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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10세손 오천공 이경혁] 鰲川公家狀(오천공가장)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3. 16:12

□판사공(判事公) 10세손 오천공(鰲川公) 이경혁(李暻赫)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②연와공(蓮窩公) 말손(末孫) → 3世孫 유경(有慶) → 4世孫 ①선공감공(繕工監公) 순년(舜年) → 5世孫 ②화남공(華南公) 여격(汝格) → 6世孫 系子 동지중추부사공(同知中樞府事公) 춘영(春榮) → 7世孫 ①인담공(林潭公) 희백(希白) → 8世孫 ②쌍오당공(雙梧堂公) 처인(處仁) → 9世孫 ③동옥(東玉) → 10世孫 ①오천공(鰲川公) 경혁(暻赫)

 

 

鰲川公家狀(오천공가장)
-曾孫(증손) 衡雨(형우) 述(술)

 

公姓李諱暻赫字聖彦號鰲川慶州人鼻祖諱謁平新羅開國佐命元臣遠祖諱之秀麗季金紫光祿三重大匡尙書左僕射月城君迄我 朝簪組相襲歷數世有諱思剛吏曹參議是生諱末孫官主簿贈參議是生諱有慶奉常寺奉事是生諱舜年監役是生諱汝格縣監即公五代祖也高祖諱春榮官同樞贈右尹曾祖希白參奉祖諱處仁號雙梧考諱東玉妣全州崔氏日柱女 英廟癸亥三月二十六日生公于南原府西林村自少志操寡儔才行不覊以明德進善爲入學之墓孝友敦睦爲修齊之本事親家雖貧窶無闕滫瀡之供以養其志常不離側爬癢臥起咸適其宜祭先必誠必敬薦其精禋明發不寐佛然有羹墻之墓與兄弟和樂怡怡常切孔懷之情居家心織筆細不改耿介之操粵自壬戌回祿之後公之從伯鴻溪公移居鴻西洞公決意南㝢誅茅于鶴城府鰲山村列植花竹㗳然靜坐每有思鄕之懷則以文酒自娛又與三四鄕老團會優遊抽黃對白押其駢儷尋行數墨玩究諸史良辰美景臨於前溪或漁或觴悠然自樂指溪而名曰鰲川儕友以此因號鰲川居士也丁酉申公應周揬廉本道時聞公儀表有古君子風遂以一過旅諮訪見其操雅歎曰以子之高朋不求聞達㝢志於山水隱而无憫者是謂玉韞積而蘭猗谷也因爲莫逆盤徊屢月契會益切臨歸贈詩曰千里照心同苦樂一年留別豈疎親以一僮一馬表情公之見重於士林可想而至於臨訣戒諸子曰吾家所望者汝曺勤學立身振先世之餘蔭遂以終乃 純祖丁丑六月十九日也葬于德洞店峴匏谷負壬之原配淸州韓氏世白女生四男二女男長光郁次光顯次光淳次光喆女長水原白思弘次坡平尹宗一光郁配高靈金氏聖珏女生二男一女男長希達次英達女廣州安興石繼配慶州金氏雲祥女生二男長徽鍾次綦鍾光顯生二男二女男長蒔達次斗鍾女長金海金軾萬次淸州韓秉珪光淳一男一女男秉鍾女金海金彩希光喆生一男祐鍾希達娶海州吳氏德胤女無育以從弟第二男旱雨爲繼英達生一男二女男周湖女長延安車周瓚次寧越嚴文復徽鍾號竹窩以文章德行著世而生二男四女男長衡雨次行雨女長蔚山朴載楹次東來鄭裕興次靈山辛潤赫次未及筓綦鍾生四男二女男長志雨次章雨次致雨次升雨女長密陽朴時遇次蔚山李永燦蒔達生二男長公雨次旱雨出系斗鍾生一男四女男錫雨女長坡平尹柄殷次密陽朴浩文次靈山辛淇次幼秉鍾生一男一女男殷雨女星州都裕益祐鍾生一男一女男仁雨女密陽朴道宗旱雨娶延安車氏慶輅女生一男一女男相潤女幼周湖生一男相厦衡雨生一男一女男相洙女幼志雨生三男二女男長相益次相玹次相洵女長曲阜孔壽憲次幼公雨生二男二女男長相珍次相珉女長靑松沈遠九次幼總未及筓七十餘人外曾玄孫不能校擧然則公之蔭德庇庥於來裔而然歟家君戒余曰吾方望八餘年無多先大夫卓行諱德尙未得闡揚極爲九泉之遺恨汝雖癡駭竭力廣詢母使先公懿範湮沒於世汝文誠心無憾於歸後不肖衡雨受訓辭以來惓惓服膺即從耳目之濡染不敢爲衍濫之辭以復立言君子庶乎其裁擇彦

 


●오천공가장(鰲川公家狀) 역문(譯文)
-증손(曾孫) 형우(衡雨) 술(述)

 

공은 성은 이씨(李氏) 휘는 경혁(暻赫) 자는 성언(聖彦), 호는 오천(鰲川) 경주인(慶州人)이니 시조(始祖) 휘 알평(謁平)은 신라개국(新羅開國) 좌명원신(佐命元臣)이요, 원조(遠祖)의 휘는 지수(之秀)니 고려(高麗) 말에 금자광록(金紫光祿) 삼중대광(三重大匡)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월성군(月城君)이요, 아조(我朝,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벼슬이 대로 계승하여 휘 사강(思剛)은 이조참의(吏曹參議)요, 참의(參議)가 휘 말손(末孫)을 낳으니 벼슬이 주부(主簿)로 증참의(贈參議)요, 주부(主簿)가 휘 유경(有慶)을 생하니 벼슬이 봉상시봉사(奉常寺奉事)요, 봉사(奉事)가 휘 순년(舜年)을 생하니 감역(監役)이요, 감역(監役)이 휘 여격(汝格)을 생하니 현감(縣監)이며 공의 5대조라. 고조의 휘는 춘영(春榮)이니 벼슬이 동지중추(同知中樞)로 우윤(右尹)을 받았고 증조의 휘는 희백(希白)이니 참봉(參奉)이요, 조의 휘는 처인(處仁) 호는 쌍오(雙梧)요, 고의 휘는 동옥(東玉)이요, 비(妣)는 전주최씨(全州崔氏) 일주(日柱)의 따님이니 영조(英祖) 계해(癸亥) 3월 26일에 공이 남원부(南原府) 서림촌(西林村)에서 출생하다.
어릴 적부터 뜻 가짐이 보통과 다르고 재행(才行)이 뛰어나 덕(德)을 밝히고 착한 일하는 것을 학문하는 기본으로 삼고 효우돈목(孝友敦睦)으로 수신제가(修身齊家)하는 근본으로 삼아 집이 비록 가난하나 입에 맞는 음식을 끊은 일이 없고 향상 곁을 떠나지 않아 가려운데 굵어 드리고 눕고 일어나는데 도와드리며 제사 때는 정한 음식으로 공경과 정성을 다하며 형제로 더불어서는 항상 화락이이(和樂怡怡)하여 동기의 정을 간직하고 집에 있을 때는 깨끗한 지조를 변치 아니하다. 임술년(壬戌年) 회록(回祿) 후로 공의 종백(從伯)씨 홍계공(鴻溪公)이 홍서동(鴻西洞)에 옮겨가니 공은 남쪽으로 옮기기를 결의하고 학성부(鶴城府) 오산촌(鰲山村)에 옮겨서 꽃과 대나무를 심고 고요히 앉고 때로 고향 생각이 나면 시주(詩酒)로 또 3, 4인 지방 노인과 함께 모여서 소견하고 좋은 시절 좋은 경치를 당하면 앞 시내에 나가 혹 고기도 낚고 혹 술잔도 기울여 유유히 즐기며 시내를 오천(鰲川)이라 이름 지으니 친구들이 공을 오천거사(鰲川居士)라 부르더라.
정유년(丁酉年) 신공(申公)·응주(應周) 본도(本道)를 순찰할 때 공의 의표(儀表)가 옛 군자(君子)의 풍모가 있다는 말을 듣고 나그네 모양으로 공을 찾아 그 지조가 단아함을 보고 탄식해 가로대 ‘당신 같은 밝은 인사가 영달(榮達)을 구하지 않고 산수(山水) 간에 뜻을 두어 즐거이 자적하니 옥(玉)이 깊은 산에 묻혔고 난초가 깊은 산골에 피었음과 같다’ 하고 막연한 교분을 맺고 수월 간이나 놀다가 돌아갈 때 시(試)를 주어 작별하니 그 시(詩)에 가로대 천리(千里) 밖에서도 마음이 빛이니 괴롭고 즐거움을 같이 함이요. 1년간 작별이 어찌 친하고 성을 다하라. 말 한 필과 종 한사람으로 정(情)을 표하고 가니 사림(士林)에서 공을 한층 더 중시하더라. 공이 임종에 모든 아들에게 경계해 가로대 ‘우리 집에서 오직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부지런히 배우고 출세를 해서 조상의 음덕(蔭德)을 떨치는 일이라’ 하고 운명하니 순조(純祖) 정축(丁丑) 6월 19일이라. 덕동(德洞) 점현포곡(店峴匏谷)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다.
배(配)는 청주한씨(淸州韓氏) 세백(世白)의 따님이니 4남 2녀를 출생하다. 장남에 광욱(光郁) 다음이 광현(光顯) 다음은 광순(光淳) 다음은 광철(光喆)이요, 장녀는 수원(水原) 백사홍(白思弘)에 출가, 다음은 파평(坡平) 윤종일(尹宗一)에 출가했다. 광욱(光郁)의 배(配)는 고령김씨(高靈金氏) 성각(聖珏)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생하니 장남에 희달(希達) 다음이 영달(英達)이요, 딸은 광주(廣州) 안흥석(安興石)에 출가했고 두 번째 배(配)는 경주김씨(慶州金氏) 운상(雲祥)의 따님으로 생 2남하니 장에 희종(徽鍾)이요, 다음이 기종(綦鍾)이고 광현(光顯)은 생 2남 2녀하니 장에 시달(蒔達)이고 다음이 두종(斗鍾)이고 장녀는 김해(金海) 김식만(金軾萬)에 출가, 다음 딸은 청주(淸州) 한병규(韓秉珪)에 출가했다. 광순(光淳)은 1남 1녀를 생했으며 남에 병종(秉鍾)이요, 딸은 김해(金海) 김채희(金彩希)에 출가했고 광철(光喆)은 1남을 생하니 우종(祐鍾)이라. 희달(希達)은 해주오씨(海州吳氏) 덕윤(德胤)의 따님에 장가들어 출생이 없고 종제(從弟)의 2남 한우(旱雨)를 양자(養子)했고 영달(英達)은 1남 2녀를 생하니 남은 주호(周湖)요, 맏딸은 연안(延安) 차주찬(車周瓚)에 출가, 다음 딸은 영월(寧越) 엄문복(嚴文復)에 출가했다. 휘종(徽鍾)의 호는 죽와(竹窩)니 문장(文章) 덕행(德行)으로 세상에 유명했고 2남 4녀를 출생하니 장남은 형우(衡雨)고 다음이 행우(行雨)요, 장녀는 울산(蔚山) 박재영(朴載楹)에 출가, 차녀는 동래(東來) 정유흥(鄭裕興)에 출가, 3녀는 영산(靈山) 신윤혁(辛潤赫)에 출가했고 4녀는 조몰(早歿)하다. 기종(綦鍾)은 생 4남 2녀하니 장남에 지우(志雨) 차남에 장우(章雨) 차는 치우(致雨) 차는 승우(升雨)요, 장녀는 밀양(密陽) 박시우(朴時遇)에 출가, 차녀는 울산(蔚山) 이영찬(李永燦)에 출가했다. 시달(蒔達)은 생 2남하니 장남에 공우(公雨) 다음은 한우(旱雨)니 출계하다. 두종(斗鍾)은 생 1남 4녀하니 남에 석우(錫雨)요, 장녀는 파평(坡平) 윤병은(尹柄殷) 차녀는 밀양(密陽) 박호문(朴浩文) 3녀는 영산(靈山) 신기(辛淇)에 출가했고 4녀는 어리다. 병종(秉鍾)은 생 1남 1녀하니 남은 은우(殷雨)요, 여는 성주(星州) 도유익(都裕益)에 출가했고 우종(祐鍾)은 생 1남 1녀하니 남은 인우(仁雨)요, 여는 밀양(密陽) 박도종(朴道宗)에 출가했다. 한우(旱雨)는 연안차씨(延安車氏) 경로(慶輅)의 따님에 장가들어 생 1남 1녀하니 남에 상윤(相潤)이요, 딸은 어리다. 주호(周湖)는 생 1남하니 상하(相厦)요, 형우(衡雨)는 1남 1녀를 낳으니 남에 상수(相洙)요, 여는 어리고 지우(志雨)는 생 3남 2녀하니 장남은 상익(相益)이요, 차는 상현(相玹)이며 차는 상순(相洵)이고 장녀는 곡부(曲阜) 공수헌(孔壽憲) 차녀는 어리다. 공우(公雨)는 생 2남 2녀하니 장에 상진(相珍) 차에 상민(相珉)이요, 장녀는 청송(靑松) 심원구(沈遠九)에 출가했고 차녀는 어리다. 출가 미 출가한 딸이 70여 인이요, 외증손(外曾孫) 현손(玄孫)이 너무 많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런즉 공의 음덕(蔭德)이 뒷자손의 계까지 미쳤음인가. 부친이 나를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나이 80이 가직(家職)하니 남은 날이 얼마 없는지라. 조부님의 높으신 행금과 큰 덕을 아직 드러내지 못하여 구천에 가도 한이 될 터이니 네가 비록 어리나 힘을 다하여 널리 물어서 조부님 아름다운 덕이 세상에 드러내면 너 아비가 죽은 뒤에도 유감이 없으리라. 내 형우(衡雨)가 훈계를 받은 뒤로 가슴에 깊이 새겨 귀와 눈에 듣고 본 것을 기록하고 감히 보태고 뺀 것 없이 적어서 뒷날 군자(君子)의 판단을 기다리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