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게시판/기◆행장◆비명

[정렬공 이규] 先祖貞烈公事績(선조정렬공사적) <역문>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20. 11. 14. 18:25

□정렬공 이규(貞烈公 李揆)

 

【계대(系代)】 ①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 1世孫 ①정렬공(貞烈公) 규(揆)

 

先祖貞烈公事績(선조정렬공사적)
-二十一世孫(21세손) 東鎬(동호) 泣血謹編(읍혈근편)

府君 諱는 揆이고 月城君派 派祖 諱 之秀府君의 二男中 長男이며 金貞의 外孫으로 高麗 二十五代 忠烈王 때 大護軍을 거쳐 一三二四年(二十七代 忠肅王 十一)에 右代言(右承旨: 正三品 堂上官)으로 이듬해(一三二五年) 忠肅王의 第三妃 曺國長公主(元의 魏王阿木歌의 딸)가 죽자 告訃使로서 元나라에 갔다. 一三二七年 密直副使(樞密副使: 正三品)로서 앞서 元나라에 五年동안 抑留되었던 忠肅王을 爲하여 王位를 노리던 瀋陽王暠(忠烈王의 孫子)의 무리가 元나라에 忠肅王을 誣告하는 등 갖은 惡略을 智謀로써 물리쳐 王의 禍를 모면케 하는 등 忠誠을 다한 勳績으로 二等功臣이 되고 이듬해 一三二八年에 元나라에 가서 改元(年號改稱)을 祝賀했다. 一三三0年(二十八代 忠惠王 卽位) 門下評理(僉議參理, 僉議平理: 正二品)에 昇進, 一三三二年 忠肅王이 復位한 후는 忠惠王의 襲位를 爲해 盡忠한 誠意에 보람이 있어 一三三九年에 忠惠王이 復位하였다. 一三四六年(二十九代 忠穆王 二)에 忠惠王 廟庭에 配享. 諡號는 貞烈.

 

傍先祖 文忠公 益齋先生과 並擧로 忠烈·忠宣·忠肅·忠惠王등 四代를 걸쳐 五十餘年間 紀元 以來 國內外 政勢가 極度로 混亂할 때 竭力 盡忠한 赫赫한 功績이 枚擧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것이라 推想되오나 後裔로 五世孫人 忠愍公 諱 命敏 傍祖는 一四五四年 端宗 癸酉靖難에 아들 三兄第와 四父子가 被禍되고, 六世孫인 慵齋 諱 宗準 府君은 一四九八年(燕山君 四) 戊午史禍에 被禍되는 등 兩大 史禍로 因하여 子孫들이 救命圖生의 一策으로 所藏을 蕩失하였으니 府君의 生卒拜位墓所 등은 全然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高麗史烈傳에 依한 略史를 考證으로 그 功績을 略述할 뿐이니 참으로 痛惜하고 痛感하여 措辞가 錯雜하니 後世 秉筆之任을 期待巳矣라.

 

一九八八年 戊辰 孟夏에 二十一世孫 東鎬 泣血謹編

 

●선조정렬공사적(先祖貞烈公事績) 역문(譯文)
-21세손(二十一世孫) 동호(東鎬) 읍혈근편(泣血謹編)

부군(府君) 휘는 규(揆)이고 월성군파(月城君派) 파조(派祖) 휘 지수부군(之秀府君)의 2남 중 장남이며 김정(金貞)의 외손으로 고려(高麗) 25대 충렬왕(忠烈王) 때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1324년(27대 충숙왕忠肅王 11)에 우대언(右代言, 우승지右承旨: 정3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으로 이듬해(1325년) 충숙왕(忠肅王)의 제3 비(妃) 조국장공주(曺國長公主, 원元의 위왕아목가魏王阿木歌의 딸)가 죽자 고부사(告訃使)로서 원(元)나라에 갔다.

 

1327년 밀직부사(密直副使, 추밀부사樞密副使: 정3품正三品)로서 앞서 원(元)나라에 5년 동안 억류(抑留)되었던 충숙왕(忠肅王)을 위하여 왕위(王位)를 노리던 심양왕 고(瀋陽王暠, 충렬왕忠烈王의 손자孫子)의 무리가 원(元)나라에 충숙왕(忠肅王)을 무고(誣告)하는 등 갖은 오약(惡略)을 지모(智謀)로써 물리쳐 왕(王)의 화(禍)를 모면케 하는 등 충성을 다한 훈적(勳績)으로 이등공신(二等功臣)이 되고 이듬해 1328년에 원나라에 가서 개원(改元, 연호개칭年號改稱)을 축하했다. 1330년(28대 충혜왕忠惠王 즉위) 문하평리(門下評理, 첨의참리僉議參理, 첨의평리僉議平理: 정2품正二品)에 승진, 1332년 충숙왕(忠肅王)이 복위한 후는 충혜왕(忠惠王)의 습위(襲位)를 위해 진충(盡忠)한 성의에 보람이 있어 1339년에 충혜왕(忠惠王)이 복위하였다. 1346년(29대 忠穆王 2)에 충혜왕(忠惠王)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시호(諡號)는 정렬(貞烈).

 

방선조(傍先祖) 문충공(文忠公) 익재선생(益齋先生)과 병거(並擧)로 충렬(忠烈)·충선(忠宣)·충숙(忠肅)·충혜왕(忠惠王) 등 4대를 걸쳐 56여 년간 기원(紀元) 이래 국내외 정세가 극도로 혼란할 때 갈력(竭力) 진충(盡忠)한 혁혁(赫赫)한 공적(功績)이 매거(枚擧)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것이라 추상(推想)되오나 후예(後裔)로 5세손인 충민공(忠愍公) 휘 명민(命敏) 방조(傍祖)는 1454년 단종(端宗)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아들 3형제와 4부자(父子)가 피화(被禍)되고, 6세손인 용재(慵齋) 휘 종준(宗準) 부군(府君)은 1498년(燕山君 4) 무오사화(戊午史禍)에 피화(被禍)되는 등 양대 사화(史禍)로 인하여 자손들이 구명도생(救命圖生)의 일책(一策)으로 소장(所藏)을 탕실(蕩失)하였으니 부군(府君)의 생졸배위묘소(生卒拜位墓所) 등은 전연(全然)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고려사열전(高麗史烈傳)에 의한 약사(略史)를 고증(考證)으로 그 공적(功績)을 약술(略述)할 뿐이니 참으로 통석(痛惜)하고 통감(痛感)하여 조사(措辞)가 착잡(錯雜)하니 후세(後世) 병필지임(秉筆之任)을 기대사의(期待巳矣)라.

 

1988년 무진(戊辰) 맹하(孟夏)에

21세손 동호(東鎬) 읍혈근편(泣血謹編)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파보(月城君派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