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용재유고이종준

[慵齋遺稿] [附錄] 墓碣銘 幷序 [李玄逸]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8:58

용재유고(慵齋遺稿) / 附錄


墓碣銘 幷序 [李玄逸]

公諱宗準。字仲勻。嘗自號慵齋。其先月城人。後徙居永嘉之金溪里。成化丁酉。擧進士。丙午。登第。官至弘文館校理。公少。倜儻負氣。爲詩文。淸健有格力。又能工書畫。中國人稱之。嘗師事佔畢齋金先生。又與一蠹鄭先生,寒暄金先生及濯纓金公,秋江南公。結道義交。其在經幄。補益弘多。得罪燕山。死弘治戊午。 中廟時。諸被禍者得復官。獨公未蒙 恩典。

仁祖戊子。永嘉人士。始立廟享之。今 上已已。又請於朝。 贈副提學。且將立石表其墓。俾玄逸爲之銘。銘曰。

質秀而文皎白雪。獲師友資邁厥識。 經幄論思補衮闕。一行觀周籍三絶。逢時不幸禍熸烈。皓天有復事著白。鬱彼畏壘載尸祝。有感 宸衷又追秩。我最其蹟鑱墓石。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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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한국문집총간 > 갈암집 > 葛庵先生文集卷之二十四 > 墓碣 > 慵齋先生李公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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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9.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쓴 이종준의 묘갈명(墓碣銘).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중국인들도 칭찬하였다는 일화를 적고 있으며 지금 부제학(副提學)에 증직(贈職)되어 석표(石表)를 세우면서 쓴다고 함.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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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集] 용재(慵齋) 선생 이공(李公) 묘갈명

공은 휘가 종준(宗準)이고 자는 중균(仲勻)이며, 일찍이 자호를 용재(慵齋)라 하였다. 그 선조(先祖)는 월성(月城) 사람인데 후에 영가(永嘉)의 금계리(金溪里)로 이주하였다. 성화(成化) 정유년(1477, 성종8)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병오년(1486)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교리에 이르렀다.

공은 젊어서 우뚝한 기개가 있었고, 시문은 청건(淸健)하여 격력(格力)이 있었으며, 또 서화(書畫)에 능하여 중국 사람이 칭찬할 정도였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 선생(金先生)을 사사(師事)하였고, 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 선생(鄭先生),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김 선생 및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김공(金公),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남공(南公)과 도의(道義)의 벗이 되었다. 그리하여 경연(經筵)에서 학문으로 임금을 보필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연산군(燕山君)에게 죄를 받아서 죽으니, 홍치(弘治) 무오년(1498, 연산군4)이었다.

중묘(中廟) 때 화를 당했던 이들이 모두 복관(復官)되었는데 유독 공만은 후사(後嗣)가 없어 복관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조(仁祖) 무자년(1648, 인조26)에 영가의 인사들이 비로소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으며, 금상(今上) 기사년(1689, 숙종15)에 또 조정에 복관을 청하여 부제학의 증직이 내렸다. 장차 묘비를 세우고자 현일(玄逸)에게 명을 짓게 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빼어난 자질에 문장을 갖춰 백설처럼 환한 풍모 / 質秀而文皎白雪
좋은 사우의 도움을 얻어 학식이 나날이 향상됐지 / 獲師友資邁厥識
경연에서 논사하여 임금을 잘 보필하였으며 / 經幄論思補袞闕
한 번 중국에 사행 가자 삼절의 명성 자자했네 / 一行觀周籍三絶
좋지 못한 시운을 만나 큰 화란이 일어났으나 / 逢時不祥禍熸烈
밝은 세상이 다시 와서 누명을 벗을 수 있었지 / 皓天有復事著白
저 우뚝한 외루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 鬱彼畏壘載尸祝
성상께서 감동하여 또 증직을 내리셨으니 / 有感宸衷又追秩
내 그 사적을 모아서 비석에 새기노라 / 我最其蹟鑱墓石

◈갈암집(葛庵集)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文集이다.
○이현일(李玄逸) 1627년(인조 5)~1704년(숙종 30).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본관은 재령(載寧)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홍여하(洪汝河), 정시한(丁時翰), 이유장(李惟樟) 등과 교유.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2

고전번역서 > 갈암집 > 갈암집 제24권 > 묘갈(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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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墓碣銘 서문 병기
–길암葛庵 이현일李玄逸

공은 휘가 종준宗準이고 자는 중균仲勻이며 일찍이 자호를 용재慵齋라고 하였다. 선조는 월성 사람인데 뒤에 영가永嘉(안동)의 금계리로 옮겨 살았다. 성화成化 정유년(147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병오년(1486)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교리에 이르렀다.
공은 젊어서부터 대범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시문을 지으면 맑고 굳세어 격조와 힘이 있었다. 서화에도 뛰어나 중국 사람들이 칭송할 정도였다. 일찍이 점필재 김 선생(김종직)을 스승으로 모셨고, 또 일두 정 선생(정여창), 한훤당 김 선생(김굉필) 및 탁영 김공(김일손), 추강 남공(남효온)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경연에서 군왕을 보필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연산군에게 죄를 얻어 홍치 무오년(1498)에 세상을 떠났다. 중종 때 화를 입었던 이들이 관직을 회복하였으나 공만이 은전을 입지 못하였다.1) 인조 무자년(1648)에 영가의 인사들이 비로소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다. 금상(숙종) 기사년(1689)에 또 조정에 청하여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장차 비석을 세워 묘소에 표하려고 하면서 나에게 명을 짓게 하였다.
명銘은 이러하다.

빼어난 자질에 문장을 갖추어 백설처럼 환한 풍모    質秀而文皎白雪
스승과 벗의 도움 받아 학식이 나날이 향상되었지    獲師友資邁厥識
경연에서 학문 논하고 계책 내어 군왕을 보필하고    經幄論思補袞闕
한 번 중국에 사신 가서는 삼절2)의 명성 자자했었네  一行觀周籍三絶
좋지 못한 시운을 만나 재앙의 불길 뜨거웠으나       逢時不祥禍熸烈
밝은 하늘 회복되어 당시 일이 환하게 드러났네       皓天有復事著白
성대하게도 저 은거한 고장에 사당 세워 제향하고    鬱彼畏壘載尸祝
성상께서 감동하여 또 증직을 내리시니                  有感宸衷又追秩
내가 그 사적을 모아서 비석에 새기노라                 我最其蹟鑱墓石

재령載寧 이현일李玄逸3)이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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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외주(欄外註) : 중종 무인년에 조광조(趙光祖)를 경연에서 복관(復官)하였는데, 유독 공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2) 삼절(三絶) : 시문, 글씨, 그림 세 가지가 모두 뛰어난 것을 말하는데, 『용재유고』의 「묘갈명(墓碣銘)」에 따르면 이종준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 사람들이 그를 삼절이라고 칭송한 적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3) 이현일(李玄逸, 1627∼1704) :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1691년 이조 참판을 지냈고 그 뒤 이조 판서까지 올랐으나 갑술환국(1694) 때 유배되었다. 영남학파의 거두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저서로는 『갈암집』과『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용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묘갈명墓碣銘 서문 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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