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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11세손 온성부사공 이희집] 穩城府使李公遷窆壙誌(온성부사이공천폄광지)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2. 15:30

□판사공(判事公) 11세손 온성부사공(穩城府使公) 이희집(李喜集)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①사헌부집의공(司憲府執義公) 계손(季孫) → 3世孫 ①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당(瑭) → 4世孫 의금부도사공(義禁府都事公) 이화(以和) → 5世孫 ③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 약용(躍龍) → 6世孫 ①금헌공(錦軒公) 희수(希壽) → 7世孫 ①보은현감공(報恩縣監公) 석립(碩立) → 8世孫 ①신암공(愼庵公) 억(檍) → 9世孫 증호조참판공(贈戶曹參判公) 경창(慶昌) → 10世孫 ①가애공(嘉崖公) 홍조(弘肇) → 11世孫 ②온성부사공(穩城府使公) 희집(喜集)

 

 

穩城府使李公遷窆壙誌(온성부사이공천폄광지)
-蔡進永(채진영) 撰(찬)

 

此李公墓也公墓在德山縣金峙玄孫泰炯從堪輿之論辛未秋移窆於舊壙上六十步負丙之原吁泰炯善繼人之志也先是公墓葬於此百有七載不遑有經紀之會今泰炯慨然起義衆獨斷克竣大事豈泰炯一人之意也實先靈黙誨也及其啓扃宅兆不利灾害不無果叶堪輿之論宗族賓容以禮賻贈者衆余亦臨壙而吊泰炯屬余作隧道文於公爲葛誼何敢推辭按公諱喜集字大成慶州人新羅太師諱謁平高麗金紫光祿三重大匡月城君諱之秀之後 國朝有諱思剛吏曹參議寔公十代祖也高祖諱碩立蔭仕報恩縣監曾祖諱檍丙子節臣贈兵曹參議祖諱慶昌承仕郞康陵參奉贈戶曹參判考諱弘肇知中樞府事以子原從勞贈戶曹判書例兼知義禁妣貞夫人南原尹氏內贍直長就甲女公生於肅廟癸未登武科內以淸顯外以屢郡乙酉卒於穩城任所公生而有志㮣如天馬之長鳴秋鷹之整翮不可以駕馭而束縳也少而學業大就語一義事眉間輒栩栩然及壯激昻不羣衤+某量奇偉時或蹙蹙有燕幼筋骨風勁弓鳴之志當戊申西原土非之亂立功於素沙之役叅奮武原從功臣一等勳然此惟公之未展驥步之歎也噫公以名門後裔抱文武之才宜其大受而官細義高有立不易方之象矣有周之西序琬琰以訓文也東方垂竹以訓武也如公兼數器合置聖主之左右可以爲國容乎配贈貞夫人文化柳氏光陽縣監泳女繼配貞夫人平康蔡氏士人福胤女俱無育取從伯喜元第三男彦佑爲嗣官司圃別提玆後雲仍蕃昌有碩果不食之理

 


●온성부사이공천폄광지(穩城府使李公遷窆壙誌) 역문(譯文)
-채진영(蔡進永) 찬(撰)

 

이는 이공(李公)의 묘소라. 공의 묘가 덕산현(德山縣) 금치리(金峙里)에 있었는데 그 현손(玄孫) 태형(泰炯)이 지관(地官)의 말을 따라 신미년(辛未年) 가을에 구광(舊壙)터 60보 위에 병좌(丙坐)의 산에 이장하니 가상하다. 태형(泰炯)은 나의 뜻을 잘 이었도다. 원래 공의 묘에 이곳에 안장했으니 107년 동안 이장할 여유가 없다가 태형(泰炯)이 의심을 발휘하여 매사를 독단하고 대사를 준공하니 이 어찌 태형(泰炯) 한 사람의 힘이리오. 선대 혼령이 도우심이리라. 구묘(丘墓)를 여니 터가 불길해서 재해도 없지 않았고 과연 풍수설이 맞는지라. 종족(宗族)과 빈객(賓容)이 부의를 내서 일을 도울새 나도 조문을 하러 갔더니 태형(泰炯)이 나에게 묘지 글을 부탁하니 나와는 연사 관계가 있는지라 감히 사양하리오.
공의 휘는 휘집(喜集)이요, 자는 대성(大成)이니 경주인(慶州人)이라. 신라(新羅) 태사(太師) 휘 알평(謁平)과 고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 월성군(月城君) 휘 지수(之秀)의 후손이요, 국조(國朝, 조선朝鮮) 때 사강(思剛)은 이조참의(吏曹參議)니 공의 10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석립(碩立)이니 음직(蔭職)으로 보은현감(報恩縣監)이고 증조의 휘는 억(檍)이니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절신(節臣)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증직(贈職) 받았고 조의 휘는 경창(慶昌)이니 승사랑(承仕郞)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贈職) 받았고 고의 휘는 홍조(弘肇)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아들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호조판서(戶曹判書)에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증직(贈職) 받았다.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남원윤씨(南原尹氏)니 내섬직장(內贍直長) 취갑(就甲)의 따님이다.
공이 숙묘(肅廟) 계미년(癸未年)에 출생하여 무과(武科)에 급제 후 내직(內職)으로 청직(淸職)·현직(顯職)을 두루 거쳤고 외직(外職)으로 여러 군을 출제하고 을유년(乙酉年)에 온성부(穩城府) 임소(任所)에서 순직하다. 공이 나면서 지개(志槪)가 있어 용마(龍馬)가 길게 우는 것 같았고 가을하늘에 기러기가 날개를 펼치는 것 같아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보이더니 학업이 대성해서 의리 있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장년(壯年)이 됨에 도량이 크고 기특해서 큰 뜻을 가졌더니 무신년(戊申年)에 서원(西原) 토비(土非)의 난이 일어나 소사(素沙)에서 공을 세우니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훈(一等勳)에 참여했으나 공의 포부를 다 펴보지 못한 탄식이 있다.
슬프다, 공의 명문후예(名門後裔)로 문무(文武)의 재주를 가졌으니 마땅히 큰 자리를 차지할 터인데 벼슬은 낮고 의리는 높아 주(周)나라의 서서(西序)에서 문을 가르치고 동방(東方)에서 무(武)를 가르쳤으니 공은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했으니 성주(聖主)에서 좌우에서 보필했다면 나라에 동양에 되었을 것이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문화유씨(文化柳氏)니 광양현감(光陽縣監) 영(泳)의 따님이요, 계배(繼配)는 정부인(貞夫人) 평양채씨(平康蔡氏)니 사인(士人) 복윤(福胤)의 따님이나 전후배(前後配)에 다 아들이 없어 종백(從伯)씨 희원(喜元)의 3남 언우(彦佑)를 입양(入養)하니 관官)이 사포별제(司圃別提)라. 이 뒤로 자손이 번창하여 큰 과일의 씨는 과일이 나도록 하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