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눌재유고이홍준

[訥齋遺稿] [附錄] 行狀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7. 14:48

눌재유고(訥齋遺稿) / 附錄


行狀

先生諱弘準。字君式。姓李氏。訥齋。其自號也。系出慶州。新羅佐命大臣謁平。諱上祖。至麗季。有諱之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是生諱揆。官四宰。謚貞烈。是生諱元林。入我 朝判司僕寺事。是生諱蔓實。吏曹判書。於先生爲曾祖也。祖諱繩直。事 世宗朝。官至大司憲。出爲楊州牧。慶尙道觀察使。以淸白聞。考諱時敏。俱中生進。文章節行。負一世重望。癸酉之禍。被錮歸老于。永嘉之金溪村。敎授生徒。多至成就。號琴湖。鄕人議躋享。丹溪河先生。彰烈祠因。邦禁未果妣。安東權氏。縣監啓經之女。先生生于金溪。寓第自幼孝友至性。及長好讀。朱文公家禮。律身制行。必以是爲準則焉。始生員公。手植一株杏於庭。下謂諸子曰。此夫子。講道之樹也。異一汝輩讀書。講學于此。則便是。聖人之徒也。又以書戒之曰。學以誠實爲。本所謂實者。德行之謂也。苟無其德。雖有才何取焉。因以謹言。行愼酒色番交際之。說在書以勉之。先生與。仲兄慵齋先生。恪承庭訓。不敢違越。餘力劬工。文章早成未。弱冠聲望已籍甚成化。丙午慵齋擢上第。先生成進士一時皆。以爲榮而先生。揂盛滿爲戒。不復以進取爲。念杜門求志以。獎進後生爲已任戊午慵齋先生。以佔畢門從。責江界到。配未久與。寒暄一蠧濯纓諸先生。幷被慘禍先生。慟念家國。絶意當世。挚家遯跡。于榮川斗巖里。卽夫人金氏之。鄕也距乃城縣。不十里愛其溪山。明女睂境界寬閒。就懸西延壽峯。下虎坪里。作室以居之。扁曰。畏影當手書家訓。二板揭壁上以。自警歡所居縣治距城。府絶遠民習獷捍。無禮義與同志若。干人依藍田。故事設約立規導之。以孝友敦睦而。嚴其防限使。一縣子弟月朔。會講有不如約者。隨負犯高下。而責罰焉數月之。間縣風丕變。遂爲文明之。俗方伯聞之。以德行薦聞于。 朝遂稱病不。出上封事言。時弊减任縣封進之。苦先生自戊甲以。後知世之。不可有爲而。存心愛物不。以患亂自沮。一二施措之。間若可以。見其藴蓄而。長往不返之。意則决之。已久矣流離困苦人。不堪其憂而處之。泰然雖死生禍。福朝暮變遷而。不一動其中嘗有。

詩曰。無生卽無死。有生卽有死。生死兩悠悠。造物無終始。文恐身死之。後從人求銘辭致。虛夸失實遂。

自作銘。
詩曰。旣無才文無德。人而己。生無爵死無名。魂以已。憂樂空毀譽息。土而已。

先生殁其年月。無以詳焉。惟退䧛先生。撰先生子祭訪公。碣銘謂嘉靖祭。未丁外艱是可以。徵信而考其年代。又不可信其必然墓在。縣北文殊山。下銀峯西向之。原後 仁廟乙未。士林立祠縣中以。先生與慵齋先生。奉安卽柏麓里社。是也夫人。咸昌金氏。觀察使爾音。玄孫主簿。諟敬女生。一男五女。男德璋黃山道察訪。女李希侗。生員余漢瑾。琴椅府使鄭穆蕃參奉。李麟德璋娶豐山柳氏。進士子溫之。女生四男一女。男艿茹葎早殁苞參奉。女李薰生員李希侗。五男一女。男文魁進士。文台文斗俱生員。文奎文井俱參奉。女郭河余漢瑾一子夢得琴椅。二男一女男。應鐘奉事應賔生員。女權東美縣監鄭穆蕃。一男一女。男惟一大司諫。女李淑仁進士。李麟四男三女。男忠寬士寬。克寬順寬。女男好善。李碩榦參奉。南好禮先生。承家庭義方之敎。退而與慵齋先生。金昆玉友。塤唱篪和。當日聯床之。間朝夕謹貫而。授納焉。者必多有。發明道要。扶植斯文之功而先生。雅性謙挹不。喜箸述中經禍亂。文籍蕩盡惟。寂寥斷爛之蹟散見於。金溪洞志。柏麓故事之。中者只言。功化之大而。未箸推行之。跡或言德行之高而。不及學問之實使。百世之下。不得誦讀論世而。知其人則爲。後生無竆之恨。然今以先輩。推重之意。後來稱述之辭。想像比擬於千載之上。而得其彷彿焉。歛跡山林保全身名以。申屠蟠導民。禮義化洽。一方似吕大臨樂。天知命寵辱。俱忘似陶靖節至。若心法之嚴。宻造詣之精。㴱雖非後學之所。敢妄議而。松齋李先生。題先生畏影堂詩曰。所愼豈止。擉屋遍揂晃。朗顧爾心。惕若內省而。存養此則。又以日用工夫。最親切處言之而。性道體用之全。聖賢傳授之㫖。亦不外焉。斯可以見先生之本末矣。何恨文獻之無徵也。哉於乎。偉矣先生後壽世。適嗣斬絶惟外裔之居。近響者皆服襲先生之敎。彬彬多文學之士。歲一祭先生之墓。歷屢百年如。一日益見德化之盛。有以感人者㴱矣瀅模自覊丱之日。隨長老遊嬉於。古墟杏壇之上。及長往來川城登先生。尸祝之堂得聞設約。立規之義。而欽尙之者。雅矣不幸數十年之間。世道之變視先生。入山之日反有甚焉。而剝喪之禍至及遺躅之也。凢舊日進退揖讓之堂。壇階砌與夫手植鴨脚之樹。廢爲墟莽寓慕。無地則輒爲之愴。然興感日慵齋。後孫相晉甫使。其子道炯。齎慵訥兩先生遺稿。一㢧訪不佞於。先生桑梓之鄕曰。先祖文集己。有川城鋟板之本。而遺文散蹟尙。未盡收拾者。不肖心常恨之與。數三同志扌+叜訪遠近。凢得詩文。若干首及朝野。紀載焛係先祖。大節者十餘。條方附刊本稿之上。而傳寫之際恐。有脱誤且訥齋先生。無一篇敘述文字。後生末學無以。攷其德業之終。始此吾家歷世之恨也。久欲遍謁於。當世秉筆家以。請紀善之狀。而自無按據之本。念吾子自是。鄕里後生也。黨庠家塾之間。必有所聞於。故老傳誦之言。幸整頓篇第之暇。撰出事行一通以。庇我後人也。瀅模蹙然起拜以。謝曰此前。輩長德之所。不敢也顧藐然。晚生識膚。言淺何敢當是役也。道炯甫。旣去復來責以。大義其誼有不能。自己則謹就先生。所撰先世狀誌考其也。系子孫因附一二所聞於。里閭家庭之間。者第錄如右。以備後日參攷之資。且以寓高山景行之私。如此云爾。

後學聞韶。金瀅模。謹撰。


*출처: 용눌재집(慵訥齋集) > 訥齋先生遺稿 > 附錄


행장行狀

선생의 휘는 홍준弘準이고 자는 군식君式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다. 눌재訥齋는 자호이니, 계통은 경주에서 나왔다. 신라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이 윗대 조상이다. 고려 말에 와서 지수之秀라는 분이 있으니,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이가 규揆를 낳으니 벼슬은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이가 원림元林을 낳으니,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이가 만실蔓實을 낳으니 이조 판서를 지냈다. 선생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조부 승직繩直은 세종을 섬겨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지방으로 나가 양주 목사楊州牧使,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다. 청백리로 알려졌다. 아버지 시민時敏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문장과 절개 있는 행실로 한 시대에 두터운 명망을 지녔다. 계유정난 때에 금고를 당해 영가永嘉(안동)의 금계촌金溪村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며 생도를 가르치니 성취한 자가 많았다. 호는 금호향인琴湖鄕人이다.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나라의 금기 때문에 이루지 못하였다.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현감 권계경權啓經의 따님이다.
선생은 금계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성스런 효성과 우애가 있었고 자라서는 독서를 좋아하였다. 주 문공(주희朱熹)의 『가례』로 몸을 다스리고 행실을 절제하여 반드시 이것으로 준칙을 삼았다. 처음에 생원공(이시민)이 뜰 아래 은행나무 한 그루를 몸소 심으며 자식들에게 “이 나무는 부자夫子(공자)께서 도를 강하던 곳에 있었던 나무이다. 훗날 너희가 여기에서 책을 읽고 학문을 익힌다면 바로 성인의 무리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편지로 타일러 “학문은 성실을 근본으로 한다. 이른바 성실하다는 것은 덕행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만약 덕행이 없다면 재주가 있다 한들 무엇을 취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어서 언행을 삼가고 주색을 조심하며 교제를 신중히 하라는 말로 다시 편지를 써서 힘쓰게 하였다. 선생은 중형 용재慵齋 선생과 함께 가정의 가르침을 삼가고 받들어 감히 어기지 않았고 실천하고 남는 힘으로 공부에 힘썼다. 일찍 문장을 성취하여 약관(20세)이 되지 않아 명망이 이미 자자했다. 성화成化 병오년(1486)에 용재가 문과에 상위로 급제하였고,1) 선생은 진사시에 합격하니 당시에 모두가 영화롭게 여겼다. 그러나 선생은 오히려 차면 기운다는 것으로 경계하여 다시는 나아가 취하려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뜻을 구하여 후생을 장려하고 나아가게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무오년(1498)에 용재 선생이 점필재佔畢齋의 문도라는 이유로 강계에 유배되었다. 유배된 지 오래지 않아 한훤당寒暄堂, 일두一蠹, 탁영濯纓 등의 선생들과 함께 참혹한 화를 당하니 선생이 나랏일을 애통하게 여기고 당대에 벼슬할 뜻을 끊어 가족을 이끌고 영천(영주) 두암리로 자취를 감추니, 곧 부인 김씨의 고향이었다. 내성현과는 거리가 10리도 되지 않고, 그곳의 산수가 아름답고 자리한 곳이 너른 것을 사랑하여 현 서쪽 연수봉延壽峯 아래 호평리虎坪里에 집을 지어 살면서 편액을 외영당畏影堂이라 하였다. 손수 가훈을 쓴 2개의 현판을 벽에 걸고 이것으로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거주하는 현치縣治(현청縣廳이 있는 마을)가 영천군 소재지와 매우 떨어져 있어 백성들의 풍습이 사납고 예의가 없는 것을 탄식하여, 뜻을 같이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남전의 옛일에 근거하여 동약을 설정하고 규약을 세워 효도하고 우애 있으며 친인척 간에 화목하도록 이끌었다. 규약의 한계를 엄격히 정하여 온 현의 자제들에게 매월 초에 모여서 강론하게 하고 동약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범한 과오의 정도에 따라 벌을 주었다. 여러 달 사이에 현의 풍속이 크게 변하여 드디어 문명의 풍속이 되었다. 감사가 그것을 듣고 덕행으로 조정에 천거하여 아뢰었으나 마침내 병을 핑계 대고 벼슬에 나가지 않고 밀봉한 상소문을 올려 시대의 폐단과 임명된 현이 바쳐야 하는 세금의 고초를 감해 줄 것을 말하였다.
선생은 무오와 갑자의 사화 뒤로 세상을 어찌해 볼 수 없음을 알고 남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두었고 환란 때문에 스스로 위축되지 않았다. 한두 가지 조치하는 사이에 이같이 내면에 깊이 쌓아두고도 영영 가서 돌아오지 않을 뜻을 결정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음을 볼 수 있다. 떠돌아다니는 곤궁함과 고초를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처신이 태연하여 사생과 화복이 아침저녁으로 변해도 그 마음이 하나도 동요되지 않았다. 일찍이 지은 시가 있다.

태어남이 없다면 죽음도 없고 無生卽無死
태어남이 있다면 죽음이 있네 有生卽有死
생과 사의 두 이치 아득하니 生死兩悠悠
조물주는 처음과 끝이 없다네 造物無終始

또 자신이 죽은 뒤에 남을 따라 명銘을 구하여 말이 헛되고 과장되며 사실을 놓칠 것을 염려하여 드디어 스스로 명을 지어, 시에 이렇게 말했다.

재주가 없고            旣無才
덕도 없으니            又無德
사람일 뿐이다         人而已
살아서 작위가 없고    生無爵
죽어서 이름 없으니    死無名
혼일 뿐이다           魂而已
근심과 즐거움 없고   憂樂空
헐뜯음과 칭송 그치니 毁譽息
흙일 뿐이다           土而已

선생이 세상을 떠난 해와 달은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퇴계 선생이 선생의 아들 찰방공의 묘갈명을 지었는데, 가정嘉靖 계미년(1523)2)에 부친상을 당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증거로 삼을 만하다. 그러나 그 연대를 살펴보면 또 믿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묘는 현 북쪽 문수산 아래 은봉銀峯 서향의 터에 있다. 뒤에 인조 을미년3)에 사림이 현에 사당을 세워 선생과 용재 선생을 봉안하니 백록리사가 바로 그것이다.
부인은 함창 김씨咸昌金氏 감사 김이음金爾音의 현손녀이자 주부主簿 김시경金諟敬의 따님이다. 1남 5녀를 낳으니 아들 덕장德璋은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을 지냈다. 딸들은 생원 이희동李希侗, 여한근余漢瑾, 부사 금의琴椅, 참봉 정목번鄭穆蕃, 이린李麟에게 각각 시집갔다.
덕장은 풍산 류씨 진사 류자온柳子溫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잉艿·여茹·율葎은 일찍 죽었고, 포苞는 참봉이다. 딸은 이훈李薰에게 시집갔다. 생원 이희동은 5남 1녀이다. 아들 문괴文魁는 진사이고, 문태文台와 문두文斗는 둘 다 생원이며, 문규文奎와 문정文井은 둘 다 참봉이다. 딸은 곽하郭河에게 시집갔다. 여한근은 아들이 하나이니, 이름은 몽득夢得이다. 금의는 2남 1녀이다. 아들 응종應鍾은 봉사奉事이고 응빈應賓은 생원이다. 딸은 현감 권동미權東美에게 시집갔다. 정목번은 1남 1녀이다. 아들 유일惟一은 대사간이고, 딸은 진사 이숙인李淑仁에게 시집갔다. 이린은 4남 3녀이다. 아들은 충관忠寬·사관士寬·극관克寬·순관順寬이다. 딸들은 남호선南好善, 참봉 이석간李碩幹, 남호례南好禮에게 각각 시집갔다.
선생은 가정의 가르침을 받들어 어버이 앞을 물러나서는 용재 선생과 함께 금옥金玉 같고 훈지壎篪 같은4) 형제로 우애가 있었다. 당시 함께 어울리며 지내는 사이에 아침저녁으로 강습하여 익히면서 가르침을 주고받은 것 중에는 도의 핵심을 밝힌 것이 많고, 사문斯文을 부지한 공이 반드시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평소 성품이 겸손하여 저술을 잘 하지 않았는데, 중도에 화란을 겪으면서 문장과 서적이 죄다 없어져 버렸다. 오직 『금계동지金溪洞誌』와 『백록고사柏麓故事』 중에 여기저기 보이는 끊어지고 흩어진 자취마저도 교화를 이룬 공에 대해서만 언급할 뿐 미루어 행한 자취에 대해서는 드러내지 않았고, 혹은 덕행이 높은 점만 말하고 있을 뿐 학문의 실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백세 뒤의 사람들이 외고 읽으며 그 시대를 논함으로서 그 사람을 알 수 있게5) 하지 못하였으니 후생의 무궁한 한이 된다. 그러나 이제 선배들이 받들어 존중한 뜻과 훗날 칭송한 말을 통해서 천년 뒤에라도 상상하고 비교해 보고서 방불한 점을 얻을 수 있다. 자취를 산림으로 거두고 몸과 이름을 보존한 것은 신도반申屠蟠과 흡사하고, 백성을 예의로 이끌어 교화가 한 지역에 두루 미치게 한 것은 여대림呂大臨과 비슷하며, 천리를 즐기고 천명을 알아서 총애와 치욕을 모두 잊은 것은 도 정절陶靖節(도잠陶潛)과 흡사하다. 심법心法의 엄밀함과 학문이 도달한 경지의 정밀하고 깊음은 비록 후학들이 감히 함부로 의논할 것이 못 되지만, 송재松齋6) 이 선생李先生이 선생의 외영당에 지은 시에 말하였다.

삼감이 어찌 홀로일 때뿐이랴   所愼豈止獨
구석방에서도 밝은 데서와 같이 屋漏猶晃朗
너를 돌아보아 마음에 경계하여 顧爾心惕若
안으로 살펴 본마음을 보존하리 內省而存養

이것은 또한 일상생활의 공부 중에서 가장 친절한 부분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성性과 도道의 체體와 용用의 온전함7)과 성현이 전수한 뜻이 또한 이를 벗어나지 않으니 여기에서 선생의 본말을 알 수 있다. 증거로 삼을 문헌이 없는 것을 어찌 한스러워하겠는가. 아, 얼마나 훌륭한가.
선생 뒤로 여러 대 지나서 직계 자손이 끊어지고, 오직 가까운 고장에 거주하는 외손들이 모두 선생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성대하게도 학문을 하는 선비들이 한 해에 한 번 선생의 묘소에서 제사 지내 온 것이 수백 년을 하루 같이하고 있으니, 성대한 덕의 교화가 깊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을 따라 행단이 있는 옛터에서 놀았고, 자라서도 천성川城(영주)을 왕래하면서 선생을 모신 사당에 들어가서 동약을 마련하고 규약을 세웠던 뜻을 듣고서 공경하고 숭상한 지 오래되었다. 불행하게도 수십 년 사이에 세상의 도가 변한 것이 선생이 산으로 들어오던 날과 비교해 보아 오히려 더 심한 점이 있고, 나라가 쇠약해진 화가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옛날에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고 사양하던 사당과 단이며 섬돌과 계단, 손수 심었던 은행나무가 황폐하여 빈터가 되고 풀이 우거졌으니, 사모하는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번번이 서글픈 감회가 일었다.
그런데 하루는 용재의 후손 상진相晉 씨가 아들 도형道炯을 시켜 용재·눌재 두 선생의 유고 한 권을 가지고 선생의 고향에 있는 나를 찾아와서 말하였다.

선조의 문집은 이미 천성(영주)에서 목판으로 새긴 판본이 있으나 남긴 글과 흩어진 사적을 아직 미처 다 수습하지 못한 것이 제 마음에 늘 한스러웠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원근을 탐방하여 약간의 시문과 조정·재야에 기록되어 있는 선조의 큰 절개와 관계된 10여 조목의 글을 얻었습니다. 본고本稿 뒤에 붙여서 간행하려고 베껴 적는 즈음에 탈자와 오자가 있을까 염려스러웠습니다. 또 눌재 선생의 경우 저술한 글이 한 편도 없어 후생 말학이 그분의 덕업의 시종을 고찰할 길이 없으니, 이것이 우리 집안 대대로의 한입니다. 오래도록 두루 당대의 문장가를 찾아뵙고 행장을 청하려고 했으나, 근거로 삼을 만한 글이 없습니다. 생각건대, 당신은 본래 이 고장의 후생이니, 고장의 학교와 집안의 글방에서 반드시 옛날 노인들이 입으로 전하는 말을 들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책의 순서를 정돈하는 여가에 일과 행적에 대한 글을 한 통 지어 우리 후손들을 도와주십시오.

내가 삼가 일어나 절하고 사양하며 “이것은 나이 많고 덕이 있는 선배들도 감히 하지 못하던 일입니다. 생각건대, 아득한 후세에 태어난 저는 식견이 얕고 말은 천박하니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도형 씨가 갔다가는 다시 와서 대의로 부탁하였는데, 정의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삼가 선생이 지은 선대의 행장과 묘지墓誌에 근거하여 그 세계世系와 자손을 고찰하고, 고을과 가정에서 들었던 한두 가지를 덧붙여 다만 위와 같이 기록하여 훗날 참고하는 자료로 대비하고, 또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경모하는 마음을 이와 같이 붙인다.
후학 문소聞韶 김형모金瀅模8)가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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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화(成化)……급제하였고 : 2등으로 급제한 것은 을사년(1485)이다.

2) 가정(嘉靖) 계미년(1523) : 『퇴계집고증(退溪集考證)』 권7 「찰방공의 갈음명[附察訪公碣陰銘]」에 정덕(正德) 경진년(1520)인 듯하다는 내용이 있다.

3) 인조 을미년 : 인조 때는 간지가 을미인 해가 없고, 『연려실기술』 권4에서는 백록리사가 1652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4) 금옥(金玉)……같은 : 훌륭하면서 화목하고 우애가 돈독한 형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훈은 질그릇으로 만든 나팔이고, 지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데 이 두 악기는 소리가 서로 잘 어울린다. 형제의 우애를 노래한 『시경』 「소아(小雅)·하인사(何人斯)」에 “형님이 훈을 불면 아우가 저를 분다.”라고 하는 말에서 유래한다.

5) 외고……있게 : 남긴 저술이 없어 고인의 저서를 통해 그와 정신적인 교유를 나눌 길이 없다는 말이다.

6) 송재(松齋) : 이우(李堣, 1469∼1517)의 호이다. 자는 명중(明仲),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이황(李滉)의 숙부이며, 1515년 안동 부사에 임명되었다. 문장이 맑고 전아(典雅)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특히 시에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재집』이 있다.

7) 성(性)과……온전함 : 성과 도(道)에 대해서는 『중용』 1장의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그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라는 말이 있다. 체(體)는 본체(本體)를, 용(用)은 작용(作用)을 말하는데, 체용(體用)이 온전하다는 것은 학문을 통해 도리를 알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지행일치를 뜻한다.

8) 김형모(金瀅模, 1856∼1930) : 자는 범초(範初), 호는 가산(柯山),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안동에 거주하였다.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석문정(石門亭)에서 향약을 실행하는 한편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를 정정하였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눌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행장行狀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