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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신공 이진] 高麗宰臣紫金魚袋慶州李公祀壇碑銘(고려재신자금어대경주이공사단비명) 并序(병서)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0. 11. 14. 18:55

□재신공 이진(宰臣公 李縉)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②재신공(宰臣公) 진(縉)

 

高麗宰臣紫金魚袋慶州李公祀壇碑銘 并序
(고려재신자금어대경주이공사단비명 병서)
-宗裔孫 鍾醇 謹撰(종예손 종순 근찬)

維大嶺蔚州郡凡西面芝地里卽高麗宰臣紫金魚袋慶州李公後孫世居之鄕也苗裔相壽相石元熙佑炯等以其墓失其傳瞻仰無所齎恨者久矣歲丁卯春就洞之後岡枕原而設爲祭壇薦邊豆注欝鬯於是乎祖先在天之靈洋洋來格駿奔拜酹僾然惕然之誠伸矣事旣畢相與謀曰此不可以無記將伐石以堅之走其同派龍濬訪余於湖西之大田㝢舍索余之文以余撰其先考月城君碑銘故也安得以辭之謹按慶州之李東方舊族自始祖諱謁平以楊山村長推戴羅王受姓受實世仍貴顯得骨之稱後世有諱金書三韓功臣歷累代諱申佑兵部侍郎國子進士昌規國子進士賁兵部尙書忠堯金紫光祿大夫月城君之秀金貞女高曾祖稱與妣也公諱縉舊譜載以宰臣紫金魚袋麗制從一品職通稱宰臣則公之官非不貴矣生卒配位居官履歷俱無考麗革之際史乘之多佚固如是耶有二子乙休無后次光聃司儀署令司議又有二子仲林判尹至後孫入爲長派慵齋公后臣輔常嶺判官曾孫自英修義校尉玄以下不錄竊念公以勝朝藎臣官至上卿立朝居家籌策謨猷之可書者多而歲經半千杳若書契以前事籍何以爲銘後孫流落單寒之餘庄占安堵大開門戶淳謹且報本致誠於玄遠之祖如是其深切視今之浸於西敎父祖之近焚戶却祭而不顧者不啼天壤昌大之期其在斯歟近者月城君派譜宗族捐財起義創建院宇於湖南之扶安鄕扁以津陽公亦從享云耳銘曰
月城之子麗朝上卿杞宋無徵半千年經壇之享之賢裔致誠洋洋來格在天之靈我述銘辭昭示千齡

光復後四十二年丁卯陽月下澣


●고려재신자금어대경주이공사단비명 병서 역문
(高麗宰臣紫金魚袋慶州李公祀壇碑銘 并序 譯文)
-종예손 종순 근찬(宗裔孫 鍾醇 謹撰)

울주군(蔚州郡) 범서면(凡西面) 지지리(芝地里)는 고려(高麗) 재신(宰臣) 자금어대(紫金魚袋) 경주이공(慶州李公) 후손의 살아온 고향이라. 후손 상수(相壽)·상석(相石)·원희(元熙)·우형(佑炯) 등이 그 분묘를 실전(失傳)해서 한(恨)을 품은 지 오래더니 정묘년(丁卯年) 봄에 뒤 언덕에 터를 닦고 제단(祭壇)을 놓고 제물을 진설(陳設)하고 강신(降神)술을 부으니 하늘에 계시는 조상님의 혼령이 오시는 것 같은지라. 달려와서 절하고 잔 드리니 맺혔던 한이 풀리는 것 같은지라. 제사가 끝날 때 서로 의논하기를 이일은 반드시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의견을 모아 비석을 세워 글을 새기고자 그 파(派)내 족친(族親) 용준(龍濬)을 호서대전(湖西大田) 나의 집을 찾게 하고 나에게 글을 청하니 아마 내가 월성군(月城君) 비명(碑銘)을 지은 관계라 어찌 사양하리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동방(東方)에서 오래된 씨족이라 시조(始祖) 알평공(謁平公)이 양산촌장(楊山村長)으로 신라왕을 추대하고 성(姓)과 관향(貫鄕)을 받아 귀(貴)히 되어 진골(眞骨)의 칭호를 받아 후세에 휘 금서(金書)가 있으니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고 몇 대를 지나 휘 신우(申佑)는 병부시랑(兵部侍郎)이고 국자진사(國子進士) 창규(昌規)와 국자진사(國子進士) 분(賁)과 병부상서(兵部尙書) 충요(忠堯)와 금자광록대부월성군(金紫光祿大夫月城君) 지수(之秀)가 고조(高祖)·증조(曾祖)·조부(祖父)가 되고 김정(金貞)의 따님이 선비(先妣)가 된다.


공(公)의 휘는 진(縉)이니 옛 족보(族譜)에 재신자금어대(宰臣紫金魚袋)라고 실려있으나 아마 고려 벼슬 제도에 일품직(一品職)을 재신(宰臣)이라 통칭한 것 같으니 공의 벼슬이 높은 것은 사실이나 생년(生年)·졸년(卒年)과 배위(配位) 성씨와 벼슬하는 동안 이력(履歷)이 한 가지도 전하지 않으니 고려와 조선 건국 조가 바뀌는 사이 역사의 탕일(蕩逸) 함이 이 같을쏜가.


공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長)에 을휴(乙休)는 무후(無后)하고 차(次)에 광담(光聃)은 사의서령(司儀署令)이었고 서령(署令)이 또 이자(二子)를 두니 장(長)에 중림(仲林)은 판윤(判尹)이니 뒷날 자손이 용재공파(慵齋公派)로 양자(養子) 갔고 차자(次子) 신보(臣輔)는 판관(判官)이고 증손(曾孫)은 자영(自英)이니 수의교위(修義校尉)요, 현손(玄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하노라. 생각건대 공이 증세구신(症勢具臣)으로 벼슬이 상경(上卿)에 이르니 조정에서나 집에서나 나라 위해 계책을 세우고 자손을 위해 꾀를 한 것이 많으련만 세월이 반 천년을 지나니 아득하기가 글 없을 때와 같으니 무엇을 참고로 비명(碑銘)을 지으리오.


후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살다가 지금은 고향을 개설하여 문호(門戶)를 열고 옛 조상을 추모하는데 성력(誠力)을 다하니 요즈음은 서양풍속이 침입하여 부조(父祖)의 가까운 조상도 시신을 불태우고 제사(祭祀)를 궐하는 자 천지간에 많은 것만은 공의 문중은 앞으로 창성(昌盛)할 조짐이 완연도다. 근자에 월성군파(月城君派) 모든 족친(族親)이 의연금(義捐金)을 모아 호남부안(湖南扶安) 땅에 서원(書院)을 지어 진양서원(津陽書院)이라 하고 공이 또한 입향(入享)되었다.


명왈(銘曰)

월성군(月城君)의 아들이요. 고려조(高麗朝)에 상경(上卿)이라 사적(事蹟)이 인멸(湮滅)하니 오백 년이 지났도다. 단(壇)을 모아 치향(致享) 하니 자손들의 정성이로다. 하늘에 계신 혼령(魂靈)이시여 기꺼이 흠향(歆饗)하시니 내 이 글을 지어 천추(千秋)에 보이노라.

 

광복후 사십이년정묘 양월하한(光復後四十二年丁卯陽月下澣)
종후손 이종순 근찬(宗後孫 鍾醇 謹撰)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