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눌재유고이홍준

[訥齋遺稿] [附錄] 書自製墓銘後 (李訥隱)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7. 14:51

눌재유고(訥齋遺稿) / 附錄


書自製墓銘後 (李訥隱)

先生之墓。在乃城北文殊山下。銀峯東西向之原墓。前有石只刻先生所著。碣銘而世系生卒年。子孫俱不載世系在先生所著。兩代遺事。中而生卒年及平生言行。無可攻先生娶。咸昌金氏主簿諟敬之女。觀察使爾音之玄孫。生一男五女。男德璋黃山道察訪。女 適李希侗生員。余漢瑾 琴椅。府使鄭穆蕃。參奉李麟。德璋娶豐山柳氏。進士子溫之女。生四男一女。男艿 茹 葎早歿。苞參奉。女李薰。生員李希侗。五男一女。男文魁進士。文台生員。文斗生員。文奎參奉。文井參奉。女適郭河余漢瑾一子。夢得琴椅二男一女。男應鍾奉事。應實生員。女適權東美。縣監鄭穆蕃一男一女。男惟一大司憲。女適李淑仁。進士李麟。四男三女。男忠寬 士寬 克寬 順寬。女適南好善。李碩榦。參奉南好禮。先生之居乃城不詳年。月意先生夫人之鄕。在榮川斗巖里先生。中成化丙午。進士而榜目書居。榮川先生時贅居。斗巖故也。乃城去斗巖不十里。先生愛基溪山。明嬪洞府幽敻而定居也。歟先生故墟。在龍潭內延壽峯下。北岸先生旣累舉不。中而戊午禍後不復。以進取爲意杜門求志。以乃城去府遠氓俗。獷戾無禮義。與若干同志依藍田。故事設規約道之。以孝悌敦睦而嚴基防。縣風遂變至。今二百餘年之間。號爲文明之鄕。實自先生倡之也。先生後嗣中絶。外裔之居近鄕者。相與規畫歲一。祭先生墓守護不替。

*출처: 용눌재집(慵訥齋集) > 訥齋先生遺稿 > 附錄

◈눌은집(訥隱集)은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의 文集이다.
◯이광정(李光庭) 1674년(현종 15)~1756년(영조 32).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이고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이현일(李玄逸), 권두경(權斗經), 권두인(權斗寅)의 문인(門人). 김성탁(金聖鐸), 권구(權榘) 등과 교유.



스스로 지은 묘지명 뒤에 쓰다[書自製墓銘後]
이눌은李訥隱1)

선생의 묘는 내성현 북쪽 문수산 아래 은봉銀峯 동쪽 서향의 터에 있다. 묘소 앞에 비석이 있는데, 선생이 지은 묘갈명만 새겨져 있고 세계世系와 연대별로 있었던 평생의 일과 자손에 대해 모두 실려 있지 않다. 세계는 선생이 지은 양대의 유사遺事 속에 있으나 생몰 연대와 평소의 언행에 대해서는 고찰할 만한 것이 없다.
선생은 함창 김씨咸昌金氏 주부 김시경金諟敬의 따님이자 관찰사 김이음金爾音의 현손녀에게 장가들어 1남 5녀를 낳았다. 아들 덕장德璋은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이다. 딸들은 생원 이희동李希侗, 여한근余漢瑾, 부사府使 금의琴椅, 참봉 정목번鄭穆蕃, 이린李麟에게 각각 시집갔다.
덕장은 풍산 류씨豐山柳氏 진사 류자온柳子溫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잉艿·여茹·율葎은 일찍 죽고, 포苞는 참봉이다. 딸은 생원 이훈李薰에게 시집갔다. 이희동은 5남 1녀이다. 아들은 진사 문괴文魁, 생원 문태文台, 생원 문두文斗, 참봉 문규文奎, 참봉 문정文井이다. 딸은 곽하郭河에게 시집갔다. 여한근은 아들이 하나이니 몽득夢得이다. 금의는 2남 1녀이다. 아들은 봉사 응종應鍾과 생원 응빈應賓이다. 딸은 현감 권동미權東美에게 시집갔다. 정목번은 1남 1녀이다. 아들 유일惟一은 대사간이고, 딸은 진사 이숙인李淑仁에게 시집갔다. 이린은 4남 3년이다. 아들은 충관忠寬· 사관士寬·극관克寬·순관順寬이고, 딸들은 남호선南好善, 이석간李碩幹, 참봉 남호례南好禮에게 각각 시집갔다.
선생이 내성乃城에 거주한 것은 연월이 자세하지 않다. 생각건대, 선생 부인의 고향이 영주 두암리斗巖里에 있고, 선생이 성화 병오년(148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방목에 영주에 거주한다고 썼으니 선생이 당시 두암에서 처가살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성현은 두암과의 거리가 10리도 되지 않으니, 선생이 그곳의 산수가 아름답고, 동네가 그윽한 것을 사랑하여 살 곳을 정한 것이리라. 선생의 옛터는 용담龍潭 안 연수봉延壽峯 아래 북쪽 언덕이다. 선생이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급제하지 못하였고, 무오년(1498)의 화가 있은 뒤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 뜻을 두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뜻을 구하였다. 내성현이 부府와 거리가 멀어 백성의 풍속이 사납고 예의가 없었기에 뜻을 같이하는 약간의 사람들과 남전藍田의 옛일에 근거하여 규약을 마련하고, 효도하고 공손하며 도탑고 화목한 도로 이끌면서 한계를 엄격히 하니 현의 풍속이 드디어 변하였다. 지금까지 200여 년 사이에 문명의 고장이라 불리게 된 것은 실로 선생이 창도한 때부터이다. 선생의 후사가 중간에 끊어지니 근처 고장에 거주하는 외손이 서로 함께 계획하여 한 해에 한 번 선생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어 변함없이 지키고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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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눌은(李訥隱) : 눌은은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의 호이다. 자는 천상(天祥),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1696년 진사가 되었으며, 영조 때 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경상도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그를 산남(山南) 제일의 문학과 행의(行誼)로 천거하였다. 저서로는 『눌은집』이 있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눌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스스로 지은 묘지명 뒤에 쓰다[書自製墓銘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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