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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공 8세손 신암공 이억] 贈兵曹參議愼庵公家狀(증병조참의신암공가장)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4. 22. 13:38

□판사공(判事公) 8세손 신암공(愼庵公) 이억(李檍)

 

【계대(系代)】 ②판사공(判事公) 이양직(李良直) → 1世孫 ①연천현감공(璉川縣監公) 사강(思剛) → 2世孫 ①사헌부집의공(司憲府執義公) 계손(季孫) → 3世孫 ①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당(瑭) → 4世孫 의금부도사공(義禁府都事公) 이화(以和) → 5世孫 ③증이조참판공(贈吏曹參判公) 약용(躍龍) → 6世孫 ①금헌공(錦軒公) 희수(希壽) → 7世孫 ①보은현감공(報恩縣監公) 석립(碩立) → 8世孫 ①신암공(愼庵公) 억(檍)

 

 

贈兵曹參議愼庵公家狀(증병조참의신암공가장)
-玄孫(현손) 彦佑(언우) 述(술)

 

公姓李諱檍字汝樑號愼庵慶州人始祖新羅太師諱謁平麗忠宣王朝 有諱揆參理諡貞烈參理生諱元林僕正僕正生諱蔓實吏判吏判生諱良直司導正司導正生諱思剛吏議吏議生諱季孫執義執義生諱瑭進士進士生諱以和都事都事生諱躍龍參奉參奉生諱希壽郡守郡守生諱碩立縣監縣監即公之考也妣淑夫人咸平鄭氏世恭女以乙卯三月十一日乃生幼有器度喜怒不形行步不忙與群兒戲物無所爭言亦無相較也性且篤行年甫六七能知養親得一美味輒以奉獻每遇新物不敢先嘗常侍親側未嘗暫離以是大爲王考所鍾愛王考或出外而未返則雖夜必返而後侍養也年旣成童體膂壯大膂力超人學業亦日就月將文章可期矣然此乃其餘事又有大焉者逐日定省常以爲度父母如有不安節則心憂色阻捨置他事急於藥餌行不正履食不甘味疾止復初及其成冠先修後齋家內嚴肅一族和睦敬以事長信以交友鄕黨咸稱孝悌以爲不下於吉之賢人君子他日所就其可量乎又明經學專主義理所言所行忠孝而巳素有大度經世濟綸可爲轉弼之才也涉獵兵書無不貫通一身之上文武兼備年未二十文名冠世逮丙子時年二十有二矣赴會禮闈竟未成實然風彩獨擅多有負笈之從者綾川具相公仁垕韓山李公兵使義培常愛公文學才略以爲大有用於 國家也隨疑必問有事輒議爲養親且講學處在德山鄕第矣不幸當虜賊犯我畿境本道兵馬方爲赴難兵使李公義培熟知公以忠義之士略如孫吳才如蕭曹忘身殉 國莫如此人以羽檄召公公方食推床辭於母夫人曰國家不幸危在朝暮而且有檄召當此之時我雖非食祿之臣古有白衣從師之人何忍愛此身命不赴 國家之急難乎此行巳決靖難之後即當歸覲遂拜辭而退謂妻曰奉養老母保護乳孩專恃於君須小心惕惕仍即發行率家僮七十各直赴于廣州雙嶺戰陣此豈非死生不苟殉 國之義素所畜積者乎是時賊勢猖獗內陷京城外援不至强弱不敵士伍褊裨一時瓦解各求述命公慷慨激勵奮罵曰上有君父下有主將爾等何其各自倫生而又不聞主將臨陣忘身之語乎遂向鄕山揮涕再拜因脫所着藍衣咋指出血書其姓名以授隨行家奴曰吾今自此永訣汝將此衣歸遺家人襁褓乳兒幸若長成留此示之以今日爲吾死之日云其日即丁丑正月三日也遂彎弓射賊發無不中於斯之間失盡勢窮賊鋒蝟集因捨弓拔劔左右揮斫奔蛇突家隨劔殲隕者不知其幾身亦數十創矣遂與主將同日隕身於戰中此乃終成殉節之義也初四日夜半馬鳴忽出於門外故出視則公之赴陣時所乘靑驄鞍頭掛血書所寫一件藍衣也馬因畫夜悲鳴不食三日而斃此非公之忠烈亦及於物耶此時家奴德金爲觀事未掛籃衣於鞍頭潜伏衆屍之間目覩公殉節之事而歸矣其時赴陳而逃命者先後而來備說當塲光景而語及公効死力戰之事未嘗不鳴咽而替歎不己也難靖後往尋公屍非但日久伊時虜賊放火焚屍形骨+玄盡灰景未收斂因以血書遺衣虛葬于德山外兆面金峙先塋左岡酉坐之原配贈淑夫人竹山朴氏挺芝女一男諱慶昌參奉贈戶曹參判參判娶則貞夫人平壤趙氏僉中慶哲女生三男四女男長諱弘肇知樞贈戶判有二男一女側室有三子二女次諱弘濟通德有二男三女次諱弘迪僉樞贈戶參有二男女礪山宋喜吉南陽洪景涵淸州韓梓南陽洪德涵內外曾玄不能盡記嗚呼公天品旣高早有遠識器度超俗臨死不苟磊磊軒天地炳揭日月此乃公忘身殉 國之大義哉

 


●증병조참의신암공가장(贈兵曹參議愼庵公家狀) 역문(譯文)
-현손(玄孫) 언우(彦佑) 술(述)

 

공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는 억(檍)이며 자는 여량(汝樑)이니 경주인(慶州人)이라.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태사(太師) 휘 알평(謁平)이요, 고려(高麗) 충선왕조(忠宣王朝)에 휘 규(揆)는 참리(參理)요, 시(諡)는 정렬(貞烈)이며 참리(參理)는 생 원림(元林)하니 복정(僕正)이요, 복정(僕正)이 생 만실(蔓實)하니 이판(吏判)이며 이판(吏判)이 생 양직(良直)하니 사도정(司導正)이요, 사도정(司導正)이 생 사강(思剛)하니 이의(吏議)요, 이의(吏議)가 생 계손(季孫)하니 집의(執義)요, 집의(執義)가 생 당(瑭)하니 진사(進士)요, 진사(進士) 생 이화(以和)하니 도사(都事)요, 도사(都事)가 생 약용(躍龍)하니 참봉(參奉)이고 참봉(參奉)이 생 희수(希壽)하니 군수(郡守)요, 군수(郡守)가 생 석립(碩立)하니 현감(縣監)이고 현감(縣監)이 곧 공의 부친이며 모친은 숙부인(淑夫人) 함평정씨(咸平鄭氏) 세공(世恭)의 따님이다.
을묘년(乙卯年) 3월 11일에 공이 출생하니 어릴 때부터 도량이 넓어 즐겁고 성내는 것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며 걸음걸이를 초망하게 않고 이웃 아이들과 놀 때도 물건 때문에 다루는 일이 없었고 성품이 매사에 독실하며 나이 겨우 6, 7세 됨에 부모님을 봉양할 줄 알아서 한가지 별미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부모님께 드리고 새로 난 음식을 맛나면 감히 먼저 입에 넣지 않고 항상 어버이 곁을 지켜 떠날 줄 모르니 이러므로 조부의 사랑을 독차지하더니 주부께서 출타하여 돌아오시지 않으면 비록 밤이 늦어도 돌아오심을 기다려 모시고 식사를 하더라. 나이 차츰 들면서 신체가 장대하고 힘이 뛰어나며 학문도 날로 발전하여 문장(文章)을 기약할지라. 그러나 그것쯤은 여사(餘事)요, 더 큰 일은 부모님께 아침저녁 혼정신성(昏定晨省)1)을 일과로 삼아 빠지는 일이 없고 부모가 편치 않으시면 만사를 제쳐놓고 약을 구하는 데 급급하고 다녀도 신을 바로 신지 못하여 음식도 달게 먹지 않았고 병환이 그쳐야 행동을 회복하더니 20이 된 뒤에는 수신(修身)을 먼저하고 제가(齊家)를 뒤에 하니 집안이 엄숙하고 친족이 화목하여 어른을 공경으로 섬기고 벗은 믿음으로 사귀니 향당(鄕黨)에 칭송이 자자하여 옛날 어진 이만 못지않다고 하더니 경서(經書)에 밝아 의리를 위주로 하고 말과 행실이 충효(忠孝)뿐이라. 본시 도량이 커서 세상을 경륜(經綸)함에 성군(聖君)을 보필할 재목이 되는 중에 병서(兵書)를 읽어 무불(無不) 달통(達通)하니 일신상에 문무(文武)가 겸전(兼全) 하더니 병자년(丙子年)을 당하여 나이 22세라 과장(科場)에 나갔다가 합격은 못 했으니 풍모가 탁월하고 학문이 유여하여 책을 짓고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정승(政丞)에 능천(綾川) 구인후(具仁垕) 씨와 병사(兵使) 한산이공(韓山李公) 의배(義培)는 공의 학문(學文)과 재주를 아끼고 사랑하여 장차 나라에 크게 쓰일 일이 있다 하여 서로 논의하고 상종하더니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오랑캐가 우리 서울을 침범함에 본도(本道)의 군사들이 구원병으로 서울을 향해 떠날새 병사이공(兵使李公) 의배(義培)가 공의 충의지심(忠義之心)과 도략(韜略)은 손빈(孫殯)·오기(吳起)와 같고 재주는 소하(蕭何)·조참(曹參) 같은 것을 익히 알고 또 자기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할 사람은 공만 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여 공을 부르니 그때 공이 조식 상을 받았다가 상을 밀고 일어나 모친께 작별하여 가로대 ‘국가가 불행하여 위태함이 조석에 있사옵고 또 저를 부르니 내 비록 녹을 먹는 신하는 아니나 옛적에도 백의종군(白衣從軍) 한 사람이 있었으니 어찌 한 몸을 생각하고 나라 위태함을 모른 체하오리까. 마음에 결정을 받으니 난리가 평정되면 와서 뵈오리다’ 하면서 절하고 떠날새 부인에게 일러 가로대 늙으신 어머님을 잘 봉양하고 어린 아들을 잘 키워달라 부인만 믿고 간다면서 가동(家僮, 집종) 70명을 거느리고 바로 광주쌍령(廣州雙嶺) 싸움터로 달려갔으나 이것이 어찌 사생(死生)을 초월하여 나라만을 위하는 충의지심(忠義之心)이 아닐까.
적세(賊勢)가 너무 창궐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구원 오는 군사가 없으니 강약(强弱)이 적수가 되지 않은지라 장병과 사졸이 일시에 무너지니 각자 살기 위하여 도망치거늘 공이 분개하여 도망가는 자를 꾸짖어 가로대 ‘위로 군부(君父)가 있고 아래로 주장(主將)이 있거늘 너희들 어찌 마음대로 도망치냐’ 하면서 눈물을 뿌리며 입었던 옷을 벗어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이름을 쓰고 따라온 종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길로 죽을 테니 너는 이 옷을 가지고 집에 갖다주고 강보(襁褓)에 있는 어린 것이 잘 자라거든 이 옷을 보이고 오늘로 나 죽는 날로 삼으라 하니 그날이 정축년(丁丑年) 정월(正月) 초 3일이다.
활을 당겨 쏘니 맞은 적은 쓰러지나 나중에 화살이 떨어지고 적의 칼날이 닥쳐오니 공이 활을 버리고 칼을 빼 좌우충돌(左右衝突)하니 칼에 맞아 죽는 자 부지기수라 그러느라 공도 수십 곳 창과 칼에 찔려 주장(主將)과 함께 전쟁터에서 죽으니 이 어찌 나라를 위하여 순절함이 아니리오. 초 4일 밤에 말 우는 소리에 집에 식구들이 나가보니 공이 나갈 때 타고난 말이 안장 위에 혈서(血書) 한 통과 옷 한 벌을 싣고 온지라, 그 뒤로 밤낮 3일을 먹지도 않고 울다가 죽으니 이것도 공의 충렬(忠烈)이 짐승에까지 감동한 것이 아닌가. 그때 가노(家奴, 집종) 덕금(德金)은 공이 벗어주던 옷을 말안장 위에 얹지도 않고 시체 사이에 숨어서 공의 전사(戰死)하는 것을 확인하고 오느라 늦었고 다른 사람도 도망해 와서 공이 전사할 때 광경을 이야기하니 듣는 자 눈물을 흘리고 탄식 않은 자 없었다. 난리가 끝난 뒤 시체를 찾아가니 전사(戰死) 날이 오래됐고 적군이 시체에 불을 질렀다. 타서 시체를 찾을 길이 없어 보내는 옷 한 벌과 혈서(血書)를 덕산(德山) 외북면(外兆面) 금치(金峙) 선영(先塋) 왼편 유좌(酉坐)의 언덕에 묻고 묘를 썼다.
배(配)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죽산박씨(竹山朴氏) 정지(挺芝)의 따님으로 1남을 생각하니 휘 경창(慶昌)인데 참봉(參奉)이므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贈職) 받았고 참판공(參判公)이 증정부인(贈貞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 첨중(僉中) 경철(慶哲)의 따님에 장가들어 3남 4녀를 출생하니 장남 휘 홍조(弘肇)는 지중추(知中樞)로 호판(戶判)을 증직(贈職) 받았고 호판공(戶判公)이 생 2남 1녀하고 별실에서 생 3남 2녀하며 차자 홍제(弘濟)는 통덕(通德)이요, 통덕(通德)이 생 2남 3녀하고 다음 아들 홍적(弘迪)은 첨추(僉樞)로 증 호참(戶參)하고 호참(戶參)이 생 2남하다. 따님은 여산(礪山) 송희길(宋喜吉)과 남양(南陽) 홍경함(洪景涵)과 청주(淸州) 한재(韓梓)와 남양(南陽) 홍덕함(洪德涵)에 출가했다. 내외손(內外孫) 증손 이하는 다 기록 못 한다.
슬프다. 공은 천품이 고결하고 국량이 초범(超凡)하여 시사여귀(視死如歸)2)하니 높고 높은 기상은 천지로 배합하고 밝고 밝은 공적은 일월과 같으니 이것이 공의 내 몸은 잊고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대의라 할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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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정신성(昏定晨省) :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부모의 밤새 안부를 묻는다는 뜻으로, 부모를 잘 섬기고 효성을 다함을 이르는 말.
2) 시사여귀(視死如歸) :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죽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세보(月城君派世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