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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11세손 자산부사공 이희하] 慈山府使公家狀(자산부사공가장)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2. 14:39

□판사공(判事公) 11세손 자산부사공(慈山府使公) 이희하(李喜夏)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①사헌부집의공(司憲府執義公) 계손(季孫) → 3世孫 ①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당(瑭) → 4世孫 의금부도사공(義禁府都事公) 이화(以和) → 5世孫 ③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 약용(躍龍) → 6世孫 ①금헌공(錦軒公) 희수(希壽) → 7世孫 ①보은현감공(報恩縣監公) 석립(碩立) → 8世孫 ①신암공(愼庵公) 억(檍) → 9世孫 증호조참판공(贈戶曹參判公) 경창(慶昌) → 10世孫 ①가애공(嘉崖公) 홍조(弘肇) → 11世孫 ①자산부사공(慈山府使公) 희하(喜夏)

 

 

慈山府使公家狀(자산부사공가장)
-玄孫(현손) 南柱(남주) 撰(찬)

 

公諱喜夏字英叔姓李系慶州鼻祖諱謁平新羅太師中祖諱申佑麗初兵部侍郎國朝 太宗朝吏判諱蔓實之后冠冕相禪縣監碩立贈參議檍參奉贈戶參慶昌知樞贈戶判弘肇即公之高曾祖禰也妣貞夫人南原尹氏直長就甲女 肅廟甲戌閏五月初九日生配贈貞夫人密陽朴氏進士暻女再配贈貞夫人安東金氏胤福女三配貞夫人金海金氏五元女噫公狀貌魁傑英姿儁爽其在齠齡屹然有大人風致稍長行篤忠孝才全文武望之若鵬摶六月之扶揺卓乎如驥展千里之長楸逮乎 英廟己亥一擧輒中內而屢選淸顯外而歷典州郡聲譽籍甚名公巨卿皆以國器重之當其出宰孟山政惠洽境觀察宋公寅明篤良狀聞 批曰治績己多極爲可尙公廨之新建軍器之修補極出夥然 特教錫馬之典㪅加周年實是 聖朝闡揚之恩渥而其後移除雲峯損官廩補三政之大輸家貲恤七邑之窮萬口甘棠雙碑鋼鐵至於遞歸之日村翁野老願留遮路競進蔬果曰廉公之蜀郡旣聞五袴之謠劉公之會稽何謝一錢之選如是滯遲朝發行部不出一舍之地然則公之德惠不可以文墨盡記且莅慈山之府陽春有脚烟花滿面功勒金石名播口碑鳴呼痛哉天不遺慦癸酉七月十五日竟卒于官返櫬葬于德山金峙楸下坤坐原邑民慕之每月朔望遺吏賻奠三年如一苟非德湥人髓之混則千里關道豈有此惓惓之誠歟公以簪纓世族德蔭振覆公之弟曰喜集亦以忠勇之才錄奮武功臣以守於穩城化洽一境公之男曰彦培宰於遂安謠登四鄰世稱忠孝兩全之家由此想之盡襲庭訓不墜其先烈而然之耶余雖不肖僭不自量略記以備焉

 


●자산부사공가장(慈山府使公家狀) 역문(譯文)
-현손(玄孫) 남주(南柱) 찬(撰)

 

공의 휘는 희하(喜夏)요, 자는 영숙(英叔)이며 성은 이씨(李氏)요, 관은 경주(慶州)니 신라태사(新羅太師) 알평(謁平)이 시조(始祖)가 되고 고려(高麗) 초 병부시랑(兵部侍郎) 휘 신우(申佑)가 중조(中祖)가 되며 국조(國朝, 조선朝鮮) 태종조(太宗朝) 이판(吏判)을 지낸 휘 만실(蔓實)의 후손이라. 벼슬이 서로 이어서 현감(縣監) 석립(碩立)과 증참의(贈參議) 억(檍)과 참봉(參奉)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贈職) 받은 경창(慶昌)과 지중추(知中樞)로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증직(贈職) 받은 홍조(弘肇)는 공의 고조·증조·조부와 아버지라.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남원윤씨(南原尹氏)니 직장(直長) 취갑(就甲)의 따님으로 숙묘(肅廟) 갑술(甲戌) 윤 5월 초 9일에 출생하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니 진사(進士) 경(暻)의 따님이요, 계배(繼配)는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安東金氏) 윤복(胤福)의 따님이요, 세 번째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니 오원(五元)의 따님이다.
공은 상모(狀貌)가 영결하고 성품이 청아하여 어린 나이에도 대인의 풍모를 가졌고 크면서 충효에 독실하며 재주는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하여 바라보면 붕(鵬)새가 만 리를 나는 것 같고 기마(驥馬)가 천 리를 달리는 것 같더니 영묘(英廟) 기해(己亥)에 과거에 급제하여 내직에서 청현직(淸顯職)을 거쳐 외직으로 주군(州郡)을 역임하여 명성이 자자하니 벼슬하는 거물들이다. 나라에 기둥이라고 중히 여기더라. 맹산군수(孟山郡守)로 나가 선정을 폈더니 관찰사(觀察使) 송인명(宋寅明)이 어진 정치를 했다고 나라에 보고하니 나라에서 비답(批答)이 내려와 치적이 많다 하니 가상한 일이라. 관청의 새로 지은 것과 군기(軍器)를 보수한 것은 극히 잘한 일이라면서 특히 말을 하사하시고 다시 1년 임기를 더 주니 이것이 조정에서 착한 일을 포양(褒揚)하는 은전(恩典)이다. 그 뒤에 운봉(雲峯)으로 전근한 뒤에 관에 창고를 열고 집에 재물을 풀어 7읍(邑) 백성 만인을 구했으니 나중 다른 곳으로 전임되어 그곳을 떠나니 마을 늙은이와 들에 농부들까지 더 있어 달라고 길을 막고 애원하고 술과 과일을 드리며 가로대 ‘촉군(蜀郡)을 다스리던 염공(廉公)과 회계(會稽)에 유공(劉公)은 오고(五袴)와 일전(一錢)을 어찌 사양하리오’ 하고 붙드니 길이 늦어져서 아침에 떠난 것이 30리도 못 같으니 공의 은혜와 덕은 붓으로 어찌 다 기록하랴. 태평 정치를 입은 군민들은 공덕을 금석(金石)에 새기고 명성은 입으로 전하더니 하늘이 돕지 않음인지 계유년(癸酉年) 7월 15일에 관아에서 순직하니 덕산(德山) 금치(金峙)로 반구(返柩)하여 곤좌(坤坐) 터에 안장하니 읍(邑)에 백성들이 사모하여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아전(衙前)을 보내 전작(奠爵)하고 3년을 하루같이 하니 그 은덕(隱德)이 백성 골수(骨髓)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천 리나 먼 길에 이럴 수가 있을까.
공은 잠영세족(簪纓世族)으로 음덕(蔭德)이 사방에 덮여 공의 동생(喜集)이 또 한 충용(忠勇)한 재주로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수록되어 온성부사(穩城府使)로 이을 때 덕화(德化)가 부내에 골고루 덮였다. 공이 아들 언배(彦培)는 수안군수(遂安郡守)로 있을 때 백성들이 충(忠)과 효(孝) 양전가(兩全家)라고 노래하니 이로 생각할진대 가정교훈을 잘 따라 선대의 공렬(功烈)을 떨어뜨리지 아니함일진대 내가 불초(不肖)하나 참람(僭濫)되어 이 글을 써서 뒷날을 준비하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