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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공 이승직] 大司憲月城李公祭壇碑銘(대사헌월성이공제단비명) 并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0. 11. 30. 23:55

□대사헌공 이승직(大司憲公 李繩直)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①정렬공(貞烈公) 규(揆) → 2世孫 판사복시사공(判司僕寺事公) 원림(元林) → 3世孫 ①화헌공(花軒公) 만실(蔓實) → 4世孫 ③대사헌공(大司憲公) 승직(繩直)

 


大司憲月城李公祭壇碑銘 并序
(대사헌월성이공제단비명 병서)
-外裔孫 聞韶 金應煥 撰(외예손 문소 김응환 찬)

 

慶州李成鎬五鍵二君袖其從先祖訥齋先生所撰家狀及世譜一冊來示聞韶金應煥曰五十七代祖大憲公卽先祖慵齋先生之祖也攷譜牒墓在揚州東村之池洞而至今詢于居人則云有李監司墓洞然不知的在何處故失傳久矣且先祖再娶而前配之墓譜亦不載獨後配之墓在安東金溪之仕望故居近子孫會此合擧香火雖勢出不己不無援尊之嫌今秋餕席族人相善甫言于衆曰別設一壇于此近幷享二配何如僉曰善於是相善另出己財將伐石壇而表之以諸宗之意請銘于執事應煥復之曰韙哉是擧也失傳而不祭人家許多而幷享於配位不可不謂之允合於神理人情則義起之禮己爲盛擧而加商禮意拔力衆中又何其賢且敏哉不但事係至當應煥亦㤁在外裔之列寧可以鹵劣辭諸謹按狀公諱繩直字繩平系出新羅佐命大臣謁平高祖諱之秀三重大匡月城君曾祖諱揆官四宰諡貞烈祖諱元林司僕判事考諱蔓實大護軍妣鐵城李氏以洪武戊午生公旣長有學行擢生進兩科仕 世宗朝歷楊州牧慶尙監司致位二品莅民慈惠折獄嚴明以治績陞差不尙華靡不近聲色以淸白著聞 上擬大用拜大司憲適發背疽不 許遞竟以辛亥十一月捐舘享年五十四 上震悼撤膳致侑如禮於乎公之官歷所記只此可謂疎畧然窃惟德學風猷必有振當世裕來後而以親孫之訥翁己有文蹟蕩失之歎矧其下哉景泰之後又經戊午墳塋失傳良有以也人家患亂之後其如是也夫公前娶延安李氏都監正郎亮之女生四男一女再娶興海裵氏 贈兵曹判書柏竹堂尙志之女生一男長不敏判官孫曰孟準次命敏繕工監副正安岳郡守號知止堂以金宗瑞黨與三子乾金乾玉乾鐵同時被禍 肅廟朝 贈兵曹參議諡忠愍配食 莊陵朝士壇第四子乾石生甫三月爲乳婢所隱就養於仲父靡敏謫所有後今相善卽其裔也次勿敏文科主簿孫曰榮祖生員興祖承祖孫女適閔甫啓元孝精參軍次靡敏孫曰仁準智準次時敏號琴湖俱中生進以仲兄禍仍禁錮退隱永嘉之琴溪孫曰崇準忠順衛曰宗準卽慵齋先生曰弘準卽訥齋先生曰公準訓導孫女適朴緇監司琴啓縣監權碩衡司果李堣參判一女適金巖縣監內外子孫今以數千計源大流長之理其在斯乎銘曰


維李東方系出謁平茅土重封派分月城羅麗暨鮮展也隆顯胚光毓慶曰有大憲英敏其姿淸白其德居家學行莅官治績出試嶺闌入長栢府響用方隆遞嗇其數至仁宰物有時不公龍漢癸戊又何乘逢有儼喬木豈全頽顚綿綿餘蔭孫枝萬千噫彼鄕先沒惟可祭霜露雲仍仲情何處墓云惟楊有洞莫的玆焉設壇表以貞石堀幷之泉惟誠之孚庶幾延津耶將自隨香火千秋三靈一壇掲此銘章昭示二間

 


●대사헌월성이공제단비명 병서 역문
(大司憲月城李公祭壇碑銘 并序 譯文)
-외예손 문소 김응환 지음(外裔孫 聞韶 金應煥 撰)

 

경주(慶州) 이성호(李成鎬)·오건(五鍵) 두 사람이 그 종선조(從先祖)인 눌재선생(訥齋先生)이 지은 가장(家狀)과 세보(世譜)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나 김응환(金應煥)에게 보이면서 나의 17대조 대헌공(大憲公)은 곧 선조(先祖) 용재선생(慵齋先生)의 조부(祖父)라 보첩(譜牒)에 상고해 보면 묘소(墓所)가 양주(楊州) 땅 동촌(東村)의 지동(池洞)에 있다고 하여 그 지방 사람에게 물은즉 이감사(李監司) 묘소가 있다고는 하나 적실히 어느 곳이라는 것은 알 수 없다 하여 실전(失傳)한 지가 오래됐다.


또한 선조(先祖)께서 두 번 장가를 가셨는데 전배(前配)의 묘소도 보첩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후배(後配)의 묘소는 안동(安東) 금계(金溪) 사망동(仕望洞)에 계신 고로 가까이 사는 자손들이 모여서 제사(祭司)를 받드니 비록 부득이한 형편이나 조상을 찾지 않는 혐의가 없지 않은 터에 금년 가을 시사(時祀) 때 족친 상선(相善) 씨가 여러 족친에게 말하기를 별도로 단(壇) 하나를 모아서 전후배(前後配) 두 분을 함께 모시는 것이 어떠냐 하니 모두 좋다 하여 특별히 사재를 내고 돌을 깨서 단(壇)을 놓고 여러 족친의 뜻으로 나 응환(應煥)에게 비명(碑銘)을 청하거늘 내 가로대 착하다 이일이여 조상 묘소를 잃고 제사를 못 지내는 일이 사람 집에 허다한데 두 배위(配位)를 함께 단을 모아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귀신의 도리와 사람의 정리(情理)에 부합하다 아니하지 못할지라. 의리에서 일으킨 예(禮)가 훌륭한 일인데 여럿 중에서 특별히 힘을 쓰니 어찌 그 착하고 아름답지 않으리오. 일이 당연한데 응환(應煥)이 또한 외람하게도 외예손(外裔孫)이란 척의(戚誼)에 있으니 노열(鹵劣)하다고 사양할 수 있으리오.

 

삼가 가정에 의하면 공의 휘는 승직(繩直)이요 자(字)는 승평(繩平)이니 그 계통이 신라좌명대신(新羅佐命大臣) 알평(謁平)에서 나왔다. 고조(高祖)의 휘는 지수(之秀)니 삼중대광월성군(三重大匡月城君)이요, 증조(曾祖)의 휘는 규(揆)니 벼슬이 사재(四宰)에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고 조(祖)의 휘는 원림(元林)이니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요, 고(考)의 휘는 만실(蔓實)이니 대호군(大護軍)이며 비(妣)는 철성이씨(鐵城李氏)라 무오(戊午)년에 나셨다.


공이 장성하면서 학행(學行)이 있어 생원진사(生員進士) 두 과(科)에 합격하고 세종(世宗) 때 벼슬하여 양주목사(楊州牧使)·경상감사(慶尙監司)를 지내 지위가 2품(二品)에 올랐다. 백성을 사랑과 은혜로 다스리고 죄를 다스릴 때는 엄하고 밝게 하여 선정(善政)의 공으로 계급이 높이 올랐으나 사치를 배제하고 주색을 멀리하니 청백(淸白)함이 들어나 왕께서 크게 쓰시고자 대사헌(大司憲)을 시키시더니 마침 등창이 나서 병중에 있어도 상(上)께서 면직을 아니 시키더니 슬프다.

 

신해(辛亥, 세종13 1431)년 11월에 졸(卒)하니 향년 54세라. 상이 이 소식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사 반찬을 거두시고 치제(致祭)까지 하셨으니 슬프다. 공이 벼슬길에서 지낸 역사기록이 너무도 간략하나 그러나 생각건대 덕학(德學)과 풍화(風和)가 당세에 진동했고 후인(後人)에게 물려줌이 많이 있었건만 공의 손자 눌옹(訥翁)이 먼저 문적(文蹟)이 유실됨을 탄식했으니 아래 사람들이 어찌할쏜가. 사람의 집에 환란을 겪은 뒤는 이처럼 비참한 것이리라.

 

공의 초취(初娶) 연안이씨(延安李氏)는 도감정랑(都監正郎)의 따님(亮의 女)이니 4남 1녀를 낳으셨고 재취(再娶) 흥해배씨(興海裵氏)는 증직병조판서(贈職兵曹判書) 백죽당(柏竹堂) 상지(尙志)의 따님이니 일남을 낳으셨다. 장남에 불민(不敏)이니 판관(判官)이요, 손자에 맹준(孟準)이며 차남에 명민(命敏)이니 선공부정(繕工副正) 안악군수(安岳郡守) 호는 지지당(知止堂)인데 김종서(金宗瑞)의 당파(黨派)라 해서 세 아들 건금(乾金)·건옥(乾玉)·건철(乾鐵)과 함께 화(禍)를 당했으니 숙종조(肅宗朝)에 와서 증직병조참의(贈職兵曹參議)를 받고 시호(諡號)를 충민(忠愍)이라 하여 장릉(張陵, 端宗陵) 조사단(朝士壇)에 배향하다. 넷째아들 건석(乾石)이 그때 출생한 지가 석 달이라 유모(乳母)가 숨겨서 살아남아 중부(仲父) 미민(靡敏) 귀양 사는 곳에서 길러 났으며 상선(相善)이 그 자손이라.


다음 아들은 물민(勿敏)이니 문과주부(文科主簿)요, 손자는 영조(榮祖)니 생원(生員)이고 흥조(興祖)·승조(承祖)이며 손녀는 민보계(閔甫啓)와 원효정참군(元孝精參軍)에 출가했고 다음 아들은 미민(靡敏)이요, 손자는 인준(仁準)·지준(智準)이며 다음이 시민(時敏)이니 호는 금호(琴湖)라. 생원진사(生員進士) 과거(科擧)에 다 합격했으나 중형(仲兄) 명민(命敏)의 화(禍)를 입어 금고형(禁錮刑)을 받고 안동금계(安東琴溪)에서 숨어 살았다.

 

손자는 숭준(崇準)이니 충순위(忠順衛)요. 또 종준(宗準)이니 곧 용재선생(慵齋先生)이요. 또 홍준(弘準)이니 눌재선생(訥齋先生)이요. 다음이 공준(公準)이니 훈도(訓導)요. 손녀는 감사(監司) 박치(朴緇), 현감(縣監) 금계(琴啓), 사과(司果) 권석형(權碩衡), 참판(參判) 이우(李堣)에 출가했고 1녀는 현감(縣監) 김암(金巖)에 출가했다. 내외손(內外孫)이 수천(數千)으로 번성하니 근원이 크면 흐름이 길다는 원리가 여기에 올 수 있다 새겨 가로대

 

오직 동방(東方)에 이씨(李氏)는 계통이 알평(謁平)에서 시작됐다. 벼슬이 거듭 봉(封)해지니 월성(月城)으로도 관향(貫鄕)을 쓰게 됐다. 신라(新羅) 고려(高麗)를 지나 조선(朝鮮) 초에 와서 더욱 높고 드러나게 발전했다. 광채를 간직하고 경사를 모았으니 대헌공(大憲公)이 났도다. 영민(英敏)한 그 자질이요, 청백(淸白)한 덕행이라 집에 있을 땐 학행(學行)이 탁월했고 벼슬에 임해서는 치적(治績)이 뛰어났다. 나가서는 재 넘어서(嶺闌) 쓰였고 들어와서 백부(伯父)에서 컸도다. 쓰임이 높아질 때 운수는 어찌 비색하고 어진 이가 만물을 다스려도 때로는 공평치 못함이 있도다. 계유(癸酉)와 무오(戊午)는 왜 또 만났든 고! 점잖은 큰 나무는 넘어진다고 다 죽으랴. 길게 뻗은 음덕(蔭德)이 만천(萬千) 가지로 벌었네.

 

슬프다, 저 조상은 사후에도 제사함이 옳을지나 상로기강(霜露旣降) 자손들이 어느 곳에 정을 펼까. 양주(楊州) 땅에 묘(墓)가 있다 하나 마을은 찾아도 묘소는 분명찮다. 이곳에 단(壇)을 놓고 돌을 세워 표(表)를 하나 샘을 뚫어 흐르는 물이 정성이 두터워서 큰물에 뻗치리니 뉘 스스로 따를쏜가. 천추(千秋)에 피운 향화(香火) 세분 영혼이 한 단(壇)에 계실지라 이글을 새겨 대를 이어 밝혀 보이노라.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