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눌재유고이홍준

[訥齋遺稿] [附錄] 附察訪公碣陰銘[幷序] (退溪李滉)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7. 15:06

눌재유고(訥齋遺稿) / 附錄


附察訪公碣陰銘[幷序] (退溪李滉)

公諱德璋。字慶簿。慶州人。新羅始祖赫居世佐命大臣謁平之後。曾祖繩直。大司憲。祖時敏。生員。考弘準。進士。公生於成化壬寅十二月十九日。少習擧業。嘗屢擧於鄕試。禮部不中。蔭補黃山道察訪。嘉靖癸未。丁外艱。服闋。爲家貧親老。求再遂祿仕計。勉赴京師。明年四月二十七日。遇病不起。享年四十二。癸未十二月十七日。葬于皆丹縣雲峯山艮坐坤向之原。公自少軒輊尙氣。不肯齷齪庸流中。其在京師日。嘗草疏。欲陳時事。已而。戒出位而止。敎子弟甚嚴。鄕里後生。亦加勸督。不以生産作業爲務。嘗稱貸以自給。公配曰豐山柳氏。進士子溫之女。工曹典書從惠之後。成化癸卯十二月二十日生。稟性閒靜。平居無疾言遽色。公歿。家益窮。猶不聽家人之歎貧曰。吾分止是。何恨焉。其訓子。以爲寧受凍餒。不可取不義之物。睦族交隣。盡心無慊。或拔貧以周急。又未嘗虛受人饋。族人有以祀事見推。柳氏無辨而行其祀惟謹曰。彼之用心如此。雖强令行之。祖考肯享之乎。數歲。其人感愧而止。其宅心精且善。皆此類也。生四男一女。男長艿。次茹。次葎。後公十餘年。相繼死。其季曰苞。己酉生員。爲 齊陵參奉。女適生員李薰。嘉靖丙辰正月十三日。柳氏歿。享年七十四。是年十二月。祔葬于公。銘曰。

月城之李。遙遙厥緖。公則是承。其儀擧擧。以充觀國。胡命之阻。試于郵官。思馬斯臧。中替求復。爲親在堂。齎志永已。旅櫬悲傷。公有賢婦。豐山茂族。淑愼其身。閨門雍穆。亦旣長育。粲粲蘭玉。喪禍仍荐。克持其家。季也至性。誠孝靡他。天之報騭。於是匪差。有崇其原。白楊號風。同其翳然。永保幽宮。


*출처: 용눌재집(慵訥齋集) > 訥齋先生遺稿 > 附錄

*참조: 한국문집총간 > 퇴계집 > 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六 > 墓碣誌銘 > 黃山察訪李公碣陰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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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집(退溪集)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文集이다.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3).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산(陶山), 본관은 진보(眞寶)이고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문묘(文廟) 및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 숙부(叔父)는 송재(松齋) 이우(李堣).


*퇴계집(退溪集). ⓒ 한국고전번역원


찰방공의 갈음명[附察訪公碣陰銘] 서문 병기
퇴계退溪 이황李滉

공의 휘는 덕장德璋이고 자는 경부慶簿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신라 시조 혁거세의 좌명대신 알평의 후손이다. 증조부 승직은 대사헌을 지냈고, 조부 시민은 생원이며 아버지 홍준은 진사이다.
공은 성화成化 임인년(1482) 12월 19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업을 익혀 일찍이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예부禮部가 실시한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고, 음보로 황산도 찰방을 지냈다. 가정嘉靖 계미년(1523)에 부친상을 당했으며, 상을 마친 뒤 집은 가난하고 어머니는 늙었기에 다시 벼슬을 구하여 드디어 어버이 봉양을 위해 벼슬을 할 계획을 하고 애써 서울로 갔다. 이듬해 4월 27일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니 향년이 마흔둘이다. 계미년(1523) 12월 17일 개단현皆丹縣1) 운봉산雲峯山 간좌곤향艮坐坤向의 터에 장사 지냈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개가 드높아서 용렬한 무리 속에서 비열한 짓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 일찍이 상소문을 지어 시사를 진술하려고 했으나 이윽고 분수에 넘는 것을 경계하여 그만두었다. 자제의 교육에 매우 엄격했고, 향리의 후생 또한 권면하고 독려하였다. 생산과 작업을 일삼지 않고 일찍이 양식을 빌려 생활하였다.
공의 부인은 풍산 류씨 진사 류자온의 따님이니, 공조 전서工曹典書 류종혜柳從惠의 후손이다. 성화 계묘년(1483) 12월 22일에 태어났다. 품성이 한가롭고 고요하여 평소에 서두르는 말과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집이 더욱 곤궁하였지만, 집안사람이 가난을 탄식하는 말을 듣지 않고 “내 분수가 다만 이러한데 누구를 탓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자식을 가르침에 있어 차라리 춥고 배고픔을 당하더라도 의롭지 않은 물건을 취하지 말도록 하였다. 친족과 화목하고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며 마음을 다하여 불만이 없었다. 가난한 살림을 기울여 궁핍한 사람을 돕기도 하였고, 또 이유 없이 남의 선물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일가 사람이 제사 지낼 일이 있자 류씨柳氏에게 미루었는데, 변명하지 않고 그 제사를 행하였고, 오직 삼가면서 “저가 마음을 쓰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억지로 행하게 한들 조상이 기꺼이 흠향하시겠느냐.”라고 말할 뿐이었다. 여러 해가 지나자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면서 그만두자고 하였으니, 그 마음 씀이 자세하고 선하기가 모두 이와 같았다.
4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잉, 차남 여, 삼남 율은 공이 세상을 떠난 뒤 10년 사이에 서로 이어서 세상을 떠났다. 막내는 포이니 기유년(1549)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제릉 참봉齊陵參奉이 되었다. 딸은 생원 이훈에게 시집갔다. 가정 병진년(1556) 정월 13일에 류씨가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일흔넷이다. 이해 12월에 공과 합장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월성의 이씨는 月城之李
그 유서 멀고 길도다 遙遙厥緖
공이 이를 계승하니 公則是承
그 거동 단정하고 아름다웠네 其儀擧擧
부름받아 관직에 올랐건만 以充觀國
어찌 그리도 명이 막혔던가 胡命之阻
찰방으로 시험하니 試于郵官
마정을 잘 하였네 思馬斯臧
중간에 그만두었다 다시 구하니 中替求復
어버이가 계시기 때문이었네 爲親在堂
뜻을 품은 채 영영 그만이니 齎志永已
슬프게도 객지에서 세상 떠났네 旅櫬悲傷
공에게 어진 아내 있으니 公有賢婦
풍산의 훌륭한 일족이네 豐山茂族
몸가짐 정숙하고 신중하였고 淑愼其身
집안을 화목하게 꾸렸네 閨門雍穆
또한 이미 자식이 장성하니 亦旣長育
찬란한 난초와 옥 같도다 粲粲蘭玉
사망의 재앙이 거듭되어도 喪禍仍荐
능히 그 가정을 지탱하였네 克持其家
막내는 지극한 성품 지녀 季也至性
정성스런 효성밖에 없었네 誠孝靡他
하늘의 보답이 天之報騭
이에 그릇되고 어긋났도다 於是匪差
그 언덕 높으니 有崇其原
흰 버들2) 바람에 울부짖네 白楊號風
함께 그늘 드리워 同其翳然
길이 묘소를 보호하리라 永保幽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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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단현(皆丹縣) : 안동 북쪽 내성면 15리 되는 곳에 있다.(『退溪集考證』 卷7 「黃山察訪李公碣陰銘」)

2) 흰 버들[白楊] : 무덤가에 심는 나무의 일종으로, 전하여 무덤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눌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찰방공의 갈음명[附察訪公碣陰銘] 서문 병기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찰방월성이공묘갈명(察訪月城李公墓碣銘) 병서(幷序)
  -진안 퇴계 이황 찬(眞安 退溪 李滉 撰)

공의 휘는 덕장(德璋)이요, 자는 경부(慶簿)나 경주인(慶州人)이라.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손이며 증조는 승직(繩直)이니 대사헌(大司憲)이요, 조부는 시민(時敏)이니 생원(生員)이며, 부친은 홍준(弘準)이니 진사(進士)라.

공이 성화(成化) 임인년(壬寅年, 1482년 성종13) 12월 19일에 태어났다. 일찍부터 학업에 힘을 써서 여러 번 향시예부(鄕試禮部)에 응시했으나 합격을 못 하고 음직(蔭職)으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이 됐다. 가정(嘉靖) 계미년(癸未年, 1523년 중종18)에 부친상을 당해 퇴직했다가 복(服)을 마치고 나니 집은 가난하여 늙은 모친을 봉양하기 어려워 다시 벼슬을 구해서 서울에 갔더니 이듬해 4월 27일 병에 걸려 객지에서 뜨니 향년(享年)이 42세라.
갑신년(甲申年, 1524년 중종19) 12월 17일에 개단현(皆丹縣) 운봉산(雲峯山) 간좌곤향(艮坐坤向) 언덕에 안장했다. 공이 젊을 때부터 장부의 기상이 있어 속이 좁고 용렬(庸劣)한 무리와는 교유를 싫어하고 서울에 있을 때 상소문을 지어 모든 일을 진술하고자 하더니 친상(親喪)으로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 나왔다. 자제들을 가르침이 심히 엄했고 마을에 후학들을 위하여도 권학(勸學)하고 독려하며 생산작업(生産作業)에는 힘쓰지 않고 빌리고 갚는 것으로 자급자족(自給自足)하다.

공의 배(配)는 풍산류씨(豐山柳氏)니 진사(進士) 자온(子溫)의 따님이요, 공조전서(工曹典書) 종혜(從惠)의 후손이다. 성화(成化) 계묘년(癸卯年, 1483년 성종14) 12월 20일에 출생하나 품성(稟性)이 정숙하고 평상시에 빠른 말고 급한 기색이 없더니 공이 죽은 뒤로 집이 더욱 궁색하니 가난함을 한탄하지 않고 「내 분복(分福)이 이뿐이니 무엇을 한탄하리오」 하고 아들을 교훈하되 차라리 굶고 죽을지언정 불의에 물건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친족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사귀되 정성껏 하여 혐의 지는 일이 없으니 남이 혹 가난을 돕고 급한 일을 구해주면 공짜로 남이 주는 받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일가 사람들이 제사 일로 류씨를 헐어서 말하기를 「제사를 분별없이 지낸다고 꾸짖으며 마음 씀이 이 같으니 억지로 지내는 제사를 그 조상이 흠향(歆饗)할까?」 하더니 수년이 지난 후에 그 사람들이 부인 정성에 감회 되어 부끄러워하고 다시는 헐뜯는 알아 없었으니 그 마음가짐이 정숙하고 착함이 이와 같았다.

4남과 1녀를 두었으니 장남에 잉(艿) 이고 다음은 여(茹)며 셋째는 률(葎) 이고 끝이 포(苞)니 공이 별세 후 10년 뒤 위로 3형제가 따라 사망하고 끝인 포(苞)가 기유년(己酉年, 1489년 성종20)에 생원(生員)으로 제릉참봉(齊陵參奉)이 됐고 따님은 생원(生員) 이훈(李薰)에게 출가하다.
가정(嘉靖) 병진년(丙辰年, 1496년 연산군2) 정월 13일에 류씨(柳氏)가 별세하니 향년이 74세라. 공의 묘소에 합장(合葬)했다. 명(銘)을 지으니 명(銘)하 가로대

월성 이씨는 그 유래(由來)가 깊고 멀다. 공이 이 집에 태어나서 그 거동(擧動)이 빼어나다. 충실한 성품으로 나라에 나갔건만 명(命)이 어찌 막는고. 우관(郵官)에 응시하니 여의치 않도다. 중년에 다시 다시 벼슬을 구한 것은 어버이를 위함이라. 뜻은 가졌으나 몸이 먼저 가니 객사(客死)함이 원통하다. 어진 아내를 두었으니 풍산류씨(豐山柳氏) 화벌(華閥)이라 몸가짐이 맑고 삼가니 규문(閨門)이 화목하도다. 자녀를 길러내니 찬란한 난초(蘭草)요, 빛나는 옥(玉)이로다. 화액(禍厄)을 자주 당하니 그 짐을 보존할까. 끝 아들이 성품이 지극하니 효성이 따로 있나 하늘이 도와주니 차착(差錯)이 없으리라. 높은 언덕이 백양(白楊)이 바람에 우니 그 가려짐을 같이하면서 유궁(幽宮)을 길이 보전하리라.


*경주이씨 월성군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