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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11세손 온성부사공 이희집] 穩城府使公墓誌銘(온성부사공묘지명)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2. 15:21

□판사공(判事公) 11세손 온성부사공(穩城府使公) 이희집(李喜集)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①사헌부집의공(司憲府執義公) 계손(季孫) → 3世孫 ①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당(瑭) → 4世孫 의금부도사공(義禁府都事公) 이화(以和) → 5世孫 ③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 약용(躍龍) → 6世孫 ①금헌공(錦軒公) 희수(希壽) → 7世孫 ①보은현감공(報恩縣監公) 석립(碩立) → 8世孫 ①신암공(愼庵公) 억(檍) → 9世孫 증호조참판공(贈戶曹參判公) 경창(慶昌) → 10世孫 ①가애공(嘉崖公) 홍조(弘肇) → 11世孫 ②온성부사공(穩城府使公) 희집(喜集)

 

 

穩城府使公墓誌銘(온성부사공묘지명)
-承旨(승지) 金聲根(김성근) 撰(찬)
-檢閱(검열) 朴容大(박용대) 書(서)

 

公姓李諱喜集字大成系出慶州上祖新羅佐命大臣諱謁平遠祖金紫光祿尙書左僕射月城君諱之秀麗末及我朝初門墓舃奕三傳有諱蔓實吏曹判書簪組聯綿八傳有諱碩立縣監寔公高祖也曾祖諱檍丙子殉節贈兵曹參議表旌祖諱慶昌參奉贈戶曹參判考諱弘肇知樞贈戶曹判書妣貞夫人南原尹氏內贍寺直長就甲女生二男長諱喜夏嘉善府使次即公也以 肅廟癸未七月初二日生自幼能知孝友之道事親也盡其節弟兄也怡怡和樂友愛隆至及長貌傑才達專篤文學又善射藝朋儕咸推其德器以當大任期之景廟癸卯登增廣武科 英廟戊申始仕宣傳官時有淸州賊屯素沙坪朝野洶洶 英廟素知公膽略 特命與金吾郞洪某往揬賊情即到素沙則賊勢猖獗不得售計公即欲赴賊洪曰忠君死國雖丈夫之當爲而以我弱入彼强不獲而先死則反爲 君主之憂必當復秦濟師討之可也云公亦然之還秦事狀 上震怒拿入棍罰洪至杖斃公亦受杖屢度堂堂氣節益壯於外因大臣所秦至承再遣之 命公出闕外以紬段裏杖處馳到賊陳日己昏墨賊魁方如廁突入斷臂而復命英廟壯而嘉之曰亂賤犯畿君民憂之義士往斧渠魁殲之忠哉喜集錄奮武一等功臣勳超遷都摠府經歷司僕寺內乘庚戌移訓鍊院僉正壬子丁大夫人憂甲寅服闋即拜司憲府監察乙卯除宣傳官以 幸行時承傳 特蒙錫馬之典戊午除庇仁縣監庚申遞歸復拜司憲府監察壬戌 特授通政階內禁將五衛將僉知中樞府事甲子丁外艱廬墓三年哀毁踰節制闋御摠兩營千摠庚午除三陟營將壬申移拜龜城府使以善治 特授嘉善階一瓜仍任遞歸守禦千摠內禁將同知中樞府事戊寅以擇差特除安興鎭節制使甲申又除穩城府使治績著一乙酉七月二十五日終于任所壽六十三吏民號哭如喪考妣其德惠洽一境可知返櫬葬于忠淸道德山郡外也面金峙先塋左岡向子原三位合窆矣今上八年辛未十月初四日遷窆于舊壙上六十步負丙之原前後配幷祔如禮元配贈貞夫人文化柳氏縣監泳女系配貞夫人平康蔡氏士人福胤女俱無育取從伯喜元弟三男彦佑爲嗣武科司圃署別提別提男應鍾應鍾男浚瑞浚瑞男泰炯今邊地泰炯男在頀今司果在頀男鳳鍵幼內外旁支幷未及筓總六十餘人噫公姿稟卓異氣節英邁早通經史又涉兵家當亂賊之時雖以百騎千兵猶難輕赴公獨挺身以匹馬尺劔一揮斬魁者都是忠與膽也屢蒙恩綸歷典州郡俱有治績至於返櫬吏民號哭者亦其淸與簡也以若文武之才止於宰守之職實謂愈矣然公之一心忠於上洽於下爲法於後世豈不美歟盛歟銘曰
歲在黃猿雲陳素沙公獨勇赴一劔揮之鳳闕受恩麟閣記功宰郡守鎭德惠大治勇昔孫吳政今杜召如何癸生條爾乙年返櫬載路號哭吏民桑棆某邱松栢故山百有七載棺和復見白羊建猪五世承顔德何不稱慶必有餘雞林玉樹枝葉蕃茂

 


●온성부사공묘지명(穩城府使公墓誌銘) 역문(譯文)
-승지(承旨) 김성근(金聲根) 찬(撰)
-검열(檢閱) 박용대(朴容大) 서(書)

 

공의 성은 이(李)요, 휘는 희집(喜集)이며 자는 대성(大成)이니 본관은 경주(慶州)라.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이요, 증조는 금자광록(金紫光祿)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니 고려(高麗)말과 아조(我朝, 조선朝鮮) 초에 문호(門戶)가 혁혁(奕奕)하여 3대를 내려와 휘 만실(蔓實) 이조판서(吏曹判書)로 벼슬이 대대로 이어져 8대를 내려와 휘 석립(碩立)은 현감(縣監)이니 공의 고조가 되고 증조의 휘는 억(檍)이니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순절(殉節)하여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증직(贈職)받고 정려(旌閭)를 표양(表揚) 받았고 조의 휘는 경창(慶昌)이니 참봉(參奉)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贈職) 받았고 고의 휘는 홍조(弘肇)니 지중추(知中樞)로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증직(贈職)받았다.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남원윤씨(南原尹氏)니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 취갑(就甲)의 따님이다. 2남을 생하니 장남의 휘는 희하(喜夏)니 가선(嘉善)으로 부사(府使)요, 다음은 공이니 숙묘(肅廟) 계미(癸未) 7월 초 2일에 출생하다.
어릴 때부터 능히 효도하고 우애하는 도리를 알아서 어버이를 섬기는데 그 효를 다하고 형제간에는 항상 화목을 유지하여 우애가 지극하였고 모습은 영결하고 재주는 영민하여 문학을 독실히 하고 또 활 쏘는 무(武)에는 능동하니 친구와 벗들이 ‘그 큰 재목이라 장차 큰일을 하리라’ 하더니 경묘(景廟) 계묘(癸卯)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영묘(英廟) 무신(戊申)에 처음으로 선전관(宣傳官) 벼슬을 하니 그때 청주적(淸州賊)이 소사평(素沙坪)에 진(陳)을 쳐서 온 나라가 흉흉한지라 임금이 공의 담략(膽略)을 아는지라 명을 내려 금오랑(金吾郞) 홍모(洪某)와 함께 가서 적정(賊情)을 탐지하라 하여 소사(素沙)에 이른 측적세(則賊勢)가 창궐하여 탐지할 수 없어 적진에 들어가고자 한데 홍씨(洪氏)가 말하기를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위하여 죽는 것은 대장부에 할 일이나 약한 우리가 강한 적진에 들어갔다가 얻은 것은 없고 죽기만 하면 도리어 임금님에 걱정만 끼쳐 드리는 게 아니냐. 다시 임금께 말씀드려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적을 치는 것이 옳다.” 한대 공도 또한, 그렇게 여겨 돌아와서 임금께 보고하니 임금이 대노하사 잡아들여 곤장을 치니 홍씨(洪氏)는 죽고 공도 여러 차례 맞았으나 기골이 당당하여 더욱 씩씩하게 보이니 대신들이 주청하여 적진에 다시 가라는 명령이 내렸다.
공이 대궐을 나와 고운 천을 구하여 상처를 매고 달려 적진에 가니 날이 벌써 저문지라 적의 괴수(魁首)가 마침 변소에 가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 적장의 한쪽 팔을 끊어 가지고 와서 복명(復命)하니 영종(英宗) 임금이 크게 칭찬하여 왈 “난적(亂賊)이 서울 지경을 범하여 군민(君民)이 근심했는데 의사(義士)가 한번 가서 적괴(賊魁)를 배어오니 충신이로다” 하고 분무(奮武) 1등공신(一等功臣)에 기록하고 벼슬을 올려서 도총부(都摠府) 경력사복시내승(經歷司僕寺內乘)으로 옮겼다가 경술년(庚戌年)에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으로 옮기다.
임자년(壬子年)에 모친상을 당한 뒤 갑인년(甲寅年)에 복(服)을 벗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복직했다가 을묘년(乙卯年)에 선전관(宣傳官)에 배명(拜命)하니 임금이 행차할 때 승전(承傳)으로 말을 하사받았고 무오년(戊午年)에 비인(庇仁) 현감(縣監)이 됐다가 경신년(庚申年)에 다시 돌아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된다. 임술년(壬戌年)에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 계급으로 내금장(內禁將) 오위장(五衛將)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갑자년(甲子年)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해 3년여묘(三年廬墓)에 애훼탈상(哀毁脫喪)하고 복이 끝난 뒤 어영(御營)·총윤(摠戎) 두 영천종(營千摠)이 되고 경오년(庚午年)에 삼척영장(三陟營將)이 됐다가 임신년(壬申年)에 구성부사(龜城府使)를 배명(拜命)하여 선정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특별제수(特別除授)받고 과만(瓜滿)을 맞추고 안흥진절제사(安興鎭節制使)가 되었다가 갑신년(甲申年)에 다시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치적이 제1이더니 을유년(乙酉年) 7월 25일에 임지(任地)에서 별세하니 향년(享年)이 63이라. 인민(人民)이 통곡하기를 ‘부모 죽은 것과 같이 하였다’ 하니 그 덕(德)이 1경(一境)에 덮었음을 가히 알지라. 반구(返柩)해서 충청도(忠淸道) 덕산군(德山郡) 외야면(外也面) 금치선영(金峙先塋) 왼쪽 언덕 오좌(午坐)의 언덕에 안장하니 전후배(前後配)와 3위합폄(三位合窆)이다.
초배(初配)는 정부인(貞夫人) 문화유씨(文化柳氏) 현감(縣監) 영(泳)의 따님이요, 계배(系配)는 정부인(貞夫人) 평강채씨(平康蔡氏)니 사인(士人) 복윤(福胤)의 따님이나 전후배(前後配) 모두 아들이 없어 종백(從伯)씨 희원(喜元)의 아들 언우(彦佑)을 입양(入養)하니 무과(武科)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요, 별제(別提) 남은 응종(應鍾)이요, 응종(應鍾) 남은 준서(浚瑞)요, 준서(浚瑞)남은 태형(泰炯)이니 변방수령(邊方守令)이요, 태형(泰炯) 남은 재호(在頀)니 사과(司果)요, 재호(在頀) 남은 봉건(鳳鍵)이니 어리고 내외손(內外孫) 60여 인은 어려서 성취를 아니하다.
슬프다, 공은 천품이 탁월하고 기질이 호매(豪邁)하여 일찍이 경서(經書)를 통달하고 또 병서(兵書)를 익혔더니 난적(亂賊)의 때를 만나 백기천병(百騎千兵)으로도 잡기 어려운 적을 공은 필마(匹馬)와 삼척검(三尺劍)으로 적괴(賊魁)를 잡은 것은 도시 충심과 담력이라. 여러 번 은전(恩典)을 입어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렸으나 번번이 치적이 뛰어났고 사후 반구(返柩)할 때 이민(吏民)들이 애통한 것은 덕(德)과 청한대 있음이라. 공과 같은 문무지재(文武之才)로 겨우 군수(郡守), 부사(府使)에 그치니 운명이라고 보나, 공의 일평생 마음이 위에 충성하고 아래를 사랑하며 후세에 모범이 되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명왈(銘曰)
갑신년(甲申年)에 적(賊)이 소사(素沙)에 진을 치다. 공이 혼자 뛰어가니 한칼에 적괴(賊魁)를 베이다. 나라에 은전(恩典)을 받아 기린 각(閣)에 이름이 기록된다. 군수(郡守)와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면서 덕혜정치(德惠政治)를 했다. 용맹은 옛날 손빈(孫臏)·오기(吳起)와 같고 정치는 두연련[杜詩] 소신신(召信臣)과 같다. 계미년(癸未年)에 나서 을유년(乙酉年)에 별세한단 말인가. 반구(返柩)하는 길목에 관민(官民)이 통곡이라, 고향산천(故鄕山川)이요, 선영지하(先塋地下)라, 백칠 년 만에 관을 열고 승안(承顔) 하니 신미년(辛未年) 10월이라. 5대 만에 승안(承顔) 하니 어찌 덕(德)이 아니라 할쏘냐. 경사는 반드시 남음이 있도다. 숲과 같고 나무 같은 자손은 가지와 잎이 길이 무성하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