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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8세손 쌍오당공 이처인] 雙梧公家狀(쌍오공가장)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2. 20:01

□판사공(判事公) 8세손 쌍오당공(雙梧堂公) 이처인(李處仁)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②연와공(蓮窩公) 말손(末孫) → 3世孫 유경(有慶) → 4世孫 ①선공감공(繕工監公) 순년(舜年) → 5世孫 ②화남공(華南公) 여격(汝格) → 6世孫 系子 동지중추부사공(同知中樞府事公) 춘영(春榮) → 7世孫 ①인담공(林潭公) 희백(希白) → 8世孫 ②쌍오당공(雙梧堂公) 처인(處仁)

 

 

雙梧公家狀(쌍오공가장)
–五世孫(5세손) 承雨(승우) 撰(찬)

 

公姓李諱處仁字義汝號雙梧慶州人先祖吏判諱萬實之後官主簿贈參議諱末孫之六世孫也高祖諱舜年監役曾祖諱汝格縣監王考諱春榮護軍考諱希白參奉妣南原楊氏廷南女有男諱得仁繼妣慶州金氏光遠女有男即公也公生於 肅廟辛亥九月十一日 卒于英廟丙午三月二十三日葬于金葬負巽之原配海州吳氏允執女生三男長諱東尹是生二男長諱宗赫號鴻溪是生五男長諱光運號松齋是生一男諱寅達是生二男長曰夏雨其餘內外旁支總不數矣噫公姿表魁偉文藝蘊粹八歲入小學十歲誦大學養親以孝事兄以恭與羣兒推讓棗梨使衆僕不加鞭箠手植庭梧二株曰兄第相親當如此樹則周之常棣唐之義竹吉猶今也聞者異之最樂堂金公見而愛之曰爾讀聖賢書能學聖賢道乎對曰聖賢之道俱在方冊其人存則其道存金公退稱曰此人才德必有遠器及長不赴學業遊華山勸先生門與楊副率應秀李上舍台晩諸公爲道義之交講究經義少不違慨先生嘗語人曰端雅正直一李公云志操節儉居常飮食不用侈麗之屬每朝拜廟終日時親不解衣帶玩究禮經而巳後丁考妣之憂六年居廬哀毀過節葱蒜不八口誠極禮制服闋恬然有遯世之意稱小亭於猪峴下不及世務硏極羲易自適其意而歿士林咸仰壽傳洋洋嗚呼痛哉昔在丙寅秋先大人垂涕而語曰吾年方耄雖歸無憾唯高祖考文章德孝寔賦於天而裔孫不振尙未闡揚遺集撰誌沒於灰燼文獻莫徵汝雖不才廣詢于立言君子審悉紀蹟非其述先之道歟奄忽而終乃七月十一日也小子奉訓以來憂心益悄敢構一篇以備不朽之傳焉

 


●쌍오공가장(雙梧公家狀) 역문(譯文)
-5세손(五世孫) 승우(承雨) 찬(撰)

 

공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는 처인(處仁)이며 자는 의여(義汝)요, 호는 쌍오(雙梧)니 경주이씨(慶州李氏)라. 선조의 이조판서(吏曹判書) 휘 만실(萬實)의 후손이며 주부(主簿) 증참의(贈參議) 말손(末孫)의 6대손이다. 고조의 휘는 순년(舜年)이니 감역(監役)이요, 증조의 휘는 여격(汝格)이니 현감(縣監)이요, 조부의 휘는 춘영(春榮)이니 호군(護軍)이요, 부의 휘는 희백(希白)이니 참봉(參奉)이요, 비(妣)는 남원양씨(南原楊氏) 정남(廷南)의 따님이다. 아들 득인(得仁)을 출생했고 계비(繼妣)는 경주김씨(慶州金氏) 광원(光遠)의 따님이니 1남을 출생하니 이분이 공이다.
공이 숙종(肅宗) 신해(辛亥) 9월 11일에 출생하고 영조(英祖) 병오(丙午) 3월 23일에 졸하니 금장산손(金葬山巽)의 언덕에 장사지내다. 배(配)는 해주오씨(海州吳氏) 윤집(允執)의 따님이다. 2남을 출생하니 장남에 동윤(東尹)이고 동윤(東尹)이 생 2남하니 장남에 종혁(宗赫)이니 호는 홍계(鴻溪)며 종혁(宗赫)이 5남을 출생하니 장남에 광운(光運)이니 호는 송재(松齋)며 광운(光運)이 생 1남하니 인달(寅達)이며 인달(寅達)이 생 2남하니 장남에 하우(夏雨)니 그 나머지 내외손(內外孫)이 번다(繁多)하여 다 기록지 못한다.
공은 외모가 석대하고 문필(文筆)이 도저(到底)하며 8세 때 소학(小學)을 배우고 10세 때 대학(大學)을 외우며 부모는 효성으로 받들고 형은 공순하게 섬기며 다른 아이들과는 실과(實果)로 서로 사양하며 종에게도 회초리를 대지 않으니 뜰에 오동나무 두 그루를 심으며 이르되 형제간에 서로 우애하고 친함이 이 나무와 같은즉 주(周)나라의 상체(常棣)와 당(唐)나라의 의죽(義竹)이 고금이 다름없다 하니 듣는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더라. 최락당(最樂堂) 김공(金公)이 보고 사랑에서 묻기를 네가 성현(聖賢)의 글을 읽으니 성현(聖賢)의 길을 아느냐 하니 대답해 가로대 ‘성현(聖賢)의 도(道)는 책 속에 다 있으니 그 사람이 있으면 그 도도 있나이다.’ 김공(金公)이 물어 가로대 ‘이 사람 재덕(才德)이 반드시 큰 그릇이 되리라’ 하다. 차차 장성함에 과거에는 힘쓰지 않고 화산(華山) 권선생(勸先生, 권집權潗) 문하(門下)에 들어가 양부솔(楊副率) 응수(應秀), 이상사(李上舍) 태만(台晩) 제공(諸公)으로 더불어 도의로 교분을 맺고 경서(經書)의 뜻을 서로 강론하여 게을리 아니하니 선생이 말씀하기를 ‘단아하고 정직하기는 이군(李君)이 제일이라’ 하더라 몸가짐이 절약하고 검소하여 음식은 사치한 것을 멀리하고 아침마다 사당에 배례(拜禮)하고 종일 어버이를 모셔 의관을 벗지 않고 예서(禮書)와 경서(經書)를 읽을 뿐 있으니 뒷날 양친의 상을 당함에 6년간 여막(廬幕)에 살고 슬퍼함이 정도에 지나치고 양념과 고기는 입에 넣지 않으며 정성껏 예(禮)를 맞추고 복(服)을 벗은 후 저현(猪峴) 아래 정자(亭子)를 짓고 세상사는 잊고 주역(周易)이나 연구하며 뜻대로 행동하다가 세상을 뜨니 사림이 우러러 칭송하니 오래오래 전하리라.
슬프다, 옛날 병인년(丙寅年) 가을에 선인(先人)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시기를 내 나이 90이라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오직 고조의 문장(文章) 덕행(德行)은 하늘에서 내쳤으나 자손이 못나서 조상 일을 드러내지 못하고 묵묵 유적(遺蹟)도 불타서 재가 됐으니 너는 널리 전설을 모으고 글을 찾아 얼마라도 선조의 유적(遺蹟)을 남기는 것이 자손의 도리가 아니냐 하시며 세상을 뜨시니 7월 11일이라 소자(小子)도 유언을 들은 뒤로 근심이 떠날 날이 없으니 이제 한편(一篇)을 지어서 멀리 세상에 남기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