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눌재유고이홍준

[訥齋遺稿] [丘墓文] 通訓大夫行樂安郡守南公墓碣銘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7. 14:43

눌재유고(訥齋遺稿) / 丘墓文


通訓大夫行樂安郡守南公墓碣銘
(통훈대부행낙안군수남공묘갈명)
-訥齋 李弘準(눌재 이홍준)

公諱義元。字可宣。英陽世家。南君甫。十世孫也。君甫生公若。公若生備。備生星老。星老生典書有孫。有孫生典書暉珠。暉珠生參判敏生。敏生生壯元。佑良位會寧府使。佑良生致恭。致恭娶直長。金坤之女。生公公將種也。自少多壯志馳也。試劒射穿柳葉旣長。初職內禁衛。丙午科爲郡守。任纘榜下授。昌州僉使尋。拜三水郡守。後以宣傳官兼內乘。文出爲理山。入爲長興庫令。遷工僉正。丙寅秋靖。國有功原從。一等授通政。朝廷例啓還收。出治礪山未幾島夷。有變移入樂安公爲。人剛毅正直筮仕。以後國耳忘。家西北有績。中外多聲。遂靡臨成疾辤職。歸家藥餌無力。嗚呼痛裁哉公生於。景泰三年卒於。正德六年壽。到耳順公。娵參判李栱女生。五男三女。男曰。漢淮渭演汴。女曰。裵綸權耉一未筓內外子孫。盈一室噫先積累之慶。遠及後昆何其盛也。銘曰。樂安公毅然。忠眞英碓行己。直處事實身無失任盡心。不廢任人。共欽天奪忙壽。不長時所傷燕院。東震起峯欝。葱籠地不仁。
埋善人短碣新有明。正德八年月日。進士李弘準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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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 남의원(南義元)(1452-1511)의 묘갈문(墓碣文).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창주첨사(昌州僉使)와 삼수군수(三水郡守) 등을 지냈으며 성품이 강직하였다고 함. 집안일도 잊고 나라 일만 하였는데 서북지방에 명을 받고 나갔다가 병이 나서 집에 돌아와 죽었다고 적고 있다.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gotourl=http://kyujanggak.snu.ac.kr/home/MOK/CONVIEW.jsp?type=MOK^ptype=list^subtype=sm^lclass=AL^mclass=^sclass=^ntype=mj^cn=GK04282_00



통훈대부 행 낙안 군수 남공의 묘갈명
[通訓大夫行樂安郡守南公墓碣銘]


공의 휘는 의원義元이고 자는 가의可宜이니 영양英陽의 명문가 남군보南君甫의 10세손이다. 군보가 공약公若을 낳고 공약이 비備를 낳았다. 비가 성로星老를 낳고 성로가 전서典書 유손有孫을 낳았다. 유손이 전서 휘주暉珠를 낳고 휘주가 참판 민생敏生을 낳았다. 민생이 장원壯元 우량佑良을 낳으니 지위는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이르렀다. 우량이 치공致恭을 낳고 치공이 직장直長 김곤金坤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으니, 공은 무장 집안의 자손이다.
어려서부터 장한 뜻이 많아 말을 달리고 칼을 쓰며 활로 유엽전柳葉箭1)을 꿰뚫었다. 장성한 뒤 내금위內禁衛에 처음으로 임직하였다. 병오년(1486) 군수 임찬任纘이 장원을 한 무과에 함께 급제하여 창주 첨사昌州僉使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뒤에 삼수 군수三水郡守에 임명되었다. 뒤에 선전관 겸 내승宣傳官兼內乘으로 또 지방으로 나가 이산 군수理山郡守가 되었다. 조정으로 들어가 장흥고 영長興庫令이 되었고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으로 옮겼다.
병인년(1506) 가을에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공로가 있어2) 원종原從 1등으로 통정의 품계를 받았다. 조정이 전례대로 아뢰어 환수하였고, 지방으로 나가서 여산礪山을 다스렸다. 얼마지 않아 섬 오랑캐의 변이 있어, 옮겨 낙안으로 들어갔다. 공의 사람됨이 강하고 꿋꿋하며 정직하여 처음 벼슬한 뒤로 나라 생각뿐 집을 잊었다. 서북쪽에서 공적이 있어 안팎에서 명성이 많았다. 마침내 나랏일에 힘쓰다 병에 걸려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약이 소용없었으니, 아, 슬프다.
공은 경태景泰3)32 3년(1452)에 태어나 정덕正德4) 6년(1511)에 세상을 마치니 나이 일흔이었다. 공은 참판 이공李栱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한漢·회淮·위渭·빈濱·변汴이고, 딸은 배륜裵綸과 권구權耈에게 시집갔는데 한 명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내외의 자손이 집에 가득하다.
아, 선대에 선을 쌓은 경사가 멀리 후손들에게 미치니 어찌 이다지도 성대한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낙안공은                     樂安公
굳센 충성 지니시니          毅然忠
참된 영웅으로               眞英雄
몸가짐 올곧았도다          行己直
일하는 데 진실되어         處事實
몸에 허물이 없었고         身無失
벼슬에 마음 다하여         仕盡心
임무를 저버리지 않았네    不廢任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건만  人共欽
하늘이 바삐 빼앗아 가시니 天奪忙
목숨 길지 못한 것은        壽不長
시대를 슬퍼한 때문이라네  時所傷
제비원5) 동쪽에             燕院東
봉우리 우뚝 솟으니         震起峯
우거진 무덤이여            鬱葱籠
땅이 어질지 않구나6)       地不仁
선한 이를 묻으니           埋善人
짧은 비석 새롭도다         短碣新

명나라 정덕正德 8년(1513) 아무 달 아무 날에 진사 이홍준李弘準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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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엽전(柳葉箭) : 조선 시대에 무과 시험에서 사용되었던 촉이 버들잎처럼 생긴 화살을 말한다.

2) 나라를……있어 : 중종반정에 참여한 일을 말한다. 반정 뒤에 1백 17명의 공신에게 정국공신(靖國功臣)의 훈호(勳號)를 내렸으며 뒤에 76명이 삭훈(削勳)되었다.

3) 경태(景泰) : 명나라 제7대 황제 경종(景宗)의 연호(1450∼1456)로, 조선의 문종, 단종, 세조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4) 정덕(正德) : 명나라 제10대 황제 무종(武宗)의 연호(1506∼1521)로, 16년 동안 사용하였다. 조선의 중종 시기에 해당한다.

5) 제비원[燕院] : 안동부의 북쪽 10리에 우뚝 솟은 바위에 부처 얼굴 한 구를 깎아 만들었는데, 지붕을 만들어 덮어 반공중에 높이 솟았다. 신라 시대에 창건된 것이라 한다. 연미사(燕尾寺), 연비원(燕飛院)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6) 땅이 어질지 않구나[地不仁] : 천지가 무심하다는 말이다. 『도덕경(道德經)』 5장에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기고, 성인은 어질지 않아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라고 하였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눌재선생유고 > 구묘문丘墓文 > 통훈대부 행 낙안 군수 남공의 묘갈명[通訓大夫行樂安郡守南公墓碣銘]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군수(郡守) 남의원(南義元)의 묘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

부의 북쪽, 연비원(燕飛院) 동쪽 골에 있으니 유향(酉向)이다. 이홍준(李弘準)이 갈문(碣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의원(義元)이요, 자는 가의(可宜)이다. 영양세가(英陽世家)로 남군보(南君甫)의 10대손이다. 군보가 공약(公若)을 낳았고 공약이 비(備)를 낳았으며, 비는 성로(星老)를 낳았다. 성로는 전서(典書) 유손(有孫) 비를 낳았으며, 비는 성로를 낳았다. 성로는 전서(典書) 유손(有孫)을 낳았고, 유손은 전서(典書) 휘주(輝珠)를 낳았다. 희주는 참판(參判) 민생(敏生)을 낳았고 민생은 장원(莊元) 우량(佑良)을 낳았다. 벼슬이 가정(嘉靖)년간에 회령부사(會寧府事)에 이르렀다. 우량이 치공(致恭)을 낳았는데, 치공은 사온직장(司瑥直長)인 김곤(金坤)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장수 집안의 자손이다. 젊어서부터 씩씩한 뜻이 많아 말을 달리며 검술을 익혀 활을 쏘아 버들잎을 뚫기도 하였다. 성장하고 나서 처음으로 내금위(內禁衛)1)에서 일하다가 병오년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군수(郡守) 임찬(任纘)의 밑에 있었다. 창주첨사(昌洲僉使)에 임명되었다. 얼마 안 되어 삼수군(三水郡)으로 옮겼다가 뒤에 선전관(宣傳官)으로 내승(內乘)2)을 겸임하였다. 또한 외직으로 이산(理山) 군수가 되어 나갔다가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장흥고령(長興庫令)으로서 선공첨정(繕工僉正)으로 자리를 옮겼다. 병인년 가을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공을 세워 원종일등(原從一等)3)으로 공신록에 올라 통정(通政)을 제수 받았다. 조정에 규례대로 환수(還收)할 것을 여쭈고 외직으로 나아가 여산(礪山) 고을을 다스렸다. 얼마 되지 않아서 섬나라 오랑케들이 변(變)을 일으키자 낙안(樂安)으로 전근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였으며 벼슬길에 오른 뒤부터는 오직 나라만을 생각할 뿐, 집안일은 잊어 버렸다. 서북(西北)으로 다니면서 공적을 세워 그 명성이 중외(中外)에 까지 났었다. 마침내 국가 일을 쉬지 않고 열심히 하다가 병을 얻어 사직(辭職)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약을 달여서 먹어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아아! 원통하구나. 공은 참판(參判) 이공(李拱)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한(漢) · 회(淮) · 위(渭) · 명(溟) · 변(卞)이고 딸은 배륜(裵綸) · 권기(權奇)에게 시집보냈으며 하나는 아직 혼인하지 못했다. 명(銘)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낙안공(樂安公)의 의연한 충정, 참다운 영웅이로세. 자신의 행동 곧게 하였고 일에 처해서는 진실로 했도다. 몸에는 실책이 없었고 벼슬엔 마음을 다했다네, 맡은 일 그만두지 않았으니 모두가 공경하였네, 하늘은 왜 이리도 바삐 앗아 가는지, 길지 않은 생애를 누렸구나. 그 때에 슬퍼했던 곳, 바로 연원(燕院) 동편이라네, 놀라 솟구친 봉우리 울창도 하구나. 땅은 어질지 못해, 이런 착한 사람을 묻어버리다니. 짧은 묘길 만이 새롭기만 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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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금위(內禁衛): 조선 시대, 임금을 호위하는 일을 맡은 부대
2) 내승(內乘): 고려 시대, 임금이 타는 수레나 가마를 맡아 관리하던 관청
3) 원종공신(原從功臣): 조선시대에 정공신이 되지 못한 유공자들을 포상하기 위하여 책봉된 준공신. 원종공신의 등급도 정공신의 예에 따라 1등 원종공신, 2등 원종공신, 3등 원종공신으로 구별하였다.


*출처: 영가지(永嘉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