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눌재유고이홍준

[訥齋遺稿] [家狀] 仲兄莊六堂家狀 <가장>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7. 14:34

눌재유고(訥齋遺稿) / 家狀


仲兄莊六堂家狀(중형장륙당공가장)
-弟 弘準(동생 홍준)

公姓李諱宗準字仲勻。自號莊六居。士又稱慵齋。系出慶州新羅佐命大臣謁平之後也。至麗季有曰之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是生揆官之四宰諡貞烈。是生元林。入我 朝判司僕寺事。是生蔓實吏曹判書。於公爲曾祖也。祖諱繩直進士于。世宗朝。行楊州牧慶尙道觀察使。以大司憲終。淸白見重於朝。考諱時敏。俱中生進。以淸望名。於世延及癸酉之禍。被禁錮。妣永嘉權氏。縣監啓經之女也。公生于永嘉之金溪村。幼而岐嶷。五歲屬文。七歲讀書通大義。生員公以詩戒之曰一飯都忘歲月輕。豈知斯世樹風聲。空身雖向窓前坐。逸意應馳野外行。公雖在妙齡。心誦此詩。益勉課業。十歲言于生員公曰。經書皆是聖贒傳授文字。而或出於門人之記。至於易經則文王周公孔子三聖之手書。此眞聖人書也。生員公聞而大奇之。手植一株杏於大廳之前。生員公曰此夫子講學之樹也。汝他日當與盛德君子。講習於此樹下。對曰東方亦有聖人乎。生員公曰行聖人之道。皆可爲聖人徒。况我東箕子遺風。至今流傳。豈可無贒人君子也。十三歲文章已成。筆法蒼古。欲赴鄕解。生員公以學業未成不許。缺 嘗遊學于京中。生員公慮其才勝。以書戒之。其略曰汝之遊學。非豪俠輩可比。謹言行戒酒色無慢遊。無友狂吾之先世。爲朝家名臣。及余之身。不幸坎軻。余則已矣。積善之久。豈無餘慶。汝兄不學無才。汝弟亦不好學。吾之所望者汝也。汝亦學而不誠。不誠則無實。吾所謂實者。德行之謂也。非才華也。苟無其行。雖有七步之才。何足取焉。公佩服玆訓。雖微言細行。不敢不謹。癸巳丁生員公喪。哀毁過禮。服闋後以慈夫人命。入竹林寺讀書。同里裴裀隨而課讀。志倦神疲。則裴掩卷而息。公終宵不輟。如是數月。精力如初。裴曰君以血氣之身。勤苦過人。乃能若是耶。公曰至樂在此。有何疲倦也。每月朔。歸覲慈夫人。課誦一月所讀於夫人之前。無一字訛漏。然後夫人供別饌而給之。丁酉中司馬試。寓居于京城。一日與南秋江乘月遊於杏花坊。權景裕見其儀容淸秀。邀而虛座曰子非塵埃中人。眞所謂仙鶴在人間也。君饒先唱四韻。先生應口而對。故爲出塵之態。君饒大驚挽手止之。終宵吟咏。朝日視之。乃於背洞寓居進士李某也。自後爲莫逆之友。每與伯恭君饒語及 魯陵往事。未嘗不歔唏流涕。乙巳登第。對策綱與目。丁未以正字遷吏郞。是年日本使來聘。 上以關防甚重。且彼國使有文才。命極擇護送使。銓曹以公生應㫖。公奉命至東萊。縣倭使得公書畫。拜受曰始得天下重寶。冬又受平安評事之 命。至祥原郡。題三笑圖。後南秋江過此大驚曰。此必吾友手段也。戊申除弘文校理。以徐居正薦選湖堂賜暇讀書。 上幸環翠亭。公應 製居首。聲名籍甚。無爭鋒者。時論推以第一淸望。尋拜正言。是時愼守勤始登淸顯。公以外戚得權之漸。力諫其不可。直聲震朝廷。壬子拜修撰。陳疏歸覲。癸丑以撿詳陞舍人。又以書狀赴燕。見館驛畫屛不佳。以筆塗抹殆書。譯官招通事恠詰之。通使曰書狀善書畫。必以不滿其意而然也。譯官首肯之。回程至其處。張新糚素屛二座。公一書一畫。俱臻其妙。觀者歎賞。又以詩律鳴於皇朝。後華使至而傳誦。甲寅除義城縣令。慈夫人時尙康寧。以居官愛民之意。作五言詩四十韻與之。公拜受誦之。顯見校宮之頹廢。擇地移建。出俸祿以助工費。宏敞規模。招境內之有儒望者。敎授鄕子弟。誦詩習禮。一如古法。絃誦常聞。時人以聞韶比武城。作竹樓於客館之南。爲公退休息之所。作記揭之。一時文士傳誦。至於訴帖揮灑筆跡。邑人皆珍而藏之。戊午棄官歸鄕里。是時柳子光,李克墩搆誣淸流。禍在朝夕。公怡然自樂。不以爲憂。與李忘軒胄圍碁於杏亭。外人傳言紅衣官人一隊直入洞壑。左右請輟碁。公徐曰未聞拿 命則猶是閒散。對局如故。俄頃金吾郞果至。公曰老母在。願與之訣。金吾郞惻然而許之。拜辭慈夫人。夫人引范滂事諭之曰汝得其死。我何悲爲。汝往善死善死。無以我爲念。與忘軒同席被拿。及就鞠之日。不變神色。以手畫地作一字如長杠。無一言也。奴貴成者能解文字。公之所信任而使之常隨者也。同被鞠。亦畫地無言。及定罪之日。決杖八十流北界。定烽燧庭爐干之役。路經高山驛。書孤忠自許衆不與一律于壁上而去。監司以聞。喬桐主以爲有㤪意。逮鞠殺之。時朝廷危懼。無敢言者。獨洪貴達上書救解不得。被刑之日。容色與平日無異。但勵聲曰首陽邈矣。埋我無地。聞者爲之墮淚。返葬于金溪之沙芒洞艮坐之原。夫人永嘉權氏。無嗣以弟公準第三子德淵奉祀焉公之遺意也。公容貌端雅。如淸水芙蓉。志操瀅潔。如冰壺秋月。爲文發越。信筆滔滔。直與漢唐之文。同一體格。詩亦優游不迫。出於性情。有古詩人之風韻。至於書畫醫藥卜筮。無不精巧。嘗師事佔畢齋金先生。先生器之曰自見李某。胷次灑落。與鄭一蠧金寒兩暄。爲道義交。又與金濯纓,南秋江諸賢友善。秋江最敬重焉。茂豐副正見而奇之曰。公我東之詩仙也。以綠陰紅葉之時必邀於楊花渡。乘月同舟酬唱至百餘篇。公嘗見洪裕孫歎曰。斯人也有此奇才高行不顧地閥而。與之友洪由是見重於士類云。公自幼少時。無疾言遽色。雖在倉卒。未嘗失操。其經幄講論。一遵河南夫子。霜臺直言。無愧漢庭長孺。倜儻淸議。便是海東魯連。痛矣。嘉言善行。䧺詞健筆。不傳於世。者史禍家故也。 厪得在人 耳目者和涙而書以待秉筆家采述。

*출처: 용재유고(慵齋遺稿) > 訥齋先生遺稿 > 仲兄莊六堂公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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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준의 일생을 적은 가장(家狀)으로서 이홍준이 씀.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는데 이를 보고 부친이 공자께서 은행나무 아래서 학문을 강(講)하셨다는 고사에 따라 대청 앞에 은행나무를 심어 주며 훗날 성덕군자(盛德君子)와 함께 이 나무 아래서 강습할 것을 당부하였다는 일화와 관직생활을 하며 문명(文名)을 떨친 일 등이 적혀 있다.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gotourl=http://kyujanggak.snu.ac.kr/home/MOK/CONVIEW.jsp?type=MOK^ptype=list^subtype=sm^lclass=AL^mclass=^sclass=^ntype=mj^cn=GK04282_00



중형 장륙당의 가장[仲兄莊六堂家狀]

공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종준宗準이며 자는 중균仲勻이다. 자호는 장륙거사莊六居士이고 또 용재慵齋라고도 부르니 계통은 경주에서 나왔다. 신라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고려 말에 지수之秀라는 분은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이가 규揆를 낳으니, 벼슬은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이가 원림元林을 낳으니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이가 만실蔓實을 낳으니 이조 판서를 지냈다. 공에게는 증조가 된다. 조부는 승직繩直이니 세종조에 벼슬하여 행 양주 목사行陽州牧使,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고 대사헌으로 마쳤다. 청백리로 조정에서 존중받았다. 아버지 시민時敏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깨끗한 명망으로 세상에 이름났다. 계유년(1453)의 사화에 끌려들어 금고를 당하였다. 어머니 영가 권씨永嘉權氏는 현감 권계경權啓經의 따님이다.
공은 영가永嘉(안동)의 금계촌琴溪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5세에 문장을 지었고, 7세에 독서하여 대의를 통하니 생원공이 시로 경계하였다.

한 끼 밥에 세월의 가벼움 다 잊으니 一飯都忘歲月輕
이 세상에 명성 세울 줄을 어찌 알랴 豈知斯世樹風聲
부질없이 몸은 창 앞에 앉아 있으나 空身雖向窓前坐
편안하고픈 마음 들 밖으로 달리겠지 逸意應馳野外行

공이 비록 어린 나이였으나 마음속으로 이 시를 외며 정해진 과정에 따른 학업에 더욱 힘썼다. 10살 때에 생원공에게 “경서經書는 모두 성현이 전수한 문자인데 문인의 기록에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경』의 경우에는 문왕과 주공과 공자 세 성인이 직접 쓴 글이니, 이것이 참으로 성인의 글입니다.”라고 하니, 생원공이 듣고서 매우 기특하게 여겨 대청 앞에 손수 한 그루 은행나무를 심고서 “이 나무는 부자夫子(공자)께서 강학하던 곳에 있었던 나무이다. 너는 훗날 마땅히 덕이 성대한 군자와 함께 이 나무 아래에서 강학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우리 동방에도 성인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자, 생원공이 “성인의 도를 행하면 모두 성인의 무리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유풍이 지금까지도 흘러 전하고 있으니 어찌 현인군자가 없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13살에 문장을 이미 이루었으며 필법이 힘차고 소박하였다. 향시에 나가려고 하였으나 생원공이 학업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유학할 때 생원공은 공이 재주가 앞설까 봐 염려하여 편지로 타일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네가 유학을 하는 것은 호협의 무리와 견줄 바가 아니니 언행을 삼가고 주색을 경계해라. 태만하게 놀지 말고 경망스러운 사람과 사귀지 마라. 우리 선대는 조정의 이름난 신하였는데 내 몸에 와서 불행하게도 기구하게 되었다. 나는 그만이지만 선을 오래 쌓은 집에 어찌 조상이 끼치는 복이 없겠느냐. 네 형은 배우지도 않고 재주도 없으며 네 아우 또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내가 기대하는 것은 너이다. 그런데 너 또한 배우는 데 성실하지 않구나. 성실하지 않으면 실제가 없다. 내가 말하는 실제란 덕행을 말하는 것이지 재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덕행이 없다면 칠보시七步詩를 짓는 재주가 있더라도 어찌 취할 만 하겠느냐.

공은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비록 사소한 언행이라도 감히 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계사년(1473)에 생원공의 상을 당하자 예법에 지나치도록 애통해하였다. 복을 마치고 나서 어머니의 명으로 죽림사竹林寺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같은 마을의 배인裵栶이 공을 따라서 과정에 따른 독서를 하였는데 마음이 게을러지고 정신이 피곤하면 배인은 책을 덮고 쉬었지만, 공은 밤이 새도록 책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달을 하였으나 정력이 처음 같으니, 배인이 “그대는 혈기를 지닌 몸으로 남보다 부지런하고 수고하기를 이처럼 하시오?”라고 하자, 공이 “지극한 즐거움이 여기에 있는데 무슨 피곤함이 있겠소.”라고 하였다. 매달 초에 돌아가 어머니를 뵈었는데 어머니 앞에서 한 달 읽은 것을 과제로 외어 한 글자도 잘못 읽거나 빠트린 것이 없고 나서야 어머니가 별식을 마련하여 주었다.
정유년(147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서울에 거주하였는데, 하루는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달밤에 행화방杏花坊에 놀러갔더니, 권경유權景裕가 공의 거동과 모습이 맑고 준수한 것을 보고 맞이하여 자리를 비우고서 “그대는 세속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이른바 인간 세상에 있는 선학仙鶴이구려.”라고 하였다. 군요君饒(권경유)가 먼저 사운시를 읊자 공은 바로 응수하면서 짐짓 세속을 벗어난 듯한 정취의 시를 지었다. 군요가 매우 놀라 손을 잡아당기며 제지하고서 밤새도록 시를 읊다가 아침에 해가 떠서 보니 바로 어배동於背洞에 거주하는 진사 이 아무개였다. 이 뒤로 막역한 교제를 하였다. 늘 백공(남효온)·군요와 함께 노릉(단종)의 지난 일을 언급하며 흐느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을사년(148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책은 강綱과 목目이었다.1)
정미년(1487)에 정자正字로서 이조의 낭관으로 옮겼다. 이해에 일본의 사신이 방문하였다. 주상이 국경의 수비가 매우 중요하고 또 저 나라 사신이 문장의 재주가 있다 하여 호송사護送使를 신중히 선발하도록 명하니 이조가 공을 뽑음으로써 왕명에 응하였다. 공이 명을 받들어 동래에 도착하니 왜倭의 사신이 공의 서화를 얻고 절하고 받으며 “비로소 천하의 소중한 보배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겨울에 또 평안도 평사로 임명되었다. 상원군에 도착하여 「삼소도三笑圖」2)에 글을 지었는데, 뒤에 남추강이 이곳을 지나다가 매우 놀라며 “이것은 필시 내 벗의 솜씨이다.”라고 하였다.
무신년(1488)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서거정徐居正의 천거로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하였다. 상이 환취정에 행차했을 때 임시로 본 과거에서 공이 제일第一을 차지하자 명성이 자자하여 겨룰 자가 없으니, 당시의 의논이 제일의 청망淸望이라 추앙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언에 임명되었다. 이 당시 신수근愼守勤이 막 청현직에 오르자 공이 외척이 권세를 얻을 조짐이라는 이유로 불가함을 힘써 간하니3) 강직하다는 명성이 조정을 진동시켰다.
임자년(1492)에 수찬修撰에 임명되자 상소하여 돌아가 어머니를 뵈었다.
계축년(1493)에 검상檢詳으로서 사인舍人에 올랐다. 서장관으로서 연경에 가면서 역사의 그림 병풍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붓으로 거의 다 먹칠해 버렸다. 역관이 통사를 불러 괴이하게 여기며 따졌더니, 통사가 “서장관이 서화에 능하니 필시 그의 마음에 불만스러워서 그러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역관이 머리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곳에 이르자 새로 단장한 소병素屛(그림이나 글씨 없는 흰 병풍) 두 개가 펼쳐져 있었다. 공이 하나에는 글씨를 하나에는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 절묘한 품격을 이루니 보는 이들이 감탄하였다. 또 시를 잘 짓는 것으로 중국 도성에 이름을 떨쳤는데, 뒤에 중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와서 공이 북경에서 지었던 시를 전해 가며 외었다.
갑인년(1494)에 의성 현령義城縣令에 임명되었다. 어머니가 당시 아직 건강하여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오언시 40운을 지어 주자, 공이 삼가 받았다. 고을에 부임하여 향교가 퇴락하여 무너진 것을 보고 터를 골라 이건하고 봉급을 내어 공사 비용을 도우니 규모가 크고 넓게 되었다. 경내에서 선비로 명망 있는 자를 초빙하여 고을의 자제를 가르치면서 시를 외고 예를 익는 것을 한결같이 옛 법도대로 하였다. 예악을 익히는 소리가 늘 들리자 당시 사람들이 문소聞韶(의성義城)를 두고 무성武城4)에 견주었다. 객관 남쪽에 죽루竹樓를 지어 공무에서 물러나 쉬는 장소로 삼고 기문을 지어 걸어 놓으니 당시의 문사文士들이 전해 가며 외었고, 심지어 소송하는 문서에 휘갈기듯 쓴 글씨조차도 고을 사람이 모두 보배로이 여기며 간직하였다.
무오년(1498)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당시에 유자광과 이극돈이 청류淸流를 무고에 얽어 넣으니 화가 조만간에 미칠 일이었으나, 공은 편안히 스스로 즐기며 근심하지 않았다. 망헌忘軒 이주李胄와 함께 행정杏亭에서 바둑을 둘 때 바깥사람이 한 부대의 붉은 옷을 입은 관원이 곧장 골짜기로 들어온다고 전하자, 좌우에서 바둑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공은 천천히 “체포의 명을 아직 듣지 못했으니 아직은 한산인閑散人5)이다.”라고 말하고 여전히 대국하였다. 이윽고 의금부 도사가 과연 도착하자, 공이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영결하고 싶다.”라고 하니 의금부 도사가 불쌍히 여겨 허락하였다.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니 어머니는 범방의 일을 끌어와서 비유하며 “네가 바른 죽음을 얻게 되었는데 내가 어찌 슬퍼하겠느냐. 너는 가거라. 잘 죽어서 나를 염려하지 마라.”라고 하였다.
망헌과 함께 같은 자리에서 체포되었는데 국문하는 날에도 정신과 낯빛이 변함없었고, 손으로 땅을 그어 긴 막대기 같은 글자 한 자를 쓰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귀성이라는 종이 글자 뜻을 알았는데, 공이 신임하여 늘 따라다니게 하던 자였다. 함께 심문을 받다가 그도 땅에 획을 긋고 나서 말이 없었다. 죄를 정하던 날 곤장 80대에 북쪽의 국경 지대로 유배되고 봉수군과 정로간에 정역(노비가 된 사람에게 매기던 구실)되었다. 고산역을 지나면서 “외로운 충절을 자부해도 남들은 인정 않건만”이라는 율시 한 수를 역관의 벽에 쓰고 떠나자, 감사가 이를 아뢰었다. 교동주(연산군)는 원망하는 뜻이 있다고 여기고 체포해서 국문하여 죽이니, 당시 조정에서는 두려워하며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고, 홍귀달洪貴達만이 글을 올려 풀어 주기를 구하였으나 구원할 수 없었다. 형을 당하던 날 안색이 평소와 다름없었고, 다만 소리 높여 “수양산이 아득해졌으니 나를 묻을 곳이 없구나.”라고 하자, 듣는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금계金溪 사망동沙芒洞 간좌의 터에 반장하였다.
부인은 영가 권씨永嘉權氏이다. 후사가 없어 아우 공준公準의 셋째 아들 덕연德淵으로 제사를 받드니 공이 남긴 뜻이다. 공의 용모는 단아하여 맑은 물속의 연꽃 같았고, 지조는 맑고 깨끗하여 얼음 담은 옥병에 든 가을 달 같았다. 문장을 지으면 평범함을 벗어나서 붓 가는 대로 도도하게 흘러, 곧장 한나라나 당나라 때의 문장과 그 문체와 품격이 같았다. 시 또한 한가롭고 넉넉하면서 여유로워 성정에서 우러나와 옛 시인의 풍격과 운치가 있었고, 서화와 음률, 의약과 복서에 이르기까지 정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선생이 소중히 여기며 “이 아무개를 만나고부터 흉금이 깨끗해졌다.”라고 하였다. 정일두, 김한훤과 도의의 교제를 하였고, 또 김탁영, 남추강 등과는 벗으로 잘 지냈다. 추강은 가장 공경하고 중히 여긴 분이었다. 무풍 부정茂豐副正6)이 한 번 보고는 남다르게 여겨 “공은 우리나라의 시선이다.”라고 하였다. 녹음이 우거지거나 단풍들 때면 반드시 양화나루에 불러 달밤에 함께 배를 타고 시를 주고받은 것이 백여 편에 이른다. 공이 일찍이 홍유손洪裕孫을 만나 감탄하면서 “이 사람이 이러한 남다른 재주와 고상한 행실이 있어 지체나 문벌을 따지지 않고서 벗으로 지낸다.”라고 하니 홍유손이 이로부터 선비들에게 중시되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다그치는 말이나 발끈한 표정이 없었고 아무리 갑작스러운 때라도 어쩔 줄 몰라 한 적이 없었다. 경연에서 강론할 때는 한결같이 하남 부자河南夫子(정호程顥와 정이程頤)를 따랐고, 사헌부에서 직언을 할 때7)는 한나라 조정의 급장유汲長孺8)에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기개 높고 맑은 풍모는 바로 해동海東의 노중련魯仲連9)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말과 행실, 웅건한 문장과 굳센 필체가 세상에 전하지 않는 것은 사화 때문이니 마음 아프다.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는 것을 겨우 얻어 눈물을 흘리며 써서 문장가가 채택하여 서술하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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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책은 강(綱)과 목(目)이었다 : 대책은 시험 과목의 일종이다. 책문(策文, 문제)을 내어 대책(對策, 답안)을 바치게 하는 것으로, 내용은 경학(經學)과 시무(時務)에 대한 논문이다. 이날 책문(策問)인 강과 목에 대하여 대책을 지었다는 말이다.

2) 「삼소도(三笑圖)」 : 진(晉)나라 때의 혜원 법사(慧遠法師)는 동림사 앞 골짜기를 한 번도 건넌 적이 없다가, 어느 날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 두 사람의 전송을 하면서 이야기에 빠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건너다 범의 울음소리를 듣고 비로소 안거금족(安居禁足)의 맹세를 깨뜨렸음을 깨닫고, 세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는 고사가 있는데, 이 고사를 그린 그림을 말한다.

3) 신수근(愼守勤)이……간하니 :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며, 중종의 장인이다. 청현직(淸顯職)은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임명하는 벼슬로, 규장각(奎章閣)·홍문관(弘文館)·선전 관청(宣傳官廳) 등의 벼슬을 말한다. 신수근이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임명된 것은 성종 23년(1492) 2월이다. 그가 승지로 임명되자 사헌부와 사간원, 승정원에서 ‘외척이 권세를 얻을 조짐이다.’고 해서 불가함을 아뢰었다. 이종준이 당시 사간원에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연산군일기』 4년 7월 29일)

4) 무성(武城) : 노(魯)나라 고을 이름으로, 문교(文敎)를 상징한다.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이곳의 재(宰)로 있을 적에 공자가 그곳을 지나다가 거문고를 타고 시가(詩歌)를 읊조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고사가 있다.(『論語』 「陽貨」)

5) 한산인(閑散人) : 벼슬을 내놓고 한가히 지내는 한량(閑良)과 일정한 직업 없이 한가하게 지내는 산인(散人)을 합한 뜻으로 한 말이다.

6) 무풍 부정(茂豐副正) : 이총(李摠, ?∼1504)을 말한다. 태종의 아들 온녕군(溫寧君) 이정(李程)의 손자이다. 청담파(淸談派)의 중심 인물로 시문에 능하고 필법에 뛰어났다.

7) 사헌부에서……때 : 이종준이 사헌부 지평으로 있었던 기간은 성종 24년(1493) 3월 23일부터 8월 23일 성절사 질정관(聖節使質正官)이 되기 전까지 약 5개월이다.(『成宗實錄』)

8) 급장유(汲長孺) :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신인 급암(汲黯)을 말한다. 황제 앞에서도 기절(氣節)을 굽히지 않고 강직하게 바른말을 서슴없이 하였기 때문에 무제가 그를 꺼리면서도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고 일컬었던 인물이다.(『史記』 卷120 「汲鄭傳」)

9) 노중련(魯仲連) :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이다. 그가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천자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천자를 참칭(僭稱)한다면 나는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라고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후퇴시켰다고 한다.(『史記』 卷83 「魯仲連傳」)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눌재선생유고 > 가장家狀 > 중형 장륙당의 가장[仲兄莊六堂家狀]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중형장륙당공가장(仲兄莊六堂公家狀) 역문(譯文)
  -동생 홍준 지음(弟 弘準 撰)

공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휘는 종준(宗準)이며 자는 중균(仲勻)이고 호는 장륙거사(藏六居士)라고도 하고 또 용재(慵齋)라고도 하니 경주로 관향(貫鄕)을 하고 신라좌명대신(新羅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고려(高麗)말에 지수(之秀)가 있으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이요. 규(奎)를 낳으니 벼슬이 사재(四宰)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며 휘 원림(元林)을 낳으니 아조(我朝, 朝鮮)에 들어와서 벼슬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고 휘 만실(蔓實)을 낳으니 이조판서(吏曹判書)라. 공에게는 증조가 되고 조부는 휘 승직(繩直)이니 세종조(世宗朝)에 벼슬하시어 양주목사(楊州牧使)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으로 마치니 청백(淸白)하심으로 조정에 중용되었고 부친의 휘는 시민(時敏)이시니 생원진사(生員進士)에 합격하시고 청백(淸白)으로 세상에 명망이 높으시더니 계유(癸酉)에 화(禍)가 미치매 금고(禁錮)형을 당하셨다.
모친은 영가권씨(永嘉權氏) 시니 현감(縣監) 계경(啓經)의 따님이시다. 공이 안동(安東) 금계촌(金溪村)에서 나시니 어려서부터 상모가 우뚝하시고 5세에 글을 부치시고 7살에 글을 읽어 대의(大義)를 통달하시니 생원공(生員公, 용재공 부친)께서 글을 지어 경계하시니 글에 가로대

일반도망세월경(一般都亡歲月輕) / 한 밥에 세월 빠른 것을 잊으니
기지사세수풍성(豈知斯世樹風聲) / 어찌 세상 소리를 알까 보냐
공신수향창전좌(空身雖向窓前坐) / 빈 몸이 비록 창 앞에 앉았으니
일의응치야외행(逸意應馳野外行) / 뜻을 응당 야외로 달아난다.

이때 공이 비록 어린 나이시나 마음에 이글을 외우고 더욱 학업에 힘쓰시더니 10세 때 부친께 말씀하기를 경서(經書)는 다 성현(聖賢)이 전해 준 문자(文字)이나 혹은 문인(門人)들의 기록에서 나왔고, 주역(周易)인즉 문왕(文王)·주공(周公)·공자(孔子) 세 분 성현(聖賢)의 친히 쓴 글이오니 진성인(眞聖人)의 글이라 하오니 생원공(生員公)이 들으시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시어 손수 은행나무 한 그루를 대청 앞에 심으시고 생원공(生員公)이 가로대

『이 나무는 부자(夫子)께서 배우고 강하든 나무라 내가 뒷날 성덕군자(盛德君子)로 더불어 이 나무 아래서 강학(講學)하라』

하심에 대답하여 가로대

『동방(東方)에도 성인(聖人)이 있습니까』

생원공(生員公)이 가라사대

『성인(聖人)의 도(道)를 행하면 성인이 될진대 하물며 우리 동방은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이 지금까지 흐르니 어찌 현인군자(賢人君子)가 없다』 할 것인가.

13세에 문장(文章)을 이루고 필법(筆法)이 옛사람을 압도하시더니 향시(鄕試)에 응시코자 한데 생원공(生員公)은 학업이 부족하다 하시어 허락지 않으시다. 일찍 서울로 유학(游學)할새 셍원공(生員公)이 그 재주가 덕보다 앞설까 염려하시어 글로 경계하시니 그 대략이 이러하였다.

「너의 유학(游學)하는 것이 호협(豪俠)한 무리에 비교할 바가 아니니 언행(言行)을 삼가고 주색(酒色)을 경계하며 게을리 놀지 말고 미친 벗은 사귀지 말라. 우리 선대(先代)가 조정에 이름있는 신하(臣下)이니 나에 이르러 불행(不幸)하게 구렁에 빠졌으니 나는 그만이다마는 적선(積善)을 오래 하면 어찌 경사가 없겠느냐? 너의 형은 배우지 못하고 재주도 없으며 너의 동생도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나의 바람은 너뿐인데 너도 또한 배움이 성실치 않으니 성실치 않으면 실(實)지가 없을지라. 내가 말하는 실(實)이란 덕행(德行)을 말함이요, 화려한 재주를 말함이 아니라 그 덕행이 없으면 비록 칠보시(七步詩, 중국 위魏나라 조식曹植이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지은 詩)를 짓는 재주가 있은들 취할 바가 아니다.」

공이 이 훈계(訓戒)를 가슴에 새겨서 비록 적은 말과 조그마한 행동이라도 감히 삼가지 않음이 없다 하시다.
계사(癸巳, 성종 4, 1473년)에 생원공(生員公)이 별세(別世)하시니 슬퍼하심이 예(禮)에 지나치고 복(服)이 끝남에 모친의 명령으로 죽림사(竹林寺)에 들어가 글을 읽을새 한마을에 사는 배인(裵裀)이 같이 가서 공부함에 심신이 피곤함에 배씨(裵氏)는 책을 덮고 쉬는 데도 공은 밤이 새도록 쉬지 않으시고 몇 달이나 계속하시되 정력(精力)이 여전하시니 배씨(裵氏)가로되 「군(君)의 혈기(血氣)가 부지런하기를 사람에 지남에 이와 같은가.」 공이 답하여 가로대 「지극히 즐거움이 여기 있는데 어찌 되곤 하리오」 하시더라 매월 초하루에 모친을 뵈러 집에 오시어 한 달 읽은 글을 모친 앞에서 외우시되 한자도 그릇됨이 없어야 모친이 별찬(別饌)을 장만하여 주시고 극찬하였다.
정유년(丁酉年, 성종8 147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시고 서울에 우거(寓居)하실 때 하루는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과 더불어 달을 따라 행화방(杏花坊)에서 노시니 권경유(權景裕)가 공의 품위와 용모가 청수(淸秀)하심을 보고 맞아서 자리를 비켜 가로대 『자네는 티끌 세상 사람이 아니고 참으로 선학(仙鶴)이 인간에 왔다』라고 이르더라. 군요(君饒, 권경유權景裕)가 글을 먼저 사운(四韻)을 불음에 공이 응구첩대(應口輒對) 하니 참으로 진세(塵世)에서 뛰어난 태도인지라. 군요(君饒)가 매우 놀라 손을 잡고 앉아 밤이 새도록 글을 읊다가 아침에 보니 이에 배동(背洞)에 우거(寓居)하는 진사(進士) 이모씨(李模氏)라. 이 뒤로부터 막연한 벗이 되어 매양(每樣) 백공(伯恭, 남추강南秋江)과 군요(君饒, 권경유權景裕)로 더불어 노릉(魯陵, 단종端宗)의 지나간 일을 말하다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가 없으셨다.

을사년(乙巳年, 성종16 1485) 급제(及第)하시고 강목(綱目)을 글로 대답하셨으며 정미(丁未, 성종18 1487)에 정자(正字)로부터 이랑(吏郎)에 옮기셨다. 이해에 일본(日本) 사신을 맞을세 임금이 정조에 명하시기를 관문방어(關門防禦)가 심히 중요하고 또 저 나라 사신이 글재주가 있다 해서 엄격히 호송사(護送使)를 가릴세. 전조(銓曹, 인물 가리는 곳)에서 공을 철거하여 공이 임금 명을 받들고 동래현(東萊縣)에 이르러서 왜국(倭國, 일본) 사신이 공의 글씨와 그림을 얻고 극찬의 절을 하면서 가로대 처음으로 천하 보배를 얻었다 하더라.
겨울에 또 평안평사(平安評事)로 명령을 받으시고 상원군(祥原郡)에 이르시어 삼소도(三笑圖)란 시와 그림을 쓰셨더니 뒷날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이곳을 지나다가 보고 매우 놀라 가로대 이는 반드시 나의 친구 솜씨라 하였다. 무신(戊申)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제수받으시고 어세겸(魚世謙)의 추천으로 호당(湖堂)에 뽑히시고 여가를 얻어 글을 읽게(賜暇讀書) 하셨다.
임금이 환취정(環翠亭)에 행차할 세 공이 응제(應製, 임금의 물음에 응답하는 벼슬)로 우두머리에 계시니 명성이 자자하고 칼날을 다투는 자가 없으니 그때 공론이 제일가는 명망으로 추대하느니 조금 뒤에 정언(正言)에 배명(拜命) 되시다. 이때 신수근(愼守勤)이 처음으로 청현직(淸顯職)에 오르시니 공이 말하되 이는 외척(外戚)으로 권력을 잡을 징조라 해서 그 옳지 않음을 역간(力諫) 하시니 바른 소리가 조정에 진동하다. 임자(壬子)에 수찬(修撰)에 배명(拜命) 되시니 모친을 모시고 뵙고자 글을 올려 집에 돌아오시다.

계축(癸丑, 성종24 1493)에 검상(檢詳)으로부터 사인(舍人)에 승진하시고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 중국 수도인 베이징의 옛 이름)에 가실 때 사관(使館, 지금의 여관)의 병풍 그림이 낡은 것을 보고 심히 못마땅하게 여겨 붓으로 다 망쳐놓았더니 역관(譯官)이 통사(通使)를 불러서 물은즉 통사(通使) 가로대 서장관(書狀官)이 서화(書畫)를 잘하시니 반드시 그 뜻에 차지 않아서 이렇게 한 모양이라 대답하니 역관(譯官)이 수긍했는데 중국서 돌아오는 길에 그곳에 당도하니 새로 흰 병풍 두 개를 만들어 놓았거늘, 공이 하나는 글씨를 쓰고 하나는 그림을 그리시니 그 묘(妙)가 극에 이르니 보는 자 다 탄성을 하였다. 또 시율(詩律)로 중국 서울에서 그 명성을 울렸더니 뒷날 중국 사신이 왔을 때 그 글을 외쳤다 한다.

갑인(甲寅, 성종25 1494)에 의성현령(義城縣令)이 되니 그때 모친께서 기력이 강녕(康寧)하시어 벼슬에 계실 때 백성 사랑하라는 뜻으로 5언시(五言詩) 40수를 지어 공에 주시니 공이 절하고 받아 현(縣)에 도착하여 보시니 향교(鄕校)가 퇴락하거늘 터를 새로 구해서 옮겨 지으실 제 봉급을 털어 공사비에 보충하여 지으니 규모가 굉장한지라. 현내(縣內) 글 잘하는 사람을 불러 향중자제(鄕中子弟)들을 가르치게 하시어 시(詩)를 외우고 예(禮)를 익히되 옛날 법과같이 하시니 현송(絃誦, 거문고를 타면서 詩를 읊음)의 소리가 항상 들리는지라. 그 당시 사람들이 의성(義城)을 무성(武城)에 비유하면서 객관(客官, 숙소를 말함) 남쪽에 죽루(竹樓)를 짓고 공을 위하여 퇴근 후 휴식하시는 곳으로 정함에 기(記)를 지어 현판(懸板) 하시니 한때 문사(文士)들이 전해가며 외우고 소장에 글씨까지 명필이라 해서 읍 사람들이 보배로 여겨서 깊이 간직하였다 한다.

무오년(戊午年, 연산군4 1498)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계셨는데 이때 조정에서 류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이 청류명현(淸流名賢)들을 상(上, 임금님)에 모함(謀陷)하니 화(禍)가 조석(朝夕)에 있으나 공은 아무 걱정도 안 하시고 이망헌(李忘軒, 이주李冑)으로 더불어 행정(杏亭)에서 바둑을 두시니 바깥사람들이 와서 말하기를 붉은 옷을 입은 관인(官人)들이 동구(洞口)에 들어온다고 하거늘 좌우 사람들이 바둑을 거두어 치우라 한 데도 공이 조용히 가로대 잡으라는 명을 받지 않았으니 나는 죄인이 아니라 하시고 여전히 바둑을 두실 세. 조금 후에 금오랑(金吾郞, 죄인 잡는 관인)이 도착하거늘 공이 가로대

『노모(老母)가 계시니 작별할 시간을 달라』

하시매 금오랑(金吾郞)이 측은히 여겨 허락하였다.
모친께 절하시고 작별인사를 올리니 모친께서 옛날 범방(范滂, 중국 한나라 사람)의 일을 비유하시면서

『네가 죽을 자리를 얻었으니 내가 어찌 슬퍼하랴. 너는 죽기를 잘하고 내 생각은 조금도 말라』

하시다.

망헌(忘軒, 이주李胄)과 함께 잡혀서 국문(鞠問)당하는 날 안색이 조금도 변함이 없이 손으로 한일자(一)를 그어 장강(長杠, 길고 굵은 멜대) 모양을 만드시고 한 말씀도 없으셨다. 귀성(貴成)이란 종이 있었는데 능히 글도 알고 공의 신임을 받아 항상 따라다니더니 함께 국문을 당하는데 또한 땅을 그며 한 말도 없었다. 죄를 결정하는 날 곤장 80대를 맞고 북계(北界)로 귀양 가서 봉화(烽火) 불을 드는데 불 살리는 역을 담당하고 떠나갈 때 고산역(高山驛)을 지나게 되어

「고충자허중불여(孤忠自許衆不與, 외로운 충절을 남이 몰라준다는 뜻)라는 글 한수」를 벽 위에 써 붙이고 가신지라.

감사(監司)가 이를 나라에 알리되 연산군(燕山君)이 자기를 원망한다 해서 다시 잡아 죽이니 그때 조정이 두려워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고 홀로 홍귀달(洪貴達)이 글을 올려 구원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지라. 사형을 집행하는 날 공은 안색이 전일과 다름이 없고 다만 소리를 높여 가로대

『수양산(首陽山)이 멀고 머니 내가 칠 땅이 없구나』 하시니 듣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렸다 한다.

금계사망동(琴溪沙芒洞) 간좌(艮坐) 언덕에 안장하다.
부인은 영가권씨(永嘉權氏)니 아들이 없어 동생 공준(公準)의 셋째 아들 덕연(德淵)으로 봉사(奉祀)케 하니 공의 유언이신지라. 공은 용모가 단정하시여 맑은 물에 핀 부용(芙蓉)과 같으시고 지조는 결백하시어 빙호(氷壺)에 비친 가을 달과 같으시며 글은 활발하고 글씨는 절묘하며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문장들과 같은 체격(體格)이었고 또 노는 데도 여유가 있어 궁색함이 없으심이 천성에서 나시니 옛날 시인(詩人)들의 풍채가 있으셨으며 글과 글씨·그림과 음율(音律)·의약(醫藥)과 복서(卜筮)에 무불통지(無不通知)하시더라.
일찍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선생(金先生)을 스승으로 섬기심에 선생이 큰 그릇이라 보시고 가로대

『이모(李模)를 본 뒤로 흉금(胸襟)이 트는 것 같다』

하시더라.

정일두(鄭一蠧, 정여창鄭汝昌)·김한훤(金寒暄, 김굉필金宏弼)으로 더불어 도의(道義)의 벗을 하고 또 김탁영(金濯纓, 김일손金馹孫)·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 제현(諸賢)과 좋은 벗이 되시니 추강(秋江)이 가장공(家狀公)에게 공경하고 중히 여기신다.
무풍부정(茂豐副正, 왕족 이총李摠)이 공을 보고 기이히 여겨 가로대

『우리 동방에 시선(詩仙)이다.』

하면서 녹음(綠陰)과 홍엽(紅葉)때는 반드시 양화도(楊花渡)에 공을 영접(迎接)하여 달을 따라 배를 타고 글을 지으신 것이 백여 수에 이르시더라. 공이 일찍 홍유손(洪裕孫)을 보시고 탄식하시어 가로되 이 사람이 이런 기이한 재주와 높은 행실이 있으니 지위는 불구하고 더불어 사귐 직한 바라 하시니 홍씨가 이로 인하여 사림(士林)에 중요하게 보이다.

공이 어릴 때부터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고 비록 창졸(倉卒)간이라도 행동에 실수가 없으시며 그 경악(經幄, 글을 강론하는 곳)에 있어 강의하시고 의논하실 때는 하남부자(河南夫子,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 선생을 말함)의 법을 따랐고 상대(霜臺, 정언正言 간관諫官)에 계실 때는 바른말 하는 것이 한나라 조정에 장유(長孺, 중국의 급암汲黯이란 사람)에 부끄럼이 없으셨고 활달하고 밝은 의논은 해동(海東) 노연(魯連, 제齊나라 노중련魯仲連)이라 하였다. 아름다운 날과 착하신 행실이며 웅장하든 글과 건장유력(建章有力)한 필법이 후세에 전하지 못한 것은 사화(史禍)를 당한 집인 탓이리라. 겨우 보고 들은 것을 모아 눈물을 섞어 이 글을 쓰고 후일 명필군자(名筆君子)의 채술(采述)을 기다리노라.

*경주이씨 월성군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