故亦不敢辭以耳濡目格謹撮其要以俟壽傳而不朽焉

 

*慶州李氏鼎珉錄 v2 (泰炯 編輯)

 


●분성김씨묘지(盆城金氏墓誌) 역문(譯文)
-승지(承旨) 엄기영(嚴耆永) 찬(撰)

 

그 부모에 후하게 하는 것이 죽어서 가는 길에 예(禮)로 하는 것이요. 그 묘소에 글을 새기는 것은 그 전함을 오래 하고자 함이라. 삼가 보건대 분성김씨(盆城金氏)는 죽와(竹窩) 이휘종(李徽鍾)의 배위(配位)니 백촌(白村) 휘 문기(文起)의 후손이요, 만포(晩圃) 봉양(鳳陽)의 막내딸이다. 부인이 순조(純祖) 임술(壬戌) 11월 초 10일에 출생하여 죽와공(竹窩公)에 출가하니 죽와(竹窩)는 경주인(慶州人)이니 난파(蘭坡) 광욱(光郁)의 아들이다.
금자광록(金紫光祿)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의 후손이다. 벼슬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우윤(右尹)을 증직(贈職) 받은 춘영(春榮)의 6대손이다. 2남 4녀가 있으니 남은 형우(衡雨)·행우(行雨)요, 여는 울산(蔚山) 박재영(朴載楹), 동래(東萊) 정유흥(鄭裕興), 영산(靈山) 신윤혁(辛潤赫)이요, 끝은 출가하지 않았고 형우(衡雨)는 기계유씨(杞溪兪氏) 치문(致文)의 따님에 장가들어 1남 1녀를 생하니 모두 어리고 행우(行雨)는 청안(淸安) 이재연(李在淵)의 따님에 장가들어 1녀를 생하니 어리다. 박재영(朴載楹)은 생 1남 2녀하니 어리고 정유흥(鄭裕興)은 생 2남하니 경관(景寬)·대관(大寬)이요, 신윤혁(辛潤赫)은 2남 1녀를 생하니 남은 원식(元植)·형식(亨植)이요, 딸은 어리다. 내외자손(內外子孫)이 총 다수 인이라.
부인이 어릴 때부터 규중법칙(閨中法則)을 바로 닦아 정렬(貞烈)의 자질이 있으니 부덕(婦德)이 순비(純備)하고 효행(孝行)이 독실(篤實)하여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부모께 드리고 나머지는 동기간에 고루 나눈 뒤에 먹고 맛좋은 음식은 부모와 모든 형이 먹지 않으면 입에 넣지 않다. 나이 10세에 총명이 뛰어나 여자의 할 일은 눈으로 보면 자연히 알고 사이로 언문(諺文) 글을 익혀서 제례를 능통하니 만포공(晩圃公)이 그 남자가 아님을 애석해하더니 시집갈 때가 되어서 처음 문(門)에 들어가니 시부(媤父)가 그 자태가 아름답고 기운이 온순하며 태도가 정숙한 것을 보고 부녀의 덕이 있다 하여 사랑하여 이르되 신부(新婦)의 상서롭고 단정함이 우리 집 복이라 하더라. 집이 가난하여 제사를 받들고 식구들을 보살펴나갈 길이 없으나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밥을 먹다가 남이 굶는다는 말을 들으면 술을 지우고 남을 주며 베를 짜다가도 남이 춥다는 소리를 들으면 베틀에 짜던 것도 끊어서 주되 조금도 아까운 기색이 없고 제사를 받드는 데는 그 정성을 다하며 이상한 물건이 생기면 길무리 두었다가 제사 때 접시에 담고 시부모를 섬기되 순하게 받들어 어긋남이 없고 새벽과 저녁에 옷을 껴입고는 시부모 처소에 들어가지 않으니 나중에 시부(媤父)가 숙환으로 3년을 고통받는데 약을 구할 방법이 없어 깨끗한 곳에 단(壇)을 모으고 밤마다 북두칠성(北斗七星)에 빌기를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계속하더니 그 정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약 안 쓰고 병이 나셨으니 효화(效化)는 안방에서 행한 것이 사방에 알려져 원근 친척이 효부(孝婦)라 칭송하더라.
남편을 섬기되 정이 더욱 진지하며 항상 이르기를 음식을 먹게 하는 일은 주부의 일이요. 학문(學問)하는 것은 군자(君子)의 도리니 어찌 농사로 하여 무식이 될 수 있나 하니 이공(李公)도 말을 올케 여겨 농사에 연연하지 않고 밤을 새워가며 부지런히 글을 읽으니 부인도 기뻐서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길쌈을 부지런히 하니 가정 형편도 점차 부유해지니 10년을 이같이 하니 공의 학문(學文)은 남주(南州)에서 으뜸이다. 이 어찌 부인의 덕이 아니랴.
부인이 헌묘(憲廟) 무술(戊戌) 10월 15일에 운명하여 울산(蔚山) 온북면(溫北面) 오산(鰲山) 경자동(康子洞) 자좌(子坐)의 언덕에 안장하다. 이렇듯 열효(烈孝)의 덕(德)이 있는데 어찌 수명이 길지 못하여 빨리 가셨을까, 영결(永訣)하는 날 자손된 자 통한하여 읍혈(泣血)치 않았으랴. 그 아들 형우(衡雨)가 자기 모친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이 글을 청하니 내 비록 졸문천식(拙文淺識)이나 세의(世誼)가 있는 터라 감히 사양치 못하고 눈에 본바 귀에 들은 것 중에 요긴한 것만 추려서 이글이 오래 전하기를 기다리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