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용재유고이종준

[慵齋遺稿] [附錄] 鏡光記事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9:10

용재유고(慵齋遺稿) / 附錄


鏡光記事

◦鏡光書院上樑文 申悅道

恭惟 慵齋李先生。節槩眞淸。文章大雅。騰望實於朝右。領袖一時。擅名華於中夏。膾炙三絶。秋霜烈日於諫諍之際。惠雨和風於字牧之辰。惟其逢世不祥。以致凶徒搆孼。長途未返於千里。空抛經綸。殄瘁莫贖於百身。竟伏斧鑕。至今士林之扼腕。長吁彼蒼之難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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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집(懶齋集)은 나재(懶齋) 신열도(申悅道)의 文集이다.
○신열도(申悅道) 1589년(선조 22)~1659년(효종 10). 자는 진보(晉甫), 호는 나재(懶齋)이고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김응조(金應祖), 김세렴(金世濂), 장응일(張應一) 등과 교유.

*참조: 한국문집총간 > 나재집 > 懶齋先生文集卷之六 > 上梁文 > 鏡光書院上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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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열도(申悅道)(1589-1647)가 지은 상량문(上樑文).
이종준이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으면서도 상서롭지 못한 세상을 만나 죽임 당한 일을 사림(士林)이 분격해한다고 적음.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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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량문上梁文
나재懶齋 신열도申悅道1)

선현先賢이 사람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이미 인도하고 도와주는 모범을 드리우시니 후학이 마땅히 사당에 제향하여 높이고 보답하는 방도를 어찌 감히 늦추랴. 문득 들보와 지붕이 날듯이 선 모습을 보고 원근의 사람들이 축하하는 말을 다투어 올리도다. 아, 우리 큰 고을 영가永嘉(안동)는 실로 우리 동방의 추로鄒魯2)가 되는 고장이로다. 산수가 아름답고 빼어나니 얼마나 많은 영웅호걸을 잉태하고 길렀나. 풍속이 순후하고 아름다우니 평소 인재가 성대하게 일어나는 곳이라 일컬어지도다.
삼가 생각건대, 용재 이 선생은 절개가 참으로 맑고 문장이 매우 전아하였도다. 명망과 실제가 조정에서 높아 일시의 영수가 되었고, 명성을 중국에 떨쳐 삼절三絶이라 회자되었도다. 간쟁할 때는 가을 서리 같고 빛나는 해 같았으며, 사랑으로 백성을 다스릴 때는 은혜로운 비와 온화한 바람 같았도다. 상서롭지 못한 시대를 만나 흉악한 무리가 재앙을 얽어매니 천 리 먼 길을 반도 가지 못하여 부질없이 경륜을 저버렸도다. 온몸이 죄를 벗어나지 못하여 마침내 죽음에 내맡겨지니 지금까지도 사림이 애석하게 여기며 저 하늘이 진실하지 못한 것을 길이 탄식하도다.
그리고 우리 경당敬堂 장공張公(장흥효張興孝)은 하늘로부터 받은 자질이 참되고 바르며, 성품은 평소 바르고 참되었도다. 학봉鶴峯(김성일金誠一)과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 나아가 일찍이 학문의 맥락을 알았고 복희씨 『주역』을 깊이 탐색하여 본원本原을 환히 파악하였도다. 주자학의 단전單傳3)을 뒤좇아 당堂을 경敬이라 이름 걸었고, 염계濂溪의 개인 달과 같은 흉금을 지녀 누대에 이를 따라 이름을 지었도다.4) 원회운세元會運世를 그림으로 그려 미묘한 이치를 끝까지 궁구하였고, 음양소장의 이치에 대해 시종을 환히 밝혔도다.5) 이 어찌 언어 문자에만 얽매이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이랴. 나이 많고 학식이 높은 선비라 해도 모두 미치지 못할 경지로다. 꼿꼿이 앉아 책 읽기에 힘써 늘 책 속의 성현을 대하였고 순순히 사람을 가르치니 늘 방문 밖에는 늘어선 신발이 가득했도다. 대그릇 밥과 표주박의 물로 가난한 마을에 살면서도 스스로 즐기며 부유하고 귀한 것을 뜬구름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었네. 은택을 백성에게 끼치는 것은 비록 당시에 포부를 펼치지 못하였으나 사람에게 선을 미치니 후세 학자들이 높이 우러르는 스승이라고 말할 만하도다.
생각건대, 이 두 현인이 태어나신 곳은 실로 한마을 안이로다. 시대와 세상은 선후가 있으나 도는 하나로 같고, 경지에 이른 것은 얕고 깊음이 있으나 덕은 또한 다름이 없다네. 그분들의 문채와 풍류는 오래될수록 사라지지 않고, 남은 법도와 끼친 가르침은 세상이 없어질 때까지 남으리라. 산처럼 북두칠성처럼 우러러보는 마음은 실로 훌륭한 본성에서 나왔고, 마음으로 기뻐하고 정성으로 따르는 것은 대개 깊이 가르침에 무젖음에서 말미암도다. 이에 마을 사당의 옛 법도를 살펴 제향할 새 사당을 창건하도다.
경영하고 계획하니 문인의 후손이 정성을 다하고, 공사에 분주히 힘쓰니 불러 모은 장인들이 힘을 다하도다. 큰 나무로는 들보를 만들고 가는 나무로는 서까래를 만드니 길고 짧은 것이 각기 법도를 따르고, 곱자는 모나고 그림쇠는 둥글어 먹줄이 정도에 어긋나지 않도다. 큰 계획은 다섯 칸보다 커서 중천에 우뚝하고, 성대한 제도는 여섯 자보다 넓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도다. 밝으신 영령이 길이 빛나는 제향을 받게 되니 오르내리셔서 국과 담장6)에 보이는 듯하고, 우리는 의지할 곳을 얻으니 들리는 듯한 기침 소리 완연히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만 같도다. 백대의 가르침을 길이 세웠으니 이어가며 어여차[邪許] 노래7)를 청하고, 온 나라가 따를 모범이 여기에 있으니 감히 아랑위兒郞偉의 노래8)를 부르도다.

제물을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 抛梁東
상서로운 해 아침마다 푸른 하늘에 떠오르네 瑞日朝朝上碧空
이 해와 같이 이 마음을 일깨워 提掇此心如此日
먼지와 찌꺼기를 가슴속에 남기지 말라 莫敎塵滓留胸中

제물을 들보 서쪽으로 던지니 抛梁西
만 길 학가산이 하늘과 나란하구나 萬仞鶴峯天與齊
덕업이 넓고 높아 하늘처럼 우뚝하니 德業廣崇侔峻極
우리는 힘써 따르려고 해야 하리라 勉旃吾黨須攀躋

제물을 들보 남쪽으로 던지니 抛梁南
긴 강물 곧장 서애의 물가에 닿아 있도다 長江直抵西厓潭
물결은 하락9)과 통하고 수사10)를 거스르니 波通河洛泝洙泗
성리학의 연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도다 性理淵源此可尋

제물을 들보 북쪽으로 던지니 抛梁北
움직이지 않는 한 개 별을 북극이라 하도다 一辰不動名爲極
우리 사람의 극11)은 마음에 있나니 吾人之極在於心
지극히 바르고 지극한 중도라서 헤아릴 수 없도다 至正至中要不測

제물을 들보 위로 던지니 抛梁上
구만 리 검은 하늘 언제나 우러르도다 九萬玄天常在仰
원래 말이 없으니 무엇을 말하랴 從來幽黙何言哉
지극한 이치 밝고 밝아 잠시도 망령됨이 없도다 至理昭昭無暫妄

제물을 들보 아래로 던지니 抛梁下
이 도를 평소에 아는 자 적도다 此道平常知者寡
성인 되는 실마리는 효성과 공손함에서 구해야 하니 作聖端由孝悌求
일상에서 늘 행한다면 참으로 거짓이 아니리 常行日用誠非假

삼가 바라건대, 상량을 한 뒤로 풍속이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들은 시와 예를 익혀 문운文運이 크게 열려 도학을 숭상해야 할 줄을 모두가 알고, 선비의 기풍이 번창하여 사람의 기강을 세울 수 있음을 함께 알게 되기를. 제향하여 예의에 허물이 없고 봄가을의 향사享祀를 빠트림이 없어, 헛된 꾸밈에 종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름지기 실지의 덕을 숭상하며, 말단의 기예에 내달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참된 마음 전하기를. 마땅히 더욱 용재공의 모범을 체득해야 할 것이나 어찌 감히 경당자敬堂子의 가르침을 잊으랴.12) 우리에게 끊임없이 빛나고 밝은 은혜를 끼쳐 이에 바른 학문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이러한 【원문빠짐】 없는 정성과 공경을 바쳐 참된 선비가 무리지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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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열도(申悅道, 1589∼1659) : 자는 진보(晉甫), 호는 나재(懶齋),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1624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장령을 지냈다. 저서로는 『선사지(仙槎志)』와 『문소지(聞韶志)』가 있다.

2) 추로(鄒魯) : 추나라는 맹자의 고향이고, 노나라는 공자의 고향인 데서, 예의와 학문이 성대한 지역을 가리킬 때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한다.

3) 단전(單傳) : 불가 선종(禪宗)에서 불법을 전하는 방법으로, 오직 한 갈래로 전한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정주(程朱)의 도학(道學)이 전해온 학맥을 말한다.

4) 당(堂)을……지었도다 : 장흥효(張興孝)의 『경당집속집(敬堂集續集)』 권2 「경당설구기(敬堂說求記)」에 따르면, 정자(程子)의 뜻을 취하여 ‘경(敬)’ 자로 당(堂) 이름을 짓고 호로 삼았으며, 주자(朱子)의 뜻을 취해 정자를 ‘광풍정(光風亭)’이라 하고 대(臺) 이름을 ‘제월대(霽月臺)’라 했다는 말이 있다.

5) 원회운세(元會運世)를……밝혔도다 : 원회운세란 송(宋)나라 소옹(邵雍)이 편찬한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설로 1세(世)가 30년, 1운(運)이 360년, 1회(會)가 1만 800년, 1원(元)이 12만 9600년이 되는 계산법을 통해 우주가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학설을 말한다. 음양소장의 이치란 우주의 원기(元氣)가 음과 양이 서로 상대하여 양이 성하면 음이 사라지고 음이 성하면 양이 사라지는 현상을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장흥효가 12월을 배열하고 24절후를 분배하고, 원회운세와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그 위에 더하여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를 만들자, 장현광(張顯光)이 “참으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라고 하였다.

6) 국과 담장 : 늘 사모하여 잊지 않는 것을 말한다. 요(堯)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임금이 담장을 대해도 요임금의 모습이 보이고 국을 대해도 요임금이 보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後漢書』 卷63 「李杜傳」)

7) 어여차[邪許] 노래 : 여우(與謣)·우여(謣與)도 같은 말로, 무거운 것을 들 때 힘을 내도록 권하는 소리다. 『시경』 「소아(小雅)·벌목(伐木)」에 “나무를 베며 허허 소리를 한다.[伐木許許]”라는 말이 있다.

8) 아랑위(兒郞偉)의 노래 : 육위송(六偉頌)이라고도 한다. 집을 지을 때 들보를 올리게 되면 도목수가 동서남북상하 여섯 방위에 만두를 던지며 ‘젊은이들아[兒郞偉]’라는 시를 읊으며 송축하던 데서 유래하는 일종의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을 말한다.

9) 하락(河洛) : 하수(河水)와 낙수(洛水)의 병칭으로 낙양(洛陽)을 가리키는데, 북송(北宋)의 정자(程子) 형제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이들을 지칭하며, 정주학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10) 수사(洙泗) :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두 개의 강물 이름 곧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로, 이 두 강의 사이에서 공자가 제자를 데리고 학문을 강론했기 때문에 유가(儒家)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11) 사람의 극(極) : 인극(人極) 또는 민극(民極)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윤리도덕에 있어서 최고 표준 혹은 최고 원리를 말한다.

12) 잊으랴 : 원문은 ‘望’ 자이지만 내용으로 보아 1960년에 재판(再版)한 경자년(庚子年) 석인본(石印本)에 근거하여 ‘忘’ 자로 고쳐 번역하였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용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상량문上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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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安文 金鶴沙應祖

鶴駕之陽。金溪出焉。彬彬蹈武。地靈人傑。柏竹挺生掛冠高蹈。慵齋繼作。業傳明師。才驚中夏。道觸駭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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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응조(金應祖)(1587-1667)가 지은 봉안문(奉安文).
이종준의 일생을 간략히 적어 놓았으며 그 재주와 추상(秋霜)같은 뜻을 잊지 못한다고 함.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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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沙集] 金溪里社奉安文 後改號鏡光

鶴駕之陽。金溪之北。彬彬踵武。地靈人傑。柏竹挺生。掛冠高蹈。天地變化。益勵其操。慵齋繼作。業傳明師。才驚中夏。道觸駭機。敬堂晩出。力學安貧。蒭豢經籍。訓誨我人。前後相望。餘二百祀。傳芳襲美。萃于一里。聞風猶興。矧伊親炙。少長同辭。可祭於社。樂彼空谷。有儼廟宇。涓吉妥靈。寔陳俎豆。風流如昨。謦欬疑聞。課忠責孝。有裨斯文。香煙䙚䙚。陟降洋洋。遺芬未沫。淸洛流長。

*참조: 학사집(鶴沙集)에는 金溪出焉。→金溪之北。, 香煙裊裊。→香煙䙚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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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집총간 > 학사집 > 鶴沙先生文集卷之六 > 祭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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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집(鶴沙集)은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의 文集이다.
○김응조(金應祖) 1587년(선조 20)~1667년(현종 8).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아헌(啞軒)이고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유성룡(柳成龍), 장현광(張顯光), 정경세(鄭經世)의 문인(門人).

*참조: 한국문집총간 > 경당집 > 敬堂先生文集卷之二 > 附錄 > 奉安文[金應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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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집(敬堂集)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文集이다.
○장흥효(張興孝) 1564년(명종 19)~1633년(인조 11). 자는 행원(行原), 호는 경당(敬堂)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특기사항: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정구(鄭逑)의 문인(門人). 최현(崔晛)과 교유.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외조(外祖).


춘파리사 봉안 축문春坡里社奉安祝文1)
학사鶴沙 김응조⾦應祖

학가산 남쪽에 鶴駕之陽
금계촌이 나와 金溪出焉
성대하게도 인재가 줄지어 나오니 彬彬踵武
땅은 신령스럽고 인물 걸출하도다 地靈人傑
잣나무 대나무처럼 빼어났으나 栢竹挺生
벼슬 그만두고 고고하게 지냈고 掛冠高蹈
천지가 뒤바뀌자 天地變化
그 지조 더욱 힘썼도다 益勵其操
용재가 이어서 일어나 慵齋繼作
밝은 스승에게 학업을 전수받아 業傳明師
재주는 중국을 놀라게 하였으나 才驚中夏
세상의 도가 갑작스런 화를 만났도다 道觸駭機
경당2)이 늦게 나와 敬堂晩出
학문에 힘쓰며 안빈낙도하였고 力學安貧
경서를 맛있는 음식처럼 여기며 芻豢經籍
우리를 가르치고 깨우쳤도다 訓誨我人
앞뒤로 서로 이어 前後相望
이백여 년을 제향하니 餘二百禩
전해 받은 향기와 아름다움 傳芳襲美
한마을에 모였도다 萃于一里
바람결에 듣고도 마음 일으키는데 聞風猶興
직접 가르침 받은 경우임에랴 矧爾親炙
젊은이나 어른이나 같은 말로 少長同辭
사당에 제향할 만하다고 하도다 可祭於社
즐겁게도 저 빈 골짜기에 樂彼空谷
엄연히 사당이 있어 有儼廟宇
길한 날을 가려 영령을 모시고 涓吉妥靈
제기를 진설하도다 寔陳俎豆
풍도는 어제 같고 風流如昨
기침 소리 들리는 것만 같아 謦欬疑聞
충효를 가르치고 권하여 課忠責孝
이 유학의 도를 돕도다 有裨斯文
향 연기 끊임없이 이어지고 香烟裊裊
영령께서는 오르내리시니 陟降洋洋
남은 향기 사라지지 않아 遺芳未沫
맑은 낙동강처럼 길이 흐르리라 淸洛流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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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파리사 봉안 축문(春坡里社奉安祝文) : 김응조(金應祖)의 학사집(鶴沙集) 권6에는 「금계리사봉안문(金溪里社奉安文)」으로 수록되어 있다.

2) 경당(敬堂) :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호이다. 자는 행원(行源),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김성일(金誠一), 류성룡(柳成龍)을 사사하였다. 과거를 보지 않고 도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제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사후에 지평에 추증되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당집』이 있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용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춘파리사 봉안 축문春坡里社奉安祝文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常享祝文 撰同

業傳明師。志勵秋霜。廉頑立懶。百世不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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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준을 제사지낼 때 쓴 축문(祝文).
이종준의 추상(秋霜)같은 뜻을 기림.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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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향 축문常享祝文
이우당⼆愚堂 권환權寏1)

학업은 밝은 스승에게 전수받았고 業傳明師
뜻은 굳세어 가을 서리 같았도다 志勵秋霜
맑은 절개로 사람들을 감화하니 廉頑立懦
백세토록 잊혀지지 않으리라 百世不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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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환(權寏, 1580∼1651) : 자는 택보(宅甫), 호는 이우당(二愚堂),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63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고 1646년 강원 도사를 역임하였다. 전형적인 청백리이다.

2) 맑은……감화하니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처럼 맑은 절개로 사람들을 감화시켰다는 말이다. 『맹자』「진심 하(盡心下)」에서 “백이의 풍도(風度)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감화를 받아서 탐욕스럽던 사람도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들도 뜻을 확고히 세우게 된다.[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용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상향 축문常享祝文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二愚堂先生文集] 鏡光書院常享祝文

時危高蹈。世易特立。淸風百代。起我後學。 [右柏竹堂裴先生]
業傳明師。志勵秋霜。廉頑立懦。百世不㤀。 [右慵齋李先生]
早承師訓。力學安貧。敎誨不倦。惠我後人。 [右敬堂張先生]

◈이우당선생문집(二愚堂先生文集)은 권환(權寏)의 시문집이다.
○권환(權寏) 1580년(선조 13)~1652년(효종 3). 자는 택보(宅甫), 호는 이우당(二愚堂)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출처: 유교넷. 이우당선생문집(二愚堂先生文集) > 二愚堂先生文集卷之三 > 鏡光書院常享祝文
http://www.ugyo.net/yk/gds/gdsKisaView.jsp?B_SUJI_ID=KSAC_M_A07000218&B_BOOK_ID=KSAC_T_A07000218_002&B_KWON_ID=001&B_STYLE_ID=004&iPage=1&B_KISA_ID=00025


柏麓常享祝文

天分之高。筆翰之逸。道消名流。遺芳益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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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록사(栢麓社)에서 이종준을 제사지낼 때 쓴 축문(祝文).
이종준의 재주를 기림.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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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리사 상향 축문栢麓里社常享祝文

天分之高。筆翰之逸。道消名流。遺芳益烈。 右慵齋先生 位
行著鄕邦。俗變文明。景仰遺風。永世椒馨。 右訥齋先生 位


타고난 자질 높고 天分之高
문필이 뛰어났도다 筆翰之逸
도가 쇠퇴해도 이름 전해져 道消名流
남긴 향기 더욱 짙도다 遺芳益烈

행실이 고장에 드러나니 行著鄕邦
풍속이 문명하게 변했도다 俗變文明
남긴 풍도 우러르니 景仰遺風
영원히 향기로우리라 永世椒麘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용재선생유고 / 눌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백록리사 상향 축문栢麓里社常享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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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題時祭文 李簠

恭惟 聖朝。表旌忠賢。洗滌幽枉。峻加官職。玉署華秩。 寵我先生。道光儒林。恩賁泉扃。今茲改題。簪裾畢集。惠我光明。永世無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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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보(李簠)(1629-1710)가 지은 제문(祭文).
이종준이 홍문관직에 증직되었을 때 씀.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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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증을 받은 뒤 신주를 다시 쓸 때의 축문[追贈後改題時祝文]
경옥景玉 이보李簠1)

삼가 생각건대 거룩한 조정이 恭惟聖朝
충신과 현인을 표창하여 드러내니 表旌忠賢
묻혔던 억울함이 씻겨졌고 洗滌幽枉
높이 관직을 더하였도다 峻加官職
홍문관의 훌륭한 관직으로 玉署華秩
우리 선생께 은총이 내리니 寵我先生
도는 유림에 빛나고 道光儒林
은혜는 저승 문에 빛나도다 恩賁泉扃
이번에 신주를 다시 쓰니 今茲改題
선비들이 다 모였도다 簪裾畢集
빛나는 은택을 우리에게 주셔서 惠我光明
영원하고 무궁하게 해 주소서 永世無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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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보(李簠, 1629∼1710) : 자는 신고(信古), 호는 경옥(景玉),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김응조(金應祖)에게 수학하였다. 1676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과거 응시자들의 난동으로 파방(罷榜)되었다. 1691년 사옹원 참봉에 임명되어 잠시 부임했다가 귀향하였다. 배상지(裵尙志), 이종준(李宗準), 장흥효(張興孝)에 대한 조정의 예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서술하여 경광서원에 위패를 모실 수 있도록 관작을 추증해 줄 것을 요청한 「경광서원 삼현청증소(鏡光書院三賢請贈疏)」가 있다. 저서로는 『경옥집』이 있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용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추증을 받은 뒤 신주를 다시 쓸 때의 축문[追贈後改題時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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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野會通略


中宗丙子。追奪李承健爵。 上命書進戊午壁書及事實。政院啓戊午李宗準配富寧。至端川磨谷驛。壁上題宋李師中贈唐介詩。監司李承健。令端川郡守囚鞫宗準。遂馳啓宗準與茂豐副正摠同行。寫詩于壁。宗準以宗直門徒坐謫而猶不懲。托古詩而寓己意。不可不問云云。 上曰。承健之無狀。一至此乎。遂有是命。 正德四年己巳七月初三日。 命還李宗準籍沒財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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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오사화때 이종준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가다가 시(詩)를 지어 놓은 일을 조정에 보고한 이승건(李承健)(1452-1502)의 관작이 1516년(중종 11)에 추탈된 일과 단천마곡역(端川磨谷驛) 벽서사건‚ 1509년(중종 4)에 이종준의 적몰재산(籍沒財産)이 환수된 일 등을 적었다.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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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야회통』1)을 요약함[朝野會通略]

중종 병자년(1516)에 이승건李承健의 관작을 추탈하였다.2) 상이 무오년(1498) 벽서와 사실에 대해 써서 올리도록 명하니, 승정원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무오년에 이종준이 부령에 정배定配되었는데 단천의 마곡역에 이르러 벽에 송나라 이사중이 당개에게 준 시를 썼습니다. 감사 이승건이 단천 군수에게 명하여 이종준을 가두어 심문하게 하고, 마침내 급히 서면으로 아뢰어 “이종준이 무풍 부정 이총과 동행하여 벽에다 시를 썼습니다. 종준은 김종직의 문도門徒로 연좌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경계하는 마음이 없이 고시古詩에 의탁하여 자기의 뜻을 나타냈으니, 문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상(중종)이 “승건의 변변찮은 처사가 한결같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고 하고 드디어 이 명이 있었다. 정덕正德 4년(1509) 기사 7월 3일에 적몰한 이종준의 재산을 돌려주라고 명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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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야회통(朝野會通)』 : 『연려실기술』 별집 야사목록에 따르면 정조 초의 사람인 김재구(金載久)의 저술이라고 한다. 태조로부터 숙종 초기에 이르기까지의 기사는 편년체로 서술되어 있으나 대체로 야사의 성격을 많이 띠고 있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숙종 중기 이후의 기록은 당적 대립을 근간으로 하는 논소(論疏)를 자세하게 싣고 있다. 중종 연대의 기록은 권11에 실려 있다.

2) 중종……추탈하였다 : 이종준에 대한 일이 제기된 것은 1509년이지만 이승건에 대한 죄를 묻는 것은 1518년 4월에 와서 있었다. 또 『중종실록』과 『조야회통』에는 1516년에 이승건과 이종준에 관한 기사가 없다.

3) 정덕(正德)……명하였다 : 원문의 ‘追奪李承健爵……遂有是命’까지는 『조야회통』과 『중종실록』에 모두 중종 13년 조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해의 간지는 무인(戊寅, 151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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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城邑誌

李侯宗準。尤留意學校事。以爲殿之位置與山勢相背。且前山一麓。橫絶眼界。蔽了金城五土之眞面目。遂撤而移建。然後眼界始通豁。見者快之。至於大其規模者。李侯一人焉。

仁廟朝戊子。本府士子。就慵齋所居里金溪村。立祠俎豆之。名之曰鏡光精舍。又於乙未冬。爲慵齋立祠於乃城縣。縣卽公往來之地也。嗚呼。公之德望。爲戊午儕流所推重。所著文章。不爲不多。而不幸被禍之家。不能收拾。遂使文章節行。湮沒而不稱。悲夫。村之北有墓。樹石云新及第李某之墓。前府伯成侯後卨爲之封植而祭之。及後李侯奎齡之帶館職而歸也。募閑丁一人。使之居墓側而守護之。禁其樵火。廣求公之遺蹟。將欲入告筵席而褒崇之。謹裒諸集以歸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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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준이 의성현감으로 있을 때 산세(山勢)와 서로 배치되어 있던 학교 자리를 옮기게 하여 보는 이들을 기쁘게 했던 일과 1648년(인조 26) 금계촌(金溪村)에 경광정사(鏡光精舍)를 지어 이종준 등을 제향한 일을 기록하였으며 유적(遺蹟)은 이종준의 후손 이규령(李奎齡)이 모아 가지고 갔다고 하였다.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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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읍지義城邑誌』

현령 이종준1)은 학교 일에 더욱 유념하여, 전각의 위치와 산세가 서로 등지고 있고, 또 앞에 있는 산의 한쪽 기슭이 가로로 시야를 끊고 있어 금성산金城山과 오토산五土山의 진면목을 가렸다고 여겨 드디어 철거하여 이건하였다. 그런 뒤에 시야가 비로소 확 트이니, 보는 자들이 시원스럽게 여겼다. 그 규모를 크게 한 이는 이 현령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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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령 이종준 : 『연산군일기』 3년(1497) 11월 16일 조에 그가 의성 현령으로 있으면서 경상좌도의 지도를 그려 올렸던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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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因儒生疏追 贈時禮曹回啓。

觀此幼學李兪吾等疏辭。則弘文校理李宗準。早事金宗直。其文章節義。大爲 成廟之所寵遇。一時名賢鄭汝昌,金宏弼,金馹孫諸人。上下論議。切磋道學。逮至戊午禍起。與金馹孫等。騈首就戮。 中廟朝被禍諸人。咸得昭雪。只宗準一人。未霑旌恤之典。擧戊午諸賢 贈同施於李宗準。又使宣額之 恩及於俎豆之地。李宗準姓名。旣載黨籍中。班班可考。而以孤忠自許衆不與一律。題於高山驛壁之故。終被奇禍。至今思之。凜凜起敬。諸賢伸枉之時。獨不蒙 恩。未知其由。因黨籍已著之跡。擧 先朝未遑之典。以副多士之望。而祠宇 賜額。事體至重。有難輕議。 贈典非本曹所可擅便。 上裁何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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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조에서 이종준의 사우(祠宇)에 사액(賜額)을 요청하는 이유오(李兪吾) 등의 상소를 왕께 보고하면서 그 허락 여부를 물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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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년(1689)에 추증할 때의 계문[己巳追贈時啓]

이들 유학幼學 이유오李愈吾 등이 상소한 말을 살피건대, 고려조의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배상지裵尙志는 기개와 절의가 꿋꿋하며 지조가 고결하였습니다. 중서관中書官이 옛날 일을 끌어와서 그를 욕보이자 관모官帽를 벗고 소매를 떨치고서 조정을 떠났습니다. 나라의 운이 망하려는 것을 보고 벼슬하려는 뜻을 끊고 집을 지어 자취를 숨기고 살면서 집 둘레에 대나무와 잣나무를 심고서 이로써 자호自號하였습니다. 주서注書 길재吉再와 도의가 맞아 시를 주고받으니 당시에 절의 있는 신하를 일컬을 때 반드시 두 사람을 나란히 거론하였습니다.
홍문관 교리 이종준은 일찍부터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니 그의 문장과 절의는 성종께서 매우 총애하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일시의 이름난 이로 정여창·김굉필· 김일손 등과 고금을 논하며 도의道義를 절차탁마하였는데, 무오년의 사화가 일어나자 김일손 등과 함께 머리를 나란히 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뒤 중종 때 화를 입었던 사람들이 모두 억울함을 씻게 되었으나 이종준 한 사람만은 표창하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다면 길재를 기리고 장려한 은전을 소급해서 배상지에게 미치고, 무오년 제현諸賢을 추증한 일을 똑같이 이종준에게 베풀어 사액의 은전이 제향하는 사당에 미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고故 참봉 장흥효張興孝는 선정신先正臣 류성룡과 김성일의 문하에 출입하여 일찍부터 심학心學의 요체를 들었습니다.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았고 더욱이 역학易學에 힘을 기울여 일원소장一元消長의 이치를 추론하고 연역하여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를 지어 후학을 깨우치니 선정신先正臣 정구鄭逑가 “앞 시대 사람이 미처 밝히지 않은 것을 밝혔다.”라고 칭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인조조 때에 특별히 재랑齋郞에 임명하여 가상히 여기며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두 신하의 사당에 올려 제사하게 되었으니 표창하여 높이는 전례를 똑같이 시행하게 하자고 이렇게 많은 선비가 진정하였습니다.
배상지는 전 왕조 말기에 관모를 벗고 소매를 떨치며 지조를 지켜 굽히지 않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할 뜻을 끊었습니다. 주서 길재와 주고받은 시가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으니 두 사람이 뜻이 같고 도가 합하였던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선정신 류성룡의 문집 속에 “배상지는 높은 절개와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호를 백죽이라 하여 그의 뜻을 드러내었다.”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선정신의 한마디는 틀림없는 논의가 되기에 충분합니다만 기리고 장려하는 일이 지금까지 행해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흠이 되었습니다.
이종준의 성명은 이미 『무오당적』 속에 들어 있어서 근거가 뚜렷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외로운 충절을 자부해도 남들은 인정 않건만[孤忠自許衆不與]’이라는 한 구절을 벽에 썼던 이유로 마침내 뜻밖의 화를 당했으니, 지금도 생각건대, 엄숙히 공경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제현의 억울함이 밝혀지던 때 유독 은혜를 입지 못하였고, 백여 년 사이에 한 사람도 아뢰는 이가 없었으니 실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적을 통해 자취가 이미 드러나 있으니 여러 조정에서 미처 거행하지 못한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장흥효는 선정신의 문하를 드나들면서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정밀히 하였고 후학을 이끌어 주고 성취를 시켰으니 또한 매우 훌륭합니다. 이는 참으로 남쪽 지역 선비 중에 명망이 있는 자이며 한 고장의 뛰어난 선비입니다. 안타깝게도 숨겨진 덕과 그윽한 광채가 끝내 드러나고 알려지지 않았으니 사림들의 마음이 오래될수록 더욱 답답하게 여깁니다. 이 또한 참작하여 기리고 추증하여, 드러내어 밝히고 격려하는 것이 또한 마땅합니다.
배상지와 이종준과 장흥효 세 사람을 아울러 기리고 추증하여 많은 선비의 바람에 부응하고 사당에 사액하는 것은 일의 체모가 중대하니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기리고 추증하는 것은 일이 한결같이 은전과 관계되고 예조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주상께서 판단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부승지 이만원李萬元1)이 담당하였고, 이듬해 경오년(1690)에 배상지를 병조 판서에, 이종준을 부제학에, 장흥효를 지평에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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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만원(李萬元, 1651∼1708) : 자는 백춘(伯春), 호는 이우당(二憂堂),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벼슬은 평안도·함경도·충청도의 감사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승지로 있었던 기간은 1689년 10월부터 1690년 2월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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柏麓上樑文

慵齋李先生。薄雲豪氣。瑞世奇姿。早歲得師而提撕。三絶餘事。畢竟齊名於李,杜。一死猶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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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준의 삼절(三絶)은 이백(李白)·두보(杜甫)의 명성과 나란히 할 만하다고 칭송하였다. <용재선생세보도(慵齋先生世譜圖)>의 기록에 의하면 백록사(栢麓社)는 이종준 형제가 제향된 곳이다.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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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峯集] 柏麓里社廟宇上樑文[典籍李尙彦]

恭惟我慵齋李先生。薄雲豪氣。瑞世奇姿。早歲得師而提撕。三絶餘事。畢竟齊名於李杜。一死猶光。
訥齋李先生。淸白故家。孝友至性。一部家禮。寔平生制行之師。二字名堂。揭晩節全身之範。
文峯鄭先生。成此宅相。有若天資。玩樂齋前。妙契誠正之旨。聳動朝右。深究本末之論。

◈문봉집(文峯集)은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의 文集이다.
○정유일(鄭惟一) 1533년(중종 28)~1576년(선조 9),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峯)이고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이황(李滉)의 문인(門人). 父는 정목번(鄭穆蕃), 母는 경주이씨(慶州李氏) 이홍준(李弘準)의 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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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우 상량문廟宇上梁文
전적典籍 이상언李尙彦1)

내 장차 누구를 의지하랴. 높은 산처럼 우러르며 감동하고,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당을 우러러 바라보도다. 나란히 한집안 사람을 제향하여 백세의 교화를 세우니, 땅은 치우친 영남의 한 모퉁이요, 고을은 외져서 부 북쪽 삼면이 막힌 곳이로다. 거주하는 백성은 소박하여 순박한 유풍만 있고, 인물은 아득해져 오래도록 산림에 은거하는 고상한 의리 지닌 분이 없었네. 군자가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어찌 우리 고장에 오늘이 있게 되었으랴. 선비가 발자취를 이어 일어난 것은 깨우치고 열어 준 덕분이고, 풍속이 학문을 업으로 삼는 것을 숭상하게 된 것은 실로 변화시킨 공로에 바탕을 두었도다. 이에 사랑하고 기뻐하는 정성을 돈독히 하여 높이 받드는 전례典禮를 계획하도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용재 이 선생은 하늘에 닿을 듯한 호탕한 기상과 상서로운 세상의 남다른 자품을 지니셨도다. 젊어서 스승의 이끌어 주심을 받으니 삼절三絶은 여벌의 일이었고, 끝내는 이백·두보와 이름을 나란히 하였으니 한 번 죽어 오히려 빛났도다. 눌재 이 선생은 청백리의 옛집에서 태어나 효성과 우애의 지극한 품성 지니셨도다. 한 부 『가례』는 평생 행실을 가다듬는 스승이었고, 두 글자로 이름을 붙인 당에는 만년의 절조로 몸을 온전히 한 규범을 걸었도다. 문봉文峯 정 선생鄭先生2)은 이분들의 외손이 되니 타고난 자품이 있었네. 완락재玩樂齋3) 앞에서 성정誠正4)의 심오한 가르침 깨달았고, 조정을 깜짝 놀라게 하니 본말本末의 논의 깊이 연구하였네. 아름답도다. 세 분의 현자가 우뚝이 태어나시니 어찌 일대 호걸이 아니랴. 원림園林이 황폐하니 오래도록 부로父老들이 마음 아파하고 탄식하였도다. 백석白石과 청천淸川은 분명 낚시하고 노닐었던 맑은 풍광이요, 원숭이가 울부짖고 학이 나니 영령께서 오신 것만 같도다.
가만히 생각건대, 옛사람이 현인을 높일 때 향리에서 사당을 세운 경우가 많았도다. 장표張杓가 무숙茂叔을 제향할 때 반드시 자취가 남은 터에 사당을 세웠고,5) 한유韓愈가 거원巨源을 보낼 때에도 사당에 제사 지내며 축원하였도다.6) 이는 모두 아름다운 뜻을 먼저 얻은 것이니 바로 후학들이 마음을 다하기에 마땅하도다. 대개 수십 년 이래로 이미 사당 짓는 일에 거북과 시초蓍草가 길한 점괘 알렸으나, 아 우리의 시대가 어려운데 어찌 사치스럽게 일을 도모할 수 있었으랴. 세월이 덧없이 흘러 점차 아름다운 자취가 사라질까 한스러워하였네. 다행스럽게도 이제 농한기가 되었고 또 아주 좋은 시일을 만났도다. 산에 들어가 재목을 취하니 귀신의 은밀한 도움에 환성을 지르며, 힘을 내어 서로 일하니 무리지어 오는 자들을 뛸 듯이 기뻐하도다. 분분하게도 도끼질과 톱질에 바람이 일어 우뚝하게 큰 집이 얼마 되지 않아 섰도다.
도목수와 솜씨 좋은 장인은 길이와 양을 재는 데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었고, 의춘宜春의 옛 법도에 따라 세 선생에게 나란히 형과 아우의 차례를 두었도다.7) 몇 년을 염두에 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눈앞에 우뚝 섰도다. 산들이 나란히 벌려 서서 푸르름을 보내오니 알아주는 정에 감격한 듯하고, 한 줄기 시내는 감돌아 흐르며 옥 소리로 울리니 맑은 시내에 넉넉한 흥이 감돌도다.
생각건대, 평소 편안하게 여기던 곳이며 더구나 제물이 정결함에랴. 외숙과 생질, 형제가 한 사당에 모셔졌으니, 효성과 의리의 기풍과 공덕이 있는 가문이로다. 모범을 볼 수 있으니 탐욕스러운 자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는 뜻을 세울 수가 있고, 성대한 의식을 장차 거행하려 하니 근심이 있는 자는 기뻐하고 병든 자도 소생하는 듯하도다. 처창悽愴과 훈호熏蒿8)한 영령의 정기를 가릴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이와 같아 강신제를 지내며 몸을 숙이고 펴니 사람들이 모두 일이 있음을 영광으로 여기도다. 들보 올리는 일을 도와 육위송六偉頌을 진술하도다.

젊은이들아 제물을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 兒郞偉抛梁東
한 가닥 도산의 원기 가운데로다 一髮陶山元氣中
아침저녁으로 구름이 이는 곳을 고요히 관찰하면 朝暮靜觀雲起處
뭉게뭉게 이는 생기 사람들과 함께하도다 油然生意與人同

젊은이들아 제물을 서쪽으로 던지니 兒郞偉抛梁西
연기 피어오르는 구성이 뚜렷이 보이도다 煙畔龜城望不迷
성 아래 몇 칸 집 문절공의 사당 있으니 城下數間文節廟
고상한 풍도와 곧은 도는 고금에 같도다 高風直道至今齊

젊은이들아 제물을 남쪽으로 던지니 兒郞偉抛梁南
희미하게 보이는 화산은 하늘에 닿을 듯하도다 花山隱隱與天參
아름답고 충만한 산천의 기운이 인걸을 낳으니 扶輿鬱積生人傑
어찌 손으로 꼽아 한두 마디로 말할 수 있으랴 屈指寧容一二談

젊은이들아 제물을 북쪽으로 던지니 兒郞偉抛梁北
섬돌 앞 한 가닥 물은 쌍백으로 이었구나 階前一水連雙白
흩어져 수많은 골짜기 되고 합하여 삼계가 되니 散爲萬壑合三溪
곧장 연원을 거슬러 가면 참으로 하나의 줄기로다 直溯淵源眞一脈

젊은이들아 제물을 위로 던지니 兒郞偉抛梁上
밝디밝은 구만리 하늘까지 신선의 거처 빛나도다 九萬昭昭璇宇朗
사방을 보니 한 점도 재앙의 기운 없으니 四望都無一點氛
수많은 백성은 다시 태평스런 모습을 보겠도다 餘氓復覩昇平象

젊은이들아 제물을 아래로 던지니 兒郞偉抛梁下
밥 짓는 연기 피는 마을이 큰 들에 있도다 煙火一村臨大野
곳곳마다 글 읽으며 강학하며 책 읽는 소리 處處伊吾講讀聲
난초와 사향 같은 은택을 기뻐하며 보겠도다 喜看麗澤薰蘭麝

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 선비의 교화가 일어나 규벽奎璧9)의 정기가 올라가기를. 성대하게 현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면 누군들 이를 통해 덕을 이루지 않으랴. 동규洞規와 가훈家訓은 북돋우고 덕을 기르는 터전이 되고, 의기義氣와 뛰어난 명성은 감동하여 마음을 일으키는 바탕이니 우뚝한 이 고장의 사당이 길이 천추에 법도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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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상언(李尙彦, 1597∼1671) : 자는 용수(溶叟), 호는 성서(城西),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648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안악 군수·성균관 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성서집』이 있다.

2) 정 선생(鄭先生) : 정유일(鄭惟一, 1533∼1576)을 말한다.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峯), 본관은 동래(東萊)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 문과에 급제하여 외직으로 진보·예안의 현감과 영천 군수를, 내직으로 대사간·승지·이조 판서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문봉집』과 편서로는 『명현록』이 있다.

3) 완락재(玩樂齋) : 도산서당의 남쪽에 있는 서재 이름이다. 정유일이 이황의 학맥을 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4) 성정(誠正) : 『대학장구(大學章句)』의 팔조목(八條目)에 속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 곧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를 말한다.

5) 장표(張杓)가……세웠고 : 장표의 자는 정수(定叟)로, 장준(張浚)의 차자이며 장식(張栻)의 아우이다. 그가 원주(袁州)를 다스릴 때 군학(郡學)을 세우고 명륜당(明倫堂)과 계고각(稽古閣)을 지었으며,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 세 선생의 사당을 창건하였던 일이 있다.(『江西通志』 卷60)

6) 한유(韓愈)가……축원하였도다 : 거원(巨源)은 당나라 시인 양거원(楊巨源)을 말한다. 그가 70세에 치사(致仕)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한유가 그를 전송하며 지어 준 「송양거원소윤서(送楊巨源少尹序)」에 “옛날에 이른바 향선생으로 죽으면 사(社)에서 그를 제사 지낸다.”라고 한 말이 있는데, 그 지방 출신 대부(大夫)로서 벼슬에서 물러나서 시골에 내려와 서당을 세우고 학생을 가르친 사람이 죽으면 그 서당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7) 의춘(宜春)의……두었도다 : 순희(淳熙) 5년(1178)에 의춘 태수(宜春太守) 장광한(張廣漢)이 고을의 향교를 수리하고 강당 동쪽 청사에 주돈이(周敦頤)와 이정(二程) 형제를 모신 사당을 세운 일이 있다. 주희의 「원주주학 삼선생사기(袁州州學三先生祠記)」가 있다.(『晦庵集』 卷78)

8) 처창(悽愴)과 훈호(熏蒿) : 신(神)의 정기(精氣)가 나타난 상태를 말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뭇 생명체는 반드시 죽고, 죽으면 반드시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귀(鬼)라고 한다. 뼈와 육체는 아래에 묻히고 이것이 야토(野土)가 되면 그 기운은 위로 올라가서 소명(昭明), 훈호(焄蒿), 처창(悽愴)이 된다. 이것이 바로 백물(百物)의 정기가 되니, 여기에 신(神)이 나타난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9) 규벽(奎璧) : 28수(宿)에 속하는 규수(奎宿)와 벽수(璧宿)의 병칭으로, 옛날에 문운(文運)을 주관한다고 여겼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용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묘우 상량문廟宇上梁文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重建上樑文

慵齋李先生。佔畢賢弟。戊午名流。遭棼濁而芝焚。未展華國之巨手。竝寒蠹而玉映。猶想講道之餘香。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한국문집총간 > 용재유고 > 慵齋先生遺稿 附訥齋遺稿 > 附錄 > 鏡光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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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峯集] 柏麓里社廟宇上樑文

慵齋李先生。佔畢賢弟。戊午名流。遭棼濁而芝焚。未展華國之巨手。竝寒蠹而玉映。猶想講道之餘香。
訥齋李先生。從伯吹箎。在家爲政。智叶申屠之先見。物外鴻冥。道闡藍田之遺規。天荒豹變。
文峯鄭先生。訥翁宅相。退老門徒。問學見許於師門。論思動聽於經幄。

◈문봉집(文峯集)은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의 文集이다.
○정유일(鄭惟一) 1533년(중종 28)~1576년(선조 9),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峯)이고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이황(李滉)의 문인(門人). 父는 정목번(鄭穆蕃), 母는 경주이씨(慶州李氏) 이홍준(李弘準)의 女.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9
한국문집총간 > 문봉집 > 文峯先生文集卷之六 >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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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한국문집총간 > 눌은집 > 訥隱先生文集卷之九 > 上樑文 > 栢麓廟宇上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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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건물의 상량문인지는 알 수 없으며 도(道)를 강구했던 이종준을 칭송함.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gotourl=http://kyujanggak.snu.ac.kr/home/MOK/CONVIEW.jsp?type=MOK^ptype=list^subtype=sm^lclass=AL^mclass=^sclass=^ntype=mj^cn=GK04282_00


묘우 중건 상량문廟宇重建上梁文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1)

유풍과 여운이 아직 남아 이미 백 년의 세월을 제향하여 왔건만, 예상치 못한 천재天災와 세상의 변화에 문득 세 번이나 사당을 옮기게 되었네. 고요하고 빛나는 자리에 다시 사당을 지으니 향 연기 끊임없이 이어져 영령이 의지할 곳이 있기를 바라도다. 생각건대, 문수산 남쪽은 선비들의 기북冀北2)이로다. 고을에 준걸이 많으니 어찌 맑은 기운이 잉태한 것이 아니랴. 풍속이 문명하게 교화된 것은 실로 선민先民이 힘쓴 덕분이로다.
용재 이 선생은 점필재의 어진 제자이자 무오사화 때의 명류名流로다. 혼탁한 시대를 만나 지초芝草가 불에 타니 나라를 빛낼 큰 솜씨를 미처 펴지 못하였고, 한훤당·일두와 함께 옥처럼 빛나는 분이니 도를 강하던 남은 향기를 오히려 상상할 수 있겠도다. 눌재 이 선생은 형을 따라 피리[篪]3)를 불었으며, 수신제가의 도로 정사를 하였도다.4) 지혜는 신도반申屠蟠의 선견지명5)과 합하여 하늘 높이 나는 기러기처럼 세속을 벗어났고, 도는 남전藍田이 끼친 향약을 천명하여 천황天荒을 표범처럼 변화시켰네.6) 문봉文峯 정 선생鄭先生(정유일鄭惟一)은 눌옹訥翁의 외손이자 퇴계의 문인이로다. 학문은 스승에게 인정받아 몇 번이나 우리 자중子中7)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논변과 사색은 경연의 자리에서 군왕이 귀 기울여 듣도록 하여 참된 학사學士라는 아름다운 칭찬이 있었도다. 매헌梅軒 홍 선생洪先生8)은 인륜에 독실하고 효성은 천성에서 나왔도다. 순수한 마음과 지극한 행실은 옛사람에게 물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두터운 덕과 맑은 품격은 옛날의 현자와 짝하기에 무슨 부족함이 있으랴.
다행하게도 이러한 현인들이 많이 나서 성하게 후생들의 모범이 되니, 사社에 제사 지내는 뜻9)이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 오래도록 같은 사당에 제사 지내니 그분들의 풍모를 들은 자는 아직도 마음에 흥기하는 자가 있어 이에 사당에 추향追享하도다. 실室에서 재계를 하고 당堂에서 법을 읽으니10) 주나라가 남긴 뜻이 완연하도다. 이미 그 사람을 높이고 또 그 도를 행하여 행여 전날 닦은 아름다운 풍속이 실추될까 두려워하도다.
생각건대, 당초에 터를 정한 것이 적절하지 않아 기해년(1719)에 언덕이 무너져 해를 입었네. 고을의 관아 곁으로 사당을 옮기자 처음에는 알맞은 자리를 얻었다고 여겼더니, 꼬투리를 잡아내고 털끝만 한 일을 불어서 흠을 찾아, 뜻하지도 않게 관의 견책을 당하였도다. 생도들은 잡혀가는 재앙을 만나고 신위神位는 임시로 모신 자리에서 궁색하게 되니, 까닭 없이 당한 재앙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사문斯文과 관계있는 변고로다.
부로父老들이 분주히 주선하여 언덕과 산에 올라 자리를 살피고 일을 도모하였고, 사대부들이 경영하여 겨울과 봄을 지나 비로소 착공하였도다. 널찍하고 그윽하여 자리가 알맞고 지경이 외져 세속 티끌 없도다. 훌륭하고 멋지게 이루었으니 얼마 안 되어 준공하였도다. 세 칸의 사당 모습 지난날의 규모를 고치지 않았고, 첩첩의 산 모습은 다 옛날에 조물주가 아껴서 감추어 둔 아름다움을 다 드러내도다. 귀신이 마련하고 도와준 듯, 참으로 장인은 수고를 다하고 선비들은 정성을 다하였도다. 궤연을 진설하니 영령이 오르내리시며 충만하게 임하여 계신 듯하도다. 그 법을 존숭하고 그 예를 강론하여, 예를 갖춘 선비들이 많고 많아 선현의 덕을 실추시키지 않기를 바라노니, 이에 상량식에 따라 준공을 축원하는 글을 올리도다.

젊은이들아 제물을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 兒郞偉抛梁東
아침 해가 막 떠올라 상서로운 빛이 가득하도다 旭日初升瑞采融
하늘 가운데로 이르기 전 기상을 보건대 未到天中看氣像
원래부터 백옥 같이 흰 속마음이 있도다 自家元有皦如衷

젊은이들아 제물을 들보 서쪽으로 던지니 兒郞偉抛梁西
너른 들 아득히 둘렀고 활수11)가 흐르도다 平野遙圍活水溪
광자가 기수에 오르려던 뜻을 알고서12) 識取曾狂沂上意
어른과 아이가 봄날에 손잡고 오르기에 좋겠네 冠童春日好相攜

젊은이들아 제물을 들보 남쪽으로 던지니 兒郞偉抛梁南
잣나무 숲은 당시의 푸른 구름 머금었네 栢林當日翠雲涵
갓 튼 새싹을 맑은 아침이 더욱 길러 주고 更加萌孽淸朝養
곧이어 산빛은 붉은 남기 피어오르도다 未幾山光生紫嵐

젊은이들아 제물을 들보 북쪽으로 던지니 兒郞偉抛梁北
높고 높은 문수산이 북극성 가로지르네 屹屹文岡橫斗極
평소에 내리는 구름과 비는 농부를 위로하고 平時雲雨慰三農
해 저물녘 푸르름은 찬 기운 일색이로다 歲暮蒼然寒一色

젊은이들아 제물을 들보 위로 던지니 兒郞偉抛梁上
오르내리시는 영령이 함께 왕성하게 나오시니 陟降英靈同出王
밝게 흠향하는데 어찌 일판향13)이 필요하랴 明享何須一瓣香
이 마음은 원래부터 천고에 막힘이 없었다네 此心千古元無障

젊은이들아 제물을 들보 아래로 던지니 兒郞偉抛梁下
화기애애한 기운이 사당에 가득하도다 思皇藹藹盈堂舍
주례로 백성의 떳떳한 마음 도탑게 하고 且將周禮敦民彛
선비들이 「소아」로 흥기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會見菁莪興小雅

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 산신령이 보호하고 땅의 도가 맑게 안정되어, 신령이 여기에서 편안하고 사람도 여기에서 평안하여 이미 기울어지고 막혔다가 태평함으로 회복되기를. 집집마다 거문고와 책 읽는 소리 나고, 모두 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르기를. 형식적인 틀에 빠지며 허물을 들추어내는 나쁜 풍습을 씻어 내고 효도하고 공손하며 덕에 나아가고 수양하는 아름다운 모범을 몸소 실천하기를. 법도 따르는 기풍을 뒤에서 일으키고 환히 빛나는 모범을 앞에서 비추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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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광정(李光庭, 1674∼1756) :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1699년 진사가 되었다. 안동부 훈도장(安東府訓都長)을 지냈다. 영남 문원(文苑)의 모범이며 세교(世敎)를 떨쳤던 인물로 전해진다. 저서로는 『눌은집』이 있다.

2) 기북(冀北) : 훌륭한 인재가 많이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원래 기북은 기주(冀州)의 북부(北部)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을 말하는데, 예로부터 명마(名馬)가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3) 피리[篪] :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악기 이름이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형은 질 나팔을 불고, 아우는 피리를 불도다.[伯氏吹壎 仲氏吹篪]”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4) 수신제가의……하였도다 : 이홍준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고향에서 후학들을 기른 행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왜 정치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공자가 “『서경』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정사에 베푼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정치하는 것이니, 어찌하여 벼슬해서 정치를 하는 것만이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하는가.”라고 한 말뜻을 취한 것이다.(『論語』 「爲政」)

5) 신도반(申屠蟠)의 선견지명 : 신도반은 후한(後漢) 진류(陳留)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해 칠공(漆工)이 되었다. 군(郡)에서 주부(主簿)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고 숨어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여 오경(五經)에 두루 정통했으며, 도위(圖緯)에도 밝았다. 한나라 황실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양(梁)나라 탕현(碭縣)에 자취를 감추고 나무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살았으며, 태위(太尉) 황경(黃瓊)과 대장군 하진(何進)이 연이어 불러도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다.(『後漢書』 卷53 「申屠蟠傳」)

6) 천황(天荒)을 표범처럼 변화시켰네 : 완악하고 무지한 고을을 풍속이 선하며 학문을 익히는 고을로 변화시켰다는 말이다. 천황은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것을 두고 하는 말로, 당나라 때 형주(荊州)에서 해마다 향시(鄕試)에 합격한 공생(貢生)을 서울로 보내도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나오지 않으므로 천황이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표범처럼 변화시켰다는 것은 표범이 제 털의 문채를 변화시켜 윤택하게 하는 것처럼 고장의 사람들을 변화시켜 나날이 새로워지도록 했다는 것을 비유한 말로, 『주역』 「혁괘(革卦)·상육(上六)」의 “군자는 표범이 변하듯 하고 소인은 얼굴만 바꾼다.”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7) 우리 자중(子中) : 자중은 정유일(鄭惟一)의 자로, 이황의 제자이다. 스승이 특별히 자중이라고 부르며 아끼고 칭찬하였음을 말한다.

8) 홍 선생(洪先生) : 홍준형(洪俊亨, 1606∼1666)을 말한다. 자는 언겸(彦謙), 호는 매헌(梅軒),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65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1658년 선릉 참봉에 임명되고 부임하다가 모친의 병환을 구완하고자 사직하고 귀향하여 효행을 실천하였다.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역학·의약학에 조예가 깊었다. 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2004년 송록서원(松麓書院)에 모셨다.

9) 사(社)에 제사 지내는 뜻 : 앞의(묘우 상량문廟宇上梁文, 전적典籍 이상언李尙彦) 각주 ‘한유(韓愈)가……축원하였도다’ 참조.

10) 법을 읽으니 : 사시(四時)의 첫 달인 1월, 4월, 7월, 10월 초하루에 백성을 모아 놓고 법을 읽는 것[讀法]으로, 원래는 『주례(周禮)』 「지관사도(地官司徒)」에 보이는데 송(宋)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시행했다고 한다.(『東坡集』 卷89 「司馬溫公行狀」)

11) 활수(活水) : 물의 근원이 있어서 항상 흘러가는 물을 말한다.

12) 광자(狂者)가……알고서 : 광자는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을 말한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여러 제자에게 각각 그 바라는 뜻을 묻자, 증점이 “늦은 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5∼6명과 함께 동자(童子) 6∼7인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다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공자가 감탄하여 증점의 쇄락한 기상을 인정하던 일이 있다. 증점은 사(士)의 광자(狂者)라는 평이 있다.(『禮記大全』 卷4)

13) 일판향(一瓣香) : 꽃 이파리 모양의 향으로, 존경하는 분을 공경하는 뜻으로 피우는 한 조각 향이다.(『祖庭事苑』)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용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묘우 중건 상량문廟宇重建上梁文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