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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공 12세손 두암공 이필우] 杜庵處士月城李公墓碣銘(두암처사월성이공묘갈명) 幷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3. 18:29

□충민공(忠愍公) 12세손 두암공(杜庵公) 이필우(李弼雨)

 

【계대(系代)】 ②충민공(忠愍公) 이명민(李命敏) → 1世孫 ④건석(乾石) → 2世孫 석환(碩還) → 3世孫 ①득남(得南) → 4世孫 경립(敬立) → 5世孫 시건(時建) → 6世孫 ①지영(芝英) → 7世孫 ①진사공(進士公) 춘경(春慶) → 8世孫 ②영진(榮鎭) → 9世孫 ②익배(益培) → 10世孫 ①덕화(德和) → 11世孫 종성(鍾聲) → 12世孫 두암공(杜庵公) 필우(弼雨)

 

 

杜庵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두암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永嘉(영가) 權中煥(권중환) 撰(찬)

 

商山治銀尺之杜谷後山坤坐原即故慶州李公號杜庵諱弼雨字文甫衣舃之藏也禮宜碣而尙未遑其胤相善甫將伐石而表之介其族俊鎬氏所述遺事請銘詞於余鳴呼公無官職之顯文章之傳其何以稱述乎惟其心德之全制行之媺實有官職文章之所不及者而人無有知者爲隱德也隱而不揚其可乎乃按其遺事而叙之曰慶州之李肇祖曰新羅佐命大臣諱謁平遠祖曰月城君諱之秀官四宰 諡貞烈諱揆判司僕寺事諱元林著于麗朝入本朝有吏判諱蔓實大司憲諱繩直以淸白著繕工監副正號知止堂諱命敏守 魯陵節與金宗瑞同時被禍後 贈兵參 諡忠愍配享寧越八忠臣祠諱建石生甫三月賴乳婢免禍而收養於仲父靡敏謫所於公間十一世諱榮鎭諱益培諱德和諱鍾聲高曾祖若禰玄風郭士人一祿之女其妣也 高宗辛巳生公于咸昌儉汗里第氣貌秀嶷性度寬弘遊不好嬉戱學不待鞭督侍長者應對惟謹是則公生質之美也才敏而志篤讀書至義理深奧處必潜究黙硏不得不措仍得家庭期擬之重是則公用工之篤也涵養其德惟整齊其容儀聲利不能誘岐求無所萌利義之辨事物之應定有常法是則公制行之毅也常以貧無以力學慨然以謂旣不能身靑雲志立揚則猶可以經濟一家爲吾職所當爲乃躬檢耕稼勤敏節儉親在而盡甘旨親歿而致哀毀先墓之失傳而以義起設壇之意勤教其胤使之繼志述事是則公事親奉先之極其誠也之數者足以驗公平日所行所學之可觀而當時名碩如杜谷南亨元友松李康世柳甲馨諸公最其心友也遭世不古便若璞玉之埋於塵土幽蘭之萎於空谷鳴呼惜哉配慶州金氏宗洙女先公卒墓在內西新村丑坐原生一男一女男即相善女適權應變孫男彧熙得熙濟熙燾熙濬熙鎔熙鎭熙餘不錄銘曰
拔類之姿需世之文宜亨而窮奈命之屯困而守操德以潤身七旬林下穩保衷赤闡美揚善後人之責玆銘于珉庸熙千億

 


●두암처사월성이공묘갈명 병서 역문

(杜庵處士月城李公墓碣銘 幷序 譯文)
-영가(永嘉) 권중환(權中煥) 찬(撰)

 

상산군(商山郡) 은척(銀尺)의 두곡(杜谷) 뒷산 곤좌(坤坐)의 언덕은 옛 경주이공(慶州李公) 호 두암(杜庵) 휘 필우(弼雨) 자 문보(文甫)의 묘소이다. 예(禮)로 봐서는 마땅히 비(碑)를 세울 것이나 아직 못 세웠으니 그 아들 상선(相善)이 장차 돌을 깨서 표석(表石)을 할 때, 그 족인(族人) 준호(俊鎬) 씨가 지은 유사(遺事)를 가지고 비명(碑銘)을 나에게 청하니 슬프다, 공은 벼슬에 드러난 일도 없고 문장(文章)이 전하는 것도 없으니 무엇을 쓸까 보냐. 오직 그 심덕(心德)의 완전함과 행동의 아름다움이 실상은 벼슬을 한 사람도 따르지 못할 바 있으나 남이 알지 못한 것은 덕(德)을 숨김이라. 숨겨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옳을까,
그 유사(遺事)에 의거하여 써 가로대 경주이씨(慶州李氏)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는 윗 조상이 되며 벼슬은 사재(四宰) 시호(諡號) 정렬(貞烈)인 휘 규(揆)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휘 원림(元林)은 고려(高麗) 조정에서 뛰어났고 본조(本朝, 조선朝鮮)에 들어와 이조판서(吏曹判書) 휘 만실(蔓實)과 대사헌(大司憲) 휘 승직(繩直)이 청백(淸白)함으로 드러났고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호 지지당(知止堂) 휘 명민(命敏)이 단종(端宗)을 위해 수절(守節)하다가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화(禍)를 입은 뒤에 병조참의(兵曹參議) 증직(贈職)에 시호(諡號)를 충민공(忠愍公)이라 하고 영월(寧越) 팔충신사당(八忠臣祠堂)에 배향(配享)되다. 아들 건석(建石)은 출생한 지 석달(三個月)이라 유비(乳婢)의 덕(德)으로 화(禍)를 면하고 중부(仲父) 미민(靡敏) 적소(謫所)에서 길러 나와 공의 11대조다. 휘 영진(榮鎭), 휘 익배(益培), 휘 덕화(德和), 휘 종성(鍾聲)이 공의 고조·증조·조부 및 부가 되고 현풍(玄風) 곽사인(郭士人) 일록(一祿)의 따님이 그 모친이 된다.
고종(高宗) 신사(辛巳, 1881)에 공이 함창(咸昌) 검한리(儉汗里)에서 출생하다. 공의 용모가 우람하고 높이 빼어나고 성품이 크고 너그러우며 아이들과 노는 데도 작란을 싫어하고 배우는데도 꾸지람을 기다리지 않으며 어른을 모실 때는 시중을 삼가니 이것이 공의 본질의 아름다움이요, 재주가 민첩하고 뜻이 독실하며 글을 읽다가 글 뜻이 깊고 오묘한 대목에 이르면 반드시 이는 공이 공부에 독실함이요, 그 덕성을 잘 길러내고 그 용모를 정숙히 해서 이해(利害)로 마음을 끌 수 없고 아무리 달래도 마음이 맹동(萌動)도 많이 하니 의리의 판단과 사물에 응하는 것이 법이 있으니 이것은 공의 행동에 굳셈이 있음이요, 집이 가난해서 맘껏 배울 수 없고 몸이 벼슬길에 올라 입신양명(立身揚名) 못 할 바에는 경제로 집을 일으킴이 나의 직분이라 하고 이에 몸소 갈고 심고 검소하고 절약해서 부모가 있을 때는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고 부모가 별세하면 슬픔을 다하며 선조의 분묘(墳墓)를 실전(失傳)하매 의리상 단(壇)을 모아야 한다고 아들에게 가르쳐서 그 뜻을 이어 이를 성사토록 하니 이는 공이 부모를 섬기고 조상을 받드는 정성을 다함이라. 위에 몇 가지로 족히 공이 평일 행한 바와 배운 바를 보는 것 같고 당시 명현(名賢) 두곡(杜谷) 남형원(南亨元)과 우송(友松) 이강세(李康世), 석포(石浦) 류갑형(柳甲馨) 같은 분이 가장 마음으로 사귄 벗이 다 세상을 만난 것이 옛이 아니라 옥이 티끌에 모이고 난초가 골짜기에서 시들었으니 아깝도다.
배(配)는 경주김씨(慶州金氏) 종수(宗洙)의 따님이니 공보다 먼저 졸하니 묘소가 내서(內西) 신촌(新村) 축좌(丑坐) 언덕에 있다. 1남 1녀를 생하니 남은 상선(相善)이요, 따님은 권응섭(權應變)에 출가했고 손자에 욱희(彧熙)·득희(得熙)·제희(濟熙)·도희(燾熙)·준희(濬熙)·용희(鎔熙)·진희(鎭熙)고 나머지는 다 기록 못 하고 명왈(銘曰)
동방에 빼어난 인품과 세상에 쓰일 문학(文學)이 마땅히 형통해야 할 터인데 곤궁(困窮)하게 마치니 운명의 기구함이요, 곤궁(困窮)하면서 조행(操行)을 지키고 덕(德)으로 몸을 윤택게 하니 70년 산림(山林)에서 온전히 적심(赤心)을 보호하니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착한 것을 포양(褒揚) 하는 것은 뒷사람 책임이라, 이 비(碑)에 새겨서 천억(千億)에 비치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