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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11세손 온성부사공 이희집] 穩城府使公家狀(온성부사공가장)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2. 15:12

□판사공(判事公) 11세손 온성부사공(穩城府使公) 이희집(李喜集)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①사헌부집의공(司憲府執義公) 계손(季孫) → 3世孫 ①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당(瑭) → 4世孫 의금부도사공(義禁府都事公) 이화(以和) → 5世孫 ③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 약용(躍龍) → 6世孫 ①금헌공(錦軒公) 희수(希壽) → 7世孫 ①보은현감공(報恩縣監公) 석립(碩立) → 8世孫 ①신암공(愼庵公) 억(檍) → 9世孫 증호조참판공(贈戶曹參判公) 경창(慶昌) → 10世孫 ①가애공(嘉崖公) 홍조(弘肇) → 11世孫 ②온성부사공(穩城府使公) 희집(喜集)

 

 

穩城府使公家狀(온성부사공가장)
-孫男(손남) 應鍾(응종) 述(술)

 

公月城大姓新羅開國佐命元勳諱謁平之後羅季有蘇判公麗初有兵部令麗季有金紫光祿三重大匡尙書左僕射月城君冠冕奕世 國朝有吏判諱蔓實即公十二代祖也八傳而有諱碩立縣監即公高祖是生諱檍參議即公曾祖是生諱慶昌參奉即公祖考是生諱弘肇知樞即公考也妣貞夫人南原尹氏直長就甲女 肅廟癸未七月初二日生公公諱喜集字大成年甫十歲文學夙就能盡孝友之道又篤敦睦之風一鄕咸仰及其童儀表魁偉器字軒昻可知其遠到氣像嘗曰丈夫立世當習弓馬臂挽石弓武藝超衆手摶活虎膂力絶倫久皆壯之 景廟癸卯登武科 英廟戊申初隷效力副尉宣傳官時有淸州賊屯素沙坪朝野洶洶 英廟素知公膽略 特命與禁府都事洪某往揬賊情即到素沙則賊勢猖獗不得售計公即欲赴賊洪曰忠君死國雖丈夫之當爲而以我弱入彼强不獲而先死則反爲 君主之憂必當復 奏濟師討之可矣公亦然之還秦事狀 上震怒拿八棍罰洪至杖斃公亦受杖屢度堂堂氣節見於外面因大臣所奏至承再遺之 命公出闕外以細段襄杖處一馬尺劍馳到賊陳日己昏黑賊魁方如廁公突入斷臂而復命 英廟壯而駕賞曰亂賊犯畿君民憂之義士往渠魁殲之忠哉喜集錄奮武一等功臣勳超遷都摠府經歷司僕寺內乘庚戌移訓鍊院僉正壬子丁內憂甲寅制闋後復職司憲府監察乙卯除宣傳官以 幸行時承傳 特蒙錫馬之典戊午除庇仁縣監庚申遞歸復拜司憲府監察壬戌 特授通政階內禁衛將五衛將僉知中樞府事甲子丁外艱廬墓三年哀毀踰節制闋御營摠戎兩營千摠庚午除三陟營將壬申移拜龜城府使必善治 特授嘉善階一爪仍任遞守禦千摠內禁衛將同知中樞府事戊寅以擇差 特除安興鎭節制使甲申又除穩城府使治績著一翌年乙酉七月二十五日終于館舍享年六十有三吏民號哭如喪考妣其德惠洽一境可知返櫬窆于德山郡外也金峙先塋左岡午坐之原元配贈貞夫人文化柳氏光陽縣監泳女繼配貞夫人平康蔡氏士人福胤女也噫公氣度超谷藐視大人前進可期無量門運零替階不過嘉善職止府使悲夫粤在丙子公之曾王考殉節於雙嶺之役今於戊申公立功於素沙之賊炳炳忠烈可謂是祖是孫曾王考雖有 贈族之典公則只錄勳尙未蒙 恩褒事蹟泯沒子孫之遺恨可勝言哉
噫公元配贈貞夫人文化柳氏己亥三月二十日歿初葬于本岡向子之原乙酉公歿丙戌正月某日移葬與公合窆于壙下六十步午坐原配祔右又其後甲辰十一月初四日貞夫人平康蔡氏歿乙巳正月某日祔左三位合窆矣今 上八年辛未十月初四日從堪輿之論遷窆于柳氏舊壙上一金井負丙之原嗚呼痛哉百七載之後玄和復出余小子始承顔愴感倍切又况宅兆不吉公之儼然狀貌宛若平昔上文所謂儀表魁偉器字軒昻者固得其眞而亦感乎王考之撰述實記也夫玄孫鍾追記

 

 

●온성부사공가장(穩城府使公家狀) 역문(譯文)
-손남(孫男) 응종(應鍾) 술(述)

 

공의 월성대성(月城大姓)이니 신라개국(新羅開國) 좌명원훈(佐命元勳)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요, 신라(新羅) 말기에 소판공(蘇判公)이 있고 고려(高麗) 초에 병부시랑(兵部侍郎)이 있으며 고려(高麗) 말에 금자광록(金紫光祿) 삼중대광(三重大匡)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월성군(月城君)이 있어 벼슬이 대로 부절(不絶)하더니 국조(國朝, 조선朝鮮) 때 이조판서(吏曹判書) 휘 만실(蔓實)은 공의 12대조가 된다. 또 8대를 내려와서 휘 석립(碩立)은 현감(縣監)이니 공의 고조가 되고 증조 휘는 억(檍)이니 참의(參議)요, 조의 휘는 경창(慶昌)이니 참봉(參奉)이며 고의 휘는 홍조(弘肇)니 지중추(知中樞)요,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남원윤씨(南原尹氏) 직장(直長) 취갑(就甲)의 따님이라.
숙묘(肅廟) 계미(癸未) 7월 초 2일에 공이 출생하다. 공의 휘는 휘집(喜集)이요, 자는 대성(大成)이니 나이 겨우 열 살 때 문학(文學)이 숙성하고 효우(孝友)의 도리를 능히 할 줄 알고 또 친척 간에 화목 하는 풍도가 있어 온 향중(鄕中)이 흠앙(欽仰) 하더니 십세성동(十世成童)이 돼서 인품이 위대하고 도량이 희박하여 앞날의 원대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찍이 하는 말이 ‘대장부 세상에 나서 활 쏘고 말 타는 것을 익히고 한섬 무게의 활을 당겨 무예가 뛰어나 손으로 산 호랑이를 잡는다’ 하여 과연 뛰어나니 사람들이 장하게 여기더라. 경종(景廟) 계묘(癸卯)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영묘(英廟) 무신(戊申)에 처음으로 효력부위선전관(效力副尉宣傳官) 벼슬에 나아갔더니 그때 청주적(淸州賊)이 소사평(素沙坪)에 진을 치니 나라가 흉흉한지라 임금께서 공의 간담(肝膽)과 도략(韜略)을 잘 아는지라 특명을 주어 금부도사(禁府都事) 홍모(洪某) 씨와 적정(賊情)을 염탐케 하니 공이 소사평(素沙坪)에 도착하니 적세가 창궐하여 계산할 수 없는지라. 공이 적진에 들어가고자 한데 홍씨(洪氏) 가로대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비록 대장부의 할 일이나 약한 우리가 강한 적에 뛰어들었다가 얻은 것도 없이 죽기부터 하면 도리어 임금의 심려만 끼쳐 드릴 터이니 다시 상주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는 것이 옳다 한대 공도 또한 옳게 여기어 서울로 돌아와서 사실대로 상주했더니 임금이 크게 노하사 잡아들어 곤장을 치니 홍씨(洪氏)는 곤장에 맞아 죽고 공도 또한 곤장을 여러 차례 맞았으나 당당한 기운이 얼굴에 드러나니 대신들이 임금께 아뢰어 다시 적진으로 보내게 됐다. 공이 대궐을 나와 부드러운 천으로 상처를 메고 말 한 필에 칼 한 자루를 차고 적진에 당도하니 날이 저문지라 살펴보니 적장이 변소에 가거늘 공이 뛰어들어 팔을 한쪽 잘라서 가지고 임금께 복명하니 임금이 대단히 기뻐하시며 칭찬해 가로대 ‘적이 서울 지경을 범하여 임금과 백성이 함께 걱정이더니 의사(義士)가 가서 거의 괴수(魁首)를 베었으니 충성스럽다’ 하고 분무(奮武) 일등공신(一等功臣)에 기록하고 벼슬은 뛰어올라 도총부(都摠府) 경력사복시내승(經歷司僕寺內乘)에 임명했다가 경술(庚戌)에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에 옮기다. 임자년(壬子年)에 내간상(內艱喪)을 만났고 갑인년(甲寅年) 삼년상을 마친 뒤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복직했고 을묘년(乙卯年)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임금님이 행차할 때 쓰이는 승전(承傳)으로 말을 하사하는 특별한 은전(恩典)을 받았으며 무오년(戊午年)에 비인현감(庇仁縣監)을 제수하고 경신년(庚申年)에 다시 체임(遞任)되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복직하다. 임술년(壬戌年)에 통정(通政) 계급을 받고 내금위장(內禁衛將) 오위장(五衛將)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다. 갑자년(甲子年)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삼년상을 비애 속에 마치고 복(服)을 벗은 후 어영(御營)·총융(摠戎) 두 영천총(營千摠)을 거쳐 경오년(庚午年)에 삼척영장(三陟營將)을 배명(拜命)하고 임신년(壬申年)에 구성부사(龜城府使)에 옮겨 선처로 특별히 가선(嘉善)을 받고 수어천총(守禦千摠) 내금위장(內禁衛將)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옮겼다가 특차로 안흥진(安興鎭) 절제사(節制使)에 제수되고 갑신년(甲申年)에 다시 온성부사(穩城府使)로 옮겨 치적(治績)이 제1로 뽑혔다가 이듬해 을유(乙酉) 7월 25일에 관사에서 운명하니 향년(享年)이 63이라. 관민들이 슬피 울어 부모상을 당한 것같이 하니 그 덕화(德化)가 한 지경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반구(返柩)해서 덕산군(德山郡) 외야금치(外也金峙) 선영(先塋) 왼쪽산 오좌(午坐)에 안장하다.
처음 배(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문화유씨(文化柳氏) 광양현감(光陽縣監) 영(泳)의 따님이요, 계배(繼配)는 정부인(貞夫人) 평강채씨(平康蔡氏) 사인(士人) 복윤(福胤)의 따님이다. 공은 기골이 보통사람에 뛰어나서 대인(大人)의 자질을 갖추었으니 전도가 무궁할 줄 알았더니 문복(門福)이 없는 탓으로 계급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그쳤고 벼슬은 부사(府使)에 그쳤으니 슬프다. 지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공의 증조부께서 쌍영전투(雙嶺戰鬪)에 전사(戰死)했는데 이에 공은 소사(素沙)에 적(賊)을 잡아 공을 세우니 빛나는 충렬(忠烈)은 이 할아버지에 이 손자라 하겠으나 증조부는 정려(旌閭)의 은전(恩典)을 받았는데 공은 다만 공신록(功臣錄)에 기록되고 은전(恩典)은 입지 못했으며 사적(事蹟)도 점점 없어지니 그 자손의 한을 어찌 다 할쏜가.
슬프다, 공의 원배(元配)는 정부인(貞夫人) 문화유씨(文化柳氏) 기해(己亥) 3월 20일에 졸하여 처음 장지는 본산 오좌(午坐)였는데 을유년(乙酉年) 공이 졸한 후 병술(丙戌) 정월(正月) 모일(某日)에 이장하여 공의 묘와 합폄(合窆)하다. 그 뒤 갑진(甲辰) 11월 초 4일에 정부인(貞夫人) 평강채씨(平康蔡氏)다. 죽어서 공의 묘소 왼쪽에 쓰니 3 내외 합폄(合窆)이 됐으나 금상(今上) 8년 신미(辛未) 10월 초 4일 지관의 말을 따라 류씨(柳氏) 구광(舊壙)터 위 임좌(壬坐)의 언덕으로 이장하다.
슬프다, 매 7년 뒤에 관이 다시 나와 소자(小子)가 처음으로 존안(尊顔)을 뵈니 감회가 무궁한 중 묘 터가 불길하여 공의 엄연하신 체모(體貌)가 평일과 같으니 뒤에 쓰기를 기우(氣宇)가 헌양(軒昂)하고 의표가 당당하다는 말이 사실임이 확인됐으니 증조부님 실기(實記)는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