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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천군 1세손 이양생] 襄平公慶州李公諱陽生祭壇碑銘(양평공경주이공휘양생제단비명)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1. 1. 22:27

□계천군(鷄川君) 1세손 양평공(襄平公) 이양생(李陽生)

 

【계대(系代)】 ①계천군(鷄川君) 이종직(李從直) → 1世孫 ②양평공(襄平公) 양생(陽生)

 

 

襄平公慶州李公諱陽生祭壇碑銘
(양평공경주이공휘양생제단비명)
-傍裔孫 仁根 謹撰(방예손 인근 근찬)

 

族人李鍾大介其族親龍濬謂仁根曰吾十六代祖鷄城君府君之墓失傳者久矣每當霜露之節瞻掃無地香奠無憑爲其子孫者悚莫甚焉今欲設壇于英陽郡靑杞面靑杞里山三番地而祭之願惠賜銘言余起賀曰韙哉是擧也失墓而不祭者世間徃徃有之而令欲設壇享之允合於神理人情則不但事係正當余亦奈在傍裔之地寧可以鹵劣辭諸公諱陽生字號俱失傳系出慶州新羅佐命大臣諱謁平諱肇祖羅末蘇判公諱居明起世之祖高麗末官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爲顯祖於公五代祖也高祖諱揆鷄林府院君諡貞烈曾祖諱元林判司僕寺事祖諱蔓實吏曹判書考諱從直以子陽生貴封鷄川君妣豐壤趙氏生公于漢城府惠登村本苐公生而氣骨長大聲音雄壯有英勇之像長而好學能通六藝善騎善射早就捕盜廳壯勇尉兵卒世祖十三年討伐李施愛亂大有戰功封敵愾功臣鷄城君兼司僕寺事西紀一四七○年成宗庚寅陞捕盜大將一四七三年成宗壬辰以討捕逆臣金末應之功陞嘉義大夫一四七六年成宗丙申討平忠州賊群大振名聲公沒後以王命賜祭禮葬諡曰襄平配貞夫人某氏生二男長泰岳戶曹判書封鷄城君贈崇政判中樞府事次金東泰岳男橚鷄興君金東男日復餘不盡收錄系之以銘 銘曰月城古宅瓢巖流芳天賦英勇早就兵丁鍊射習騎餘事文章臨戰態勢氣宇堂堂百戰百勝國家棟樑猗歟公忠何以報賞增爵封君家門益彰不幸失傳久闕奠香設壇享之郡之英陽天報以德有後蕃昌我銘于石山高水長
傍裔孫 仁根 謹撰

 


●양평공경주이공휘양생제단비명 역문
(襄平公慶州李公諱陽生祭壇碑銘 譯文)
-방예손 인근 근찬(傍裔孫 仁根 謹撰)

 

족인(族人)인 이종대(李鍾大)가 그 족친(族親)인 용준(龍濬)으로 하여 인근(仁根)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16대조이신 계성군부군(鷄城君府君)의 묘소(墓所)를 실전(失傳)한지 오래되었도다. 매양(每樣) 상로(霜露)의 이절(李節)을 당하면 보고 쓸 땅이 없어서 향전(香奠)을 드릴 바 없으니 그 자손(子孫)이 된 자 죄송하기 그지없도다. 이제 단(壇)을 영양군(英陽郡) 청기면(靑杞面) 청기리(靑杞里) 산3번지에 베풀어 제사(祭祀)하려 하노니 명언(銘言)을 혜사(惠賜)하기를 원(願)하거늘』 내 일어나 하례(賀禮)하여 가로되 『아름답다! 이 거사(擧事)여! 묘(墓)를 잃고 제사(祭祀)하지 않는 것도 왕왕(往往) 있는 일이로되. 이제 단(壇)을 베풀어 제향(祭享)을 올리려 하니 진실로 신(神)의 이치와 팔간(八間)의 정에 합하는 것인즉 다만 일이 정당한데 매일 뿐이 아니라 내 또한 욕(辱)되게 방손(傍孫)의 처지에 있으니 어찌 가히 노렬(鹵劣, 거칠고 劣等함) 함으로써 사양하리오.

 

공(公)이 휘는 양생(陽生)이오, 자호(字號)는 함께 실전(失傳)하고 계통(系統)은 경주(慶州)에 낳으니 신라좌명대신(新羅佐命大臣) 휘 알평(謁平)이 조조(肇祖)가 되고 고 신라말(新羅末)에 소판공(蘇判公) 휘 거명(居明)은 세(世)를 일으킨 조상이 되고 고려말(高麗末)에 관(官)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월성군(月城君)을 봉(封)한 어른이 현조(顯祖)가 되니 공에 5대조가 되는지라.
고조(高祖)의 휘는 규(揆)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니 시(諡)는 정렬(貞烈)이오. 증조(曾祖)의 휘는 원림(元林)이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요. 조(祖)의 휘는 만실(蔓實)이니 이조판서(吏曹判書)요. 고(考)의 휘는 종직(從直)이니 아들 양생(陽生)의 귀(貴)함으로 계천군(鷄川君)으로 봉(封)하였고 비(妣)는 풍양조씨(豐壤趙氏)라.
공을 한성부(漢城府) 혜등촌(惠登村) 본가(本家)에서 낳으시니, 공이 낳아서부터 기골(氣骨)이 장대(長大)하고 성음(聲音)이 웅장(雄壯)하여 영웅(英雄)스럽고 용맹(勇猛)한 상(像)이 있고 자람에 학(學)을 좋아하여 육예(六藝, 고대 중국 교육의 여섯 가지 과목.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가 이에 해당한다)를 통(通)하고 기사(騎射)를 다 잘하여 일찍이 포도청장용위(捕盜廳壯勇尉) 병졸(兵卒)로 나가서 세조(世祖) 13년에 이시애난(李施愛亂)을 토벌하여 크게 전공을 세워 적개공신계성군(敵愾功臣鷄城君)에 봉하였고 사복시사(司僕寺事)를 겸하였다. 서기 1470년 성종(成宗) 경인(庚寅)에는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올랐고 1472년 임진(壬辰)에는 역신(逆臣) 김말응(金末應)을 토포(討捕)한 공으로써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으며 1476년 성종(成宗) 병신(丙申)에 충주(忠州)의 적군(賊群)을 토평(討平)하여 크게 명성을 떨치더니 공이 몰(沒)한 후에 왕명으로써 제사와 예장(禮葬)을 사(賜)하시고 시호(諡號)를 양평(襄平)이라 하였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모씨(某氏)라. 두 아들을 낳으니 맞은 태악(泰岳)이니 호조판서(戶曹判書)로 계성군(鷄城君)에 봉(封)하고 숭정판중추부사(崇政判中樞府事)를 증(贈) 하였으며 버금은 금동(金東)이라. 태악(泰岳)의 아들은 숙(橚)이니 계흥군(鷄興君)이요. 금동(金東)의 아들은 일복(日復)이요. 나머지는 다 수록하지 아니하노라. 명(銘)으로써 이으니 명(銘)하여 이르되

 

월성(月城)의 옛집이요. 표암(瓢巖)이 꽃다움을 흘렸도다. 하늘이 영용(英勇)을 주셨으니 일찍이 병정(兵丁)으로 나갔도다. 사격(射擊)을 연마(練磨)하고 기마(騎馬)를 익히니 남은 일은 문장(文章)이로다. 임전(臨戰)하는 태세(態勢)가 기우(氣宇, 氣槪와 度量)가 당당(堂堂)하도다. 백번 싸워 백번을 이기니 국가의 동량(棟樑)이로다. 거룩하다, 공의 충성이여! 무엇으로서 갚아 상(賞)주리오. 벼슬을 더하고 군(君)을 봉(封)하니 가문이 더욱 나타났도다. 불행하여 실전(失傳)하였으니 오래 향(香) 드리는 것을 궐(闕)하였도다. 단(壇)을 베풀어 제향(祭享)을 올리니 곳은 영양(英陽)이로다. 하늘이 같기를 덕(德)으로써 하니 그 후손이 번창(蕃昌)하였도다. 내 돌에 명(銘)을 하니 산(山)은 높고 물은 깊도다.

 

방예손(傍裔孫) 인근(仁根)은 삼가 찬(撰)하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