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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5세손 화남공 이여격] 泗川縣監贈兵曹參判慶州李公墓表(사천현감증병조참판경주이공묘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2. 19:03

□판사공(判事公) 5세손 화남공(華南公) 이여격(李汝格)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②연와공(蓮窩公) 말손(末孫) → 3世孫 봉사공(奉事公) 유경(有慶) → 4世孫 ①선공감공(繕工監公) 순년(舜年) → 5世孫 ②화남공(華南公) 여격(汝格)

 

 

泗川縣監贈兵曹參判慶州李公墓表

(사천현감증병조참판경주이공묘표)
-宗后人(종후인) 李鍾醇(이종순) 撰(찬)

 

○在丁卯春南原居族人在英北走三百里請余作十四世祖蓮窩公隊道之文旣滋筆而歸之越一年又與其宗兄在洹在炫偕至復申其十一世祖泗川縣監公表石陰記曰我祖篤生於忠孝門攻苦勵精若將有爲而位不過宰縣壽不到不感寥寥三百年無得而稱焉爲後承者恨今與宗族謀竪短碣子爲其發潛闡幽以代秉筆余豈其人哉謹按其家傳小牒則公諱汝格仁廟時人筮仕宣傳官出守泗川因疾遞歸未幾月而北虜猖獗大駕入南漢公病不得出征敵愾時姪婿竹山朴公虎爲義兵將赴亂遂貽書其行陣曰忠君死國此其丈夫之當爲而余則抱奇疴不赴此難愧怍極矣使十數家僮五十斛米以助幕下幸望竭力盡誠此不過短爛隻句想像當日格忠奮義之一團氣魄何其壯矣何其烈矣不起病而卒即仁祖丙子冬也而距其生宣祖戊戌年纔三十九跡公心事可云背城一戰不畏其死骨之不收而公旣溘然竟使君父不免下城之恥吁亦慘矣以之而公事蹟獨漏於靖亂錄棹楔給復並不及焉後贈騎省之秩云公慶州人新羅開國元勳諱謁平之后羅季諱居明官至蘇判中祖屢傳諱申佑兵部侍郎又八傳諱忠堯兵部尙書諡文烈是生之秀金紫光祿大夫月城君是生揆歷事忠肅忠惠二朝楨榦王室官至參理諡貞烈配忠惠王廟庭彬彬麗史是生元林判司僕寺事是生蔓實入本朝吏曹判書公六世以上也璉川縣監扈駕功臣諱思剛號蓮窩贈參議莊陵遜位與兄南下諱末孫奉事有慶監役贈承旨諱舜年高曾祖稱而東萊鄭遇周外大夫也南原郡帶江面水鴻里麻田洞艮坐公之墓配淑夫人海州鄭氏別葬水村後丙坐系子春榮壽資嘉善同樞是生希白蔭參奉有二子得仁號華山處仁號雙梧堂兄弟俱有文行爲士友推重玄以下及至后孫昌大而多賢俊維持門戶於湖南等地無非公德蔭攸暨也耶嗚呼今去公之世三百有餘年人有說當年建虜事葬不抱腕增氣願欲一洗山河之恥而若能讀公此書則倍切曠世之感繼有淚下者矣余亦彜衷攸格樂爲之說而書之牽連俾刻于石陰云

 

戊辰仲春下澣日 宗后人 李鍾醇 撰

 


●사천현감증병조참판경주이공묘표 역문

(泗川縣監贈兵曹參判慶州李公墓表 譯文)
-종후인(宗后人) 이종순(李鍾醇) 찬(撰)

 

지나간 정묘년(丁卯年, 1987년) 봄에 남원(南原)에 사는 족인(族人) 재영(在英)이 북(北)으로 3백 리를 달려와 나에게 14세조 연와공(蓮窩公)의 묘문(墓文)을 지어달라 정하므로 이미 지어서 찾아갔는데 1년을 지내어 그 종형(宗兄) 재원(在洹)·재현(在炫)으로 더불어 와서 다시 그 11세조 사천현감공(泗川縣監公)의 묘표음기(墓表陰記, 비석 후면 새김)를 거듭 부탁하여 이르기를 ‘우리 선조께서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낳으시어 공부에 독실(篤實)하고 행검(行檢)을 힘써서 장래에 큰 기망(冀望)이 있었는데 지위가 현감(縣監)에 지나지 못하고 수명도 불혹(不惑, 40 공자께서 四十而不感에서 온 말)에 이르지 못하여 3백 년 동안에 적막하여 아무런 일컬어짐이 없으니 후손이 된 자로는 한스러움이 심하므로 병필(秉筆, 학문과 덕망이 있어서 남의 글을 맡아 짓는 사람)이 대신하여 주오’하니 내가 어찌 그럴 사람이 되리오.
삼가 집안에 전해오는 작은 보첩(譜牒)을 안찰(按察)하여 본즉, 공은 인조(仁祖) 때 어른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사천현감(泗川縣監)이 되었는데 질병으로 인하여 체직(遞職)하고 돌아오자 몇 달이 안 되어 만주(滿洲)에 오랑캐가 쳐들어오매 왕(王)의 행차가 남한(南漢)으로 피난했다. 공이 병 때문에 출정(出征)하여 분개심(憤慨心)을 풀지 못하였는데 이때 공의 질서(姪壻) 죽산박공(竹山朴公) 호(虎)가 장차 난리에 따라갔다가 드디어 그 행진(行陣)에 편지를 보내어 이르되 ‘임금한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음은 이것이 대장부로 당연히 할 일인데 나는 죽을병이 들어 이 난리에 따르지 못하니 부끄럽기 지극할 뿐이라고 하고 10 수명의 노복(奴僕)과 50섬의 쌀이 막하(幕下)에 보조하노니 다행히도 바라건대 힘과 충성을 다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단란(短爛)의 외짝 구절(句節)에 지나지 않지만, 당일에 충의심(忠義心)에 격분한 1단의 기백을 보였으니 어찌하여 그같이도 장대하며 그같이도 열렬하였던가! 인하여 병에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곧 인조(仁祖) 병자년(丙子年, 1636년) 겨울이다. 그 출생한 선조(宣祖) 무술년(戊戌年, 1598년)을 보면 나이가 겨우 39세이다.
공의 심사(心事)를 밟아보면 가히 성(城)을 등지고 한번 싸워서 (중국中國에 북지北地 왕심王諶) 이 나라가 망하게 되매 (배성일전背城一戰하여 항복하지 않고 죽었음) 그 죽은 백골도 겨두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데 공은 이미 돌아가셨고 마침내 군부(君父)로 하여금 하성(下城, 항복함)의 치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슬프고 참혹한 일이다. 이럼으로써 공의 사적(事蹟)이 유독 정란록(靖亂錄, 국란을 평정한 기록)에 누락되었으므로 도설급복(棹楔給復, 정문을 내리고 세금과 작역을 면제하는 일)이 아울러 미치지 못하였다가 후일에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하였다.
공은 경주(慶州)가 본관(本貫)이니 신라개국원훈(新羅開國元勳)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신라 말기에 휘 거명(居明)은 벼슬이 소판(蘇判)에 이르렀으니 중시조(中始祖)이고 여러 대를 내려와 휘 신우(申佑)는 병부시랑(兵部侍郎)이고 또 8대를 내려와 휘 충요(忠堯)는 병부상서(兵部尙書)이고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다. 이 어른이 지수(之秀)를 낳으니 금자광록대부월성군(金紫光祿大夫月城君)이고 이 어른이 규(揆)를 낳으시니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 두 조정을 지내며 섬기어 조정에 기둥이 되었고 벼슬이 참리(參理)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고 충혜왕(忠惠王)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고려사기(高麗史記)에 문채(文彩)가 있었다. 이 어른이 원림(元林)을 낳으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요, 이 어른이 만실(蔓實)을 낳으니 본조(本朝, 朝鮮)에 들어와서 이조판서(吏曹判書)이니 공의 6세조 이상이다. 연쳔현감(璉川縣監) 호가공신(扈駕功臣, 임금의 수레를 모심) 휘 사강(思剛)과 호가 연와(蓮窩)로 증직(贈職)이 참의(參議)이고 장릉(莊陵, 단종端宗의 능호陵號)이 손위(遜位)하매 백형(伯兄)으로 더불어 남하(南下)한 휘 말손(末孫)과 봉사(奉事) 유경(有慶)과 감역(監役)으로 증직(贈職)이 승지(承旨)인 휘 순년(舜年)은 고조·증조·할아버지·아버지이고 동래정씨(東萊鄭氏) 우주(遇周)는 외조이다.
남원군(南原郡) 대강면(帶江面) 수홍리(水鴻里) 마전동(麻田洞) 간좌(艮坐)는 공의 묘소이고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해주정씨(海州鄭氏)니 수촌(水村) 뒤 병좌(丙坐)에 별장(別葬)했다. 맏아들 춘영(春榮)은 수직(壽職)으로 가선동추(嘉善同樞)이고 아들 희백(希白)을 낳았으니 음직(蔭職)으로 참봉(參奉)이고 2자를 두었으니 득인(得仁)은 호가 화산(華山)이요, 처인(處仁)은 호가 쌍오당(雙梧堂)인데 형제가 다 같이 문행(文行)이 있어서 사우(士友)에 추중(推重) 함이 되었고 현손(玄孫) 이하는 후손에 이르도록 번창하여 어질고 준걸(俊傑)한 인재가 많이 배출하매 호남(湖南) 등지에서 문호(門戶)를 잘 유지해 오고 있으니 공의 음덕(蔭德)에 미친 바가 아님이 없다. 아! 지금에 공의 세대가 3백여 년이 지났으나 당년(當年)에 북녘에 오랑캐의 사변(事變)을 말하는 이가 있으면 주먹을 불끈 쥐며 기운을 내어 한 번 산하(山河)의 부끄럼을 씻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만일 능히 공의 이 편지를 읽은즉, 갑절이나 광세(曠世, 오랜 세대)의 감상이 간절하여 이어서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나도 또한 병이(秉彝)의 충정(衷情)이 격동하므로 말하기를 즐기어 계속하여 써서 하여금 비석 후면에 새기게 한다.
유실되어 상고할 곳이 없으니 너무도 애석하여 불초손(不肖孫)이 전일 듣고 본 것만이라도 기록하여 후세참고로 준비하노라.

 

무진(戊辰, 1988) 2월 하순 종후인(宗后人) 이종순(李鍾醇) 찬(撰)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