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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공 이시민] 琴湖精舍記(금호정사기)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1. 1. 1. 20:51

□금호공 이시민(琴湖公 李時敏)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①정렬공(貞烈公) 규(揆) → 2世孫 판사복시사공(判司僕寺事公) 원림(元林) → 3世孫 ①화헌공(花軒公) 만실(蔓實) → 4世孫 ③대사헌공(大司憲公) 승직(繩直) → 5世孫 ⑤금호공(琴湖公) 시민(時敏)

 

琴湖精舍記(금호정사기)
-聞韶 金時寅 謹記(문소 김시인 근기)
-後孫 仁根 謹書(후손 인근 근서)

 

夫士之懷寶蘊道而不售於世惟關於時與命者而所以明去就之義惟篤信好學行法以俟命之士能之歟恭惟琴湖先生李公諱時敏簪纓世閥而慶州人也挺淸秀端雅之姿賦聰明敏達之才而潜心經學探究蘊理文章行誼爲世所推重矣早登上庠將有爲於世而適値 端廟癸酉因仲兄知止堂公被禍遂廢擧奉慈夫人裵氏還遯于琴溪村而採山釣水以奉廿旨及居喪盧墓三年哀毁踰制平居不解冠帶處鄕接人必以禮貌敎誨諸子日望成就以戒仲子勗以五母戒終成節義君子直筆不撓於燕山主而竟被禍名垂千古而享鏡光書院郞仲子慵齋先生也自戊午之後遯跡于府北川城而巡相累薦不起敎導後學興慵先生俱享栢麓社即三子進士訥齋先生也蓋精舍之扁楣琴湖者取坊名因公之號而梅月堂金先生甞題其盧曰琴湖高士之軒歲久剩落揭板無由可徵殊可恨者也夫琴者始於帝舜之五絃琴以士君子之與書必須者也樂而琴憂而琴哀而琴無聰而琴則公之琴豈非不遇於世而安分樂道之琴歟於乎公之世五百年而遠矣今癸亥公之裔孫等將修譜役而築精舍於楸材之傍余觀夫精舍之勝狀北有照骨西有鶴駕南有葛蘿諸峰逶迤環抱中有湲溪水明媚澄澈曲折東流縈帶亭麓而注流洛江丘陵林藪點綴如畫圖聚落散在於煙霞縹緲之間四時之景無竆矣至若精舍之規模則凡八間而東西煖室中有堂而前繞檻軒屏以踈樹茂林而培植花卉繚以短垣眞異境也功告訖後孫成鎬責余爲記藐玆晩生蔑學何敢承當然窃惟念四百年同鄕景仰之地不敢終辞謹復之曰僉君子豈以亭構之業爲盡繼述之盛哉登斯而好先謨講敦誼則尙亦無負乎先之後人矣謹爲之記
癸亥 七月 日

 

聞韶 金時寅 謹記
後孫 仁根 謹書

 


●금호정사기(琴湖精舍記) 역문(譯文)
-문소 김시인 근기(聞韶 金時寅 謹記)
-후손 인근 근서(後孫 仁根 謹書)

 

무릇 선비가 속에 보배를 품고 도덕을 쌓았으면서 세상에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은 시대와 운명에 관한 일이고 거취를 분명히 하여 신의를 돈독히 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법도에 맞게 행동하고 운명을 기다리는 것이 쉬울까. 금호선생(琴湖先生)이 공의 휘는 시민(時敏)이니 명문거족이 경주이씨(慶州李氏)다. 맑고 수려하며 단아한 자품(資稟)이 뛰어났고 총명하고 활달한 성품을 타고나서 학문에 잠심(潛心)하고 이수를 탐구하며 문장과 행금세상에 추대를 받았다.

 

일찍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장차 세상에 크게 쓰여지리라 믿었는데 때마침 단종(端宗) 1년 계유년(癸酉年, 1453)에 중형(仲兄) 지지당공(知止堂公)이 화(禍)를 당하므로 과거에 뜻을 버리고 모친 배씨(裵氏)를 모시고 안동(安東) 땅 금계촌(琴溪村)에 숨어 살면서 산에 가서 나물 캐고 물에 가서 고기를 잡아 부모봉양에 지극했고 상주(喪主)가 되어서는 시묘삼년(侍墓三年)을 애통 속에 지냈으며 평상시에도 의관을 벗지 아니하고 향 중에 있을 때나 남을 대할 때는 반듯이 예절을 갖추었고 아들을 가르칠 때는 날로 성취하기를 바라며 가운데 아들 종준(宗準)에게 다섯 가지의 해서는 안 될 일을 드려 경계해서 끝내 절의군자(節義君子)가 되어 폭군 연산(燕山)에도 굴하지 않고 마침 화(禍)를 입어 천추(千秋)에 이름을 남겼고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배향(配享)됐으니 가운데 아들 용재선생(慵齋先生)이요. 무오사화(戊午史禍) 후에 안동군(安東郡) 내성(奈城) 땅에 몸을 숨겨 나라에 천거해도 나가지 않고 후학을 교육하다가 나중에 중형(仲兄) 용재선생(慵齋先生)과 함께 백록사(栢麓社)에 입향한 분이 셋째 아들 진사(進士) 눌재선생(訥齋先生)이다.

 

정사(精舍)의 현판을 금호(琴湖)라 한 것은 지명을 따서 호를 지었는데 매월당(梅月堂) 김선생(金先生, 金時習)이 그 집에 쓰기를 금호고사의 집[琴湖高士之軒]이라 하였더니 세월이 오래 흐르는 동안 떨어졌으니 통한할 일이다.
금(琴, 거문고)이란 옛날 중국 순(舜)임금 때 오현금(五絃琴, 다섯 줄로 된 옛날 거문고의 하나)에서 시작된 군자들의 생활에 글과 거문고가 함께했다. 즐거울 때도 거문고 탔고 근심이 있을 때도 거문고요, 슬플 때도 거문고 타고 적막할 때도 거문고를 탔으니 공의 거문고는 세상을 못 만나 분수에 따라 도학을 즐기던 거문고가 아닌가.

 

슬프다! 공이 가신지가 오백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난 계해년(癸亥年)에 공의 후손들이 파보(派譜)를 맞추고 제궁 곁에 정사(精舍)를 지으니 경관이 아름답다. 북쪽에 조골산(照骨山)이 있고 서쪽에는 학가산(鶴駕山)이 높았으며 남쪽에는 갈라봉(葛蘿峰)이 둘렸고 중간에는 잔잔한 시냇물이 맑고 깨끗이 굽이쳐 동쪽으로 낙동강에 흘러들고 언덕과 숲은 한 폭 그림과 같으며 여기저기 보이는 촌락은 연기와 안개 속에 싸였으며 사시에 경치가 장관이다. 정사의 규모는 여덟 칸으로 동서가 온실이요. 중간에 마루가 있고 앞에는 나무와 숲이 병풍같이 헌함을 둘렸으며 들에는 온갖 꽃을 심어 담장을 비추니 참으로 별경(別景)이다.
역사를 맞추고 후손 성호(成鎬)가 나에게 기(記)를 부탁하니 나 같은 멸학만생(晩生蔑學)이 어찌 감히 당하리요 만은 사백 년 동안 한 고향에 살면서 추모하던 처지라 사양할 수만 없어 삼가 쓰노니 군자 여러분은 이 집을 지음으로 조상 일을 다 했다고 생각 말고 이 정자(亭子)에 오를 때마다 선덕(先德)을 추모(追慕)하고 족친 간 인정을 돈독히 하는 것이 금호선생(琴湖先生)을 저버리지 않음일진저 삼가 기(記)를 쓰노라.

 

문소 김시인(聞韶 金時寅) 지음.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