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용재유고이종준

[慵齋遺稿] [附錄] 行狀[柳氵+奎]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9:02

용재유고(慵齋遺稿) / 附錄


行狀[柳]

慵齋李先生。旣奉安于鏡光書院後幾年。豎碣于先生之墓前。昨年乙丑。先生八代孫學慶。柚遺跡踵門而言曰。先祖節行。特蒙文忠公先生撰出戊午黨籍。以行於世。狀本則學慶從先祖訥齋公所草。而拘於時諱。不能詳具世德。且世代綿邈。蠹食字畫。不成完編。敢請追補而刪潤之。以續先先生撰錄之遺意。不佞誠老病不敢當。而但世契則固然。敢不勉焉。謹依本狀。略加檃括如左。先生姓李氏。諱宗準。字仲匀。自號莊六堂。又稱慵齋。新羅佐命大臣謁平之後。至麗季。有曰之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封月城君。是生揆。官四宰。諡貞烈。是生元林。入 我朝。判司僕寺事。是生蔓實。吏曹判書。於先生爲曾祖也。祖諱繩直。以進士擢生員。筮仕于 世宗朝。行楊州牧,慶尙道觀察使。以大司憲終。淸白見重於朝。考諱時敏。俱中生進。以文章節行。負一世重望。延及金相國宗瑞之禍。被禁錮。歸老金溪。敎授生徒。多至成就。號琴湖。鄕人方議尸祀之禮。妣永嘉權氏。縣監啓經之女也。先生生于永嘉之金溪村。幼而岐嶷。五歲。屬文。七歲。讀書通大義。生員公以詩戒之曰。一飯都忘歲月輕。豈知斯世樹風聲。空身雖向窓前坐。逸意應馳野外行。先生雖在妙齡。常莊誦此詩。益勉課業。十年。言于生員公曰。經書皆是聖賢傳授文字。而或出於門人之記。至於易經。則文王,周公,孔子三聖之手書。此眞聖人書。學者最當尊重者也。生員公聞而大奇之。手植一株銀杏於大廳之前。生員公曰。此夫子講學之樹也。他日當與盛德君子。講習於此樹下。對曰。東方亦有聖人乎。生員公曰。行聖人之道。皆可爲聖人徒。況我東箕子遺風。至今流傳。豈可無賢人君子也。十三歲。文章已成。筆法蒼古。欲赴鄕解。生員公以學業未成不許。當游學于京中。生員公慮其才勝。每以書戒之。其第二書略曰。汝之遊學。非豪俠輩可比。謹言行。戒酒色。無慢游。無友放浪人。吾之先世。爲朝家名臣。及余之身。不幸坎軻。余則已矣。積善之久。豈無餘慶。汝兄不學無才。汝弟不好學。吾之所望者汝。汝亦學而不誠。不誠則無實。吾所謂實者。德行之謂也。非才華也。苟無其行。雖有七步之才。何足取焉。佩服此訓。雖微言細行。不敢不謹。癸巳。丁生員公喪。哀毀過禮。服闋後。以慈夫人命。入山讀書。同里裴栶。隨而課讀。志倦神疲則裴掩卷而息。先生終宵不輟。如是數月。精力如初。裴曰。君以血氣之身。勤苦過人。乃能若是耶。先生曰。至樂在此。有何疲倦也。每月朔。歸覲夫人。課誦一月所讀於夫人之前。無一字訛漏。然後夫人供別饌而給之。丁酉。中司馬試。寓居于京城。一日。與南秋江孝溫。乘月而游於杏花坊。權景裕君饒。見其儀容淸秀。邀而虛坐曰。子非塵埃中人。眞所謂仙鶴在人間也。君饒先唱四韻。先生應口而對。故爲出塵埃之態。君饒大驚曰。人言赤壁賦無煙火之氣。子之詩韻。過於蘇賦。仍勸一杯酒。先生欲起去。君饒挽手止之。閉戶張燭。終宵吟詠。朝日視之則乃東門外寓居進士李某也。大笑而罷。自後爲莫逆之交。每與秋江。語及 莊陵往事。未嘗不歔唏流涕。丙午。登第。丁未。以正字遷吏郞。是年秋。日本使來聘。 上以關坊甚重。且彼國使有文才。命極擇護送使。銓曹以先生應旨。先生奉命至東萊。倭使得先生書畫。拜受曰。始得天下重寶。冬。又受平安評事之命。至祥原郡。題三笑圖。詩在集中。後南秋江過此。大驚曰。此必吾友手段也。戊申。除弘文校理。以徐四佳選。遷湖堂。賜暇讀書。 上幸環翠亭。先生應製居首。聲名籍甚。無爭鋒者。時論謂第一淸望。比之登瀛。尋拜正言。是時。愼守勤始登淸顯。先生以外戚得權之漸。力諫其不可。直聲振朝廷。壬子。拜副修撰。陳疏歸覲。癸丑。以檢詳。陞舍人。又以書狀官赴燕。見館驛畫屛不佳。以筆塗抹殆盡。驛官招通事怪詰之。通事曰。書狀能書畫。必以不滿其意而然也。驛官首肯之。回程至其處。張新粧素屛二坐。先生一書一畫。俱盡其妙。觀者歎賞。又以詩律。鳴於皇城。後華使至而傳誦。甲寅。除義城縣令。慈夫人時尙康寧。以居官愛民之意。作五言詩四十韻與之。先生拜受誦之。權睡軒以詩餞之。聲名少小聳南斗。儒雅風流是謫仙。昵幄望隆通籍早。分符命下許城專。鄕閭三物成周化。煙火千家續漢循。俗吏紛紛徒爾耳。應歌來暮頌斯人。下車之初。見校宮之頹廢。擇地而移建。出俸祿以助工役。宏敞規模。招集境內之有儒望者。敎授鄕子弟。誦詩習禮。一如古法。絃誦常聞。時人以聞韶比武城。作竹樓於客館之南。爲公退休息之所。作記揭之。一時文士傳誦。至於訴帖揮灑筆跡。邑人皆珍而藏之。戊午。棄官歸鄕里。是時。柳子光,李克墩輩搆誣淸流。禍在朝夕。先生怡然自樂。不以爲憂。與李忘軒胄。圍棋於杏亭。外人傳言紅衣官人一隊直入洞壑。左右請輟棋。先生徐曰。未聞拏命則猶是閑散。對局如初。俄而金吾郞果至。先生曰。老母在。願與之訣。金吾郞惻然而許之。拜辭慈夫人。夫人引范滂事諭之曰。汝得其死。我何悲爲。汝往。善死善死。無以我爲念。與忘軒同席被拏。及就鞫之日。不變神色。以手畫地。作一字如長杠。無一言。有一奴能解文字。同被鞫。亦畫地無言。及定罪之日。決杖八十流北界。路經高山驛。書孤忠自許衆不與一律于壁上而去。監司以聞。喬桐主以爲有怨意。逮鞫殺之。時朝廷危懼。無敢言者。獨洪虛白貴達上書救解不得。被刑之日。顏色與平日無異。但勵聲曰。首陽邈矣。埋我無地。聞者爲之墮淚。返葬于金溪沙芒洞艮坐原。先生容貌端雅。如淸水芙蓉。志操瀅潔。如氷壺秋月。爲文發越。信筆滔滔。直與漢唐之文。同一體格。詩亦優游不迫。出於性情。有古詩人之風韻。至於書畫,醫藥,卜筮,音律。無不精巧。嘗師事佔畢齋金先生。先生器之曰。自見李某。胸襟灑落。與鄭一蠹,金寒暄兩先生。爲道義交。又與金濯纓,南秋江諸賢友善。秋江最敬重焉。茂豐副正一見而奇之曰。公我東之詩仙也。自幼少時無疾言遽色。雖在倉卒。未嘗失措。其經幄講論。一遵河南夫子。霜臺直言。無愧漢朝長孺。倜儻淸儀。便是海東魯連。惜乎其嘉言美行。雄詞健筆。不傳於世。以史禍故也。 中廟朝。昭雪復官。 肅廟因儒疏。 贈弘文館副提學。夫人永嘉權氏。進士綽之女。不育。以弟公準第三子德淵爲嗣。參奉。德淵生三男二女。長允恭。次允儉。皆參奉。次允讓。進士。權景銓,直長權銘。其壻也。允恭生二男。曰煥。曰燁。允儉生一男。民覺。號三隱。煥生復昌。燁生再昌。民覺生三男。長尙堉。次尙墩,尙堧。尙堧生三男。震英,章英,最英。震英有五子。時華,元華,益華,復華,春華。最英有三子。天華,箕華,盛華。復華系子東楫。謁余修狀者學慶。卽其子也。餘不盡錄。嗚呼。天生英偉特出之才。不能平步亨衢。大展蘊抱。而卒罹讒慝之口。以不免一時屠戮之禍。何哉。幸而天轉地旋。雷雨發解。雪冤 贈爵。澤漏天壤。而至於先生父子。則秉彝公議。百世不泯。先生享於鏡院。訥齋享於柰城之柏社。近又道論齊發。擬奉琴湖公於河丹溪彰烈之祠。於是乎天道昭然。人心爲之一快。彼克墩,子光等枯胔腐肉。甘爲地獄千萬年戕害忠賢之窓鬼。人爭欲斲棺臠分。以餧家之畜狗。而且不食之矣。禍變慘於一時。而公議嚴於百年。斯可以少慰百世慈孫之心也夫。學慶行雅飭。篤於先。相對可知爲名家後裔。旣去復來。誠懇動人。烏敢辭。撥開昏耄。收拾精神。略具系德。尾補子孫錄如此。以塞其求。兼以自效於高山景行之思云爾。 上之六年丙寅十月▣日。通政大夫前行敦寧府都正豐山柳。謹狀。

◈임여재집(臨汝齋集)은 임여재(臨汝齋) 柳(유규)의 문집(文集)이다.
○유규(柳) 1730년(영조 6)~1808년(순조 8). 자는 수부(秀夫), 사극(士極), 호는 임여재(臨汝齋)이고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박손경(朴孫慶) 등과 교유.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한국문집총간 > 용재유고 > 慵齋先生遺稿 附訥齋遺稿 > 附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087A_0030_040_0090_2003_A016_XML

*참조: 한국문집총간 > 임여재집 > 臨汝齋先生文集卷之七 > 行狀 > 慵齋李先生行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1095A_0080_020_0020_2015_B092_XML

○ 1806. 유규(柳)(1730-1806)가 지은 이종준의 행장.
이종준의 8대손(八代孫) 학경(學慶)이 이홍준이 초(草)한 것을 참고하여 쓴 것이 있으나 완편(完編)을 이루지 못하여 류규가 다시 보충하고 윤색하여 썼다.
아버지 시민(時敏)이 김종서(金宗瑞)(1390-1453)의 화를 입고 금계(金溪)에 내려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던 일과 어려서부터 문장과 서예에 재주가 출중하여 부친이 그 재승(才勝)을 염려하고 경계하였다는 것‚ 관직생활을 하면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바른 말을 하여 조정에 이름을 떨쳤던 일‚ 뒷날 국문을 받을 때 땅에 손으로 글씨를 쓰며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며 죽는 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안색이었다는 것 등을 적어 놓았다.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http://kyujanggak.snu.ac.kr/home/index.do?idx=06&siteCd=KYU&topMenuId=206&targetId=379&gotourl=http://kyujanggak.snu.ac.kr/home/MOK/CONVIEW.jsp?type=MOK^ptype=list^subtype=sm^lclass=AL^mclass=^sclass=^ntype=mj^cn=GK04282_00


행장行狀
–-임여재臨汝齋 류규柳氵+奎

용재慵齋 이 선생을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봉안하고 나서 몇 년 뒤에 선생의 묘 앞에 묘갈을 세웠고, 작년 을축년(1805)에 선생의 8대손 학경學慶이 유적遺跡을 가지고 내 집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선조의 절개 있는 행실은 특별히 문충공文忠公(류성룡柳成龍) 선생이 지은 『무오당적戊午黨籍』에 찬술되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행장의 원고는 저의 종선조從先祖 눌재공訥齋公의 초고입니다. 당시의 금기에 구애되어 대대로의 덕행을 상세히 갖추지 못하였고, 또 세대가 멀어져 자획이 잠식되니 완전한 글을 이루지 못합니다. 감히 청컨대 추가로 보충하고 필요 없는 것을 지워서 윤색하여 선조의 글을 이어 주십시오.

선생이 지어 기록한 뜻은 참으로 늙고 병든 내가 감당할 수 없으나, 대대로의 교분이 진실로 그러하여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어 삼가 본래의 행장에 근거하여 대략 아래와 같이 수정하였다.
선생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종준宗準이며 자는 중균仲匀이다. 자호는 장륙당莊六堂이고 또한 용재慵齋라고 부르니, 신라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의 후예이다. 고려 말에 와서 지수之秀라는 분이 있으니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三重大匡金紫光祿大夫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이가 규揆를 낳으니 벼슬은 의정부 우참찬[四宰]을 지냈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이가 원림元林을 낳으니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이가 만실蔓實을 낳으니 이조 판서로 선생에게 증조부가 된다. 조부 승직繩直은 진사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세종조에 처음으로 벼슬하여 행 양주 목사行楊州牧使, 경상도 감사를 지냈으며, 대사헌으로 마쳤다. 청백리로 조정에서 존중받았다. 아버지 시민時敏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문장과 절개 있는 행실로 한 시대에 중망을 지녔다. 상국相國 김종서金宗瑞의 화(계유정난)에 이끌려 들어가 금고를 당하자 금계촌金溪村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며 생도를 가르치니 성취한 자가 많았다. 호를 금호琴湖라고 하였다. 고장 사람들이 한창 제향의 예를 의논하고 있었다. 어머니 영가 권씨永嘉權氏는 현감 권계경權啓經의 따님이다.
선생은 영가永嘉(안동)의 금계촌에서 태어났다.1)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5세에 문장을 지었고 7세에 독서하여 대의를 통하니 생원공이 시로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한 끼 밥에 세월의 가벼움 다 잊으니 一飯都忘歲月輕
세상에 명성 세울 줄을 어찌 알랴 豈知斯世樹風聲
부질없이 몸은 창 앞에 앉아 있으나 空身雖向窓前坐
편안하고픈 마음 들 밖으로 달리겠지 逸意應馳野外行

선생이 비록 어렸으나 늘 이 시를 큰 소리 내어 외며 정해진 과정에 따른 학업에 더욱 힘썼다.
10살 때 생원공에게 “경서는 모두 성현이 전수한 문자이면서 문인의 기록에 나오기도 합니다. 『역경』의 경우는 문왕文王과 주공周公, 공자孔子 세 성인이 직접 쓴 글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성인의 글이니 학자가 가장 마땅히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생원공이 듣고서 매우 기특하게 여겨 대청 앞에 손수 한 그루 은행나무를 심고서 “이 나무는 부자夫子(공자)께서 강학하던 곳에 있었던 나무이다. 훗날 마땅히 덕이 성대한 군자와 함께 이 나무 아래에서 강학을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우리나라에도 성인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자, 생원공이 “성인의 도를 행하면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우리 동방은 기자箕子의 유풍이 지금까지도 흘러 전하고 있으니 어찌 현인군자가 없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13살에 문장을 이미 이루었으며 필법이 힘차고 소박하였다. 향시에 나가려고 하였으나 생원공이 학업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유학할 때 생원공은 선생이 재주가 앞설까 봐 염려하여 늘 편지로 타일렀는데, 두 번째 편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네가 유학을 하는 것은 호협豪俠의 무리와 견줄 바 아니니 언행을 삼가고 주색을 경계하여라. 태만하게 놀지 말고 방탕한 사람과 사귀지 마라. 우리 선대는 조정의 이름난 신하였는데 내 몸에 와서 불행하게도 기구하게 되었다. 나는 그만이지만 선을 오래 쌓은 집에 어찌 조상이 끼치는 복이 없겠느냐. 네 형은 배우지도 않고 재주도 없으며 네 아우는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내가 기대하는 것은 너이다. 그런데 너 또한 배우는 데 성실하지 않으니, 성실하지 않으면 실재가 없다. 내가 말하는 실재란 덕행을 말하는 것이지 재주가 뛰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덕행이 없다면 칠보시七步詩2)를 짓는 재주가 있더라도 어찌 취할 만하겠느냐.

선생은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비록 사소한 언행이라도 감히 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계사년(1473)3)에 생원공의 상을 당하자 예법에 지나치도록 애통해하였다. 복을 마치고 나서 어머니의 명으로 산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같은 마을의 배인裵栶이 선생을 따라서 과정에 따른 독서를 하였는데 마음이 게을러지고 정신이 피곤하면 배인은 책을 덮고 쉬었지만, 선생은 밤이 새도록 책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달을 하였으나 정력이 처음 같으니, 배인이 “그대는 혈기를 지닌 몸으로 남보다 부지런하고 수고하기를 이처럼 하시오?”라고 하자, 선생은 “지극한 즐거움이 여기에 있는데 무슨 피곤함이 있겠소.”라고 하였다. 매달 초에 돌아가 어머니를 뵈었는데 어머니 앞에서 한 달 읽은 것을 외어 한 글자도 잘못 읽거나 빠진 것이 없어야 어머니가 별식을 마련하여 주었다.

정유년(147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4) 서울에 거주하였는데, 하루는 추강秋江남효온南孝溫과 달밤에 행화방杏花坊에 놀러갔더니 권경유權景裕 군요君饒 군이 그의 거동과 모습이 맑고 준수한 것을 보고 맞이하여 자리를 비우고서 “그대는 세속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이른바 인간 세상에 있는 선학仙鶴이구려.”라고 하였다. 군요가 먼저 사운시四韻詩를 읊으니 선생이 말이 떨어지자 바로 응수하면서 짐짓 세속을 벗어난 듯한 정취의 시를 지었다. 군요가 매우 놀라 “사람들이 「적벽부赤壁賦」를 두고 속세의 기미가 없다고 하는데 그대의 시가 지닌 운치는 소식蘇軾의 「적벽부」보다 훌륭하오.”라고 하며 한 잔 술을 권하였다. 선생이 일어나 가려고 하자 군요가 손으로 당기며 제지하였고, 문을 닫고 촛불을 밝혀 밤새도록 시를 읊다가 아침에 해가 떠서 보니 바로 동문 밖에 거주하는 진사 이 아무개였다. 크게 웃고서 자리를 파하였다. 이 뒤로 막역한 교제를 하였는데, 늘 추강과 함께 장릉莊陵(단종端宗)의 지난 일을 언급하며 흐느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오년(148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5)

정미년(1487)에 정자正字로서 이조의 낭관으로 옮겼다. 이해 가을에 일본의 사신이 방문하였다. 상上이 국경의 수비가 매우 중요하고 또 저 나라 사신이 문장의 재주가 있다 하여 호송사를 신중히 선발하도록 명하니 이조가 선생을 뽑음으로써 왕명에 응하였다. 선생이 명을 받들어 동래에 도착하니 왜倭의 사신이 선생의 서화를 얻고서 절하고 받으며 “비로소 천하의 소중한 보배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겨울에 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로 임명되었다. 상원군祥原郡에 도착하여 「삼소도三笑圖」에 글을 지었는데, 시는 문집 속에 있다. 뒤에 남추강이 이곳을 지나다가 매우 놀라며 “이것은 필시 내 벗의 솜씨이다.”라고 하였다.
무신년(1488)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서사가徐四佳(서거정徐居正)의 선발로 호당湖堂에 천거되어 사가독서하였다. 주상이 환취정環翠亭에 행차했을 때 임시로 본 과거에서 선생이 1등을 차지하자, 명성이 자자하여 겨룰 자가 없으니 당시의 의논이 제일의 청망淸望이라며 영주瀛洲에 오른 것6)에 비겼다. 얼마지 않아 정언에 임명되었다. 이 당시 신수근愼守勤이 막 청현직淸顯職에 오르자 선생이 외척이 점차 권세를 얻을 조짐이라는 이유로 불가함을 힘써 간하니7) 강직하다는 명성이 조정을 진동시켰다.
임자년(1492)에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자 소를 올려 돌아가 어머니를 뵈었다.
계축년(1493)에 검상檢詳으로서 사인舍人에 올랐고, 또 서장관으로서 연경에 갈 때 역사驛舍의 병풍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붓으로 거의 다 먹칠해 버렸더니 역관驛官이 통사通事를 불러 괴이하게 여기며 따졌다. 통사가 “서장관이 서화에 능하니 필시 그의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러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역관이 머리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곳에 이르자 새로 단장한 소병素屛(그림이나 글씨 없는 흰 병풍) 두 개가 펼쳐져 있었다. 선생이 하나에는 글씨를 하나에는 그림을 그려 절묘한 품격을 다 갖추니, 보는 이들이 감탄하였다. 또 시를 잘 짓는 것으로 중국 도성에 이름을 떨쳤는데, 뒤에 중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공이 북경에서 지었던 시를 전하며 외었다.

갑인년(1494)에 의성 현령義城縣令에 임명되었다. 어머니가 당시 아직 건강하여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40운으로 된 오언시를 지어 주자, 선생이 삼가 받아서 외었다.
권수헌權睡軒(권오복權五福)도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1
명성이 어려서부터 남쪽에서 높더니 聲名少小聳南斗
고상한 선비 풍류는 귀양 온 신선8)이었네 儒雅風流是謫仙
군왕 곁에서 명망 높아 일찍이 벼슬하고 昵幄望隆通籍早
부절 나누어 지방 다스리라는 명을 받았네 分符命下許城專

?2
고을에 세 가지 일로 주나라 교화 이루고9) 鄕閭三物成周化
일천 집 밥 짓는 연기 한나라 순리10) 이으리 煙火千家續漢循
속된 아전들은 어지러이 떠들어 댈 뿐이지만 俗吏紛紛徒爾耳
왜 늦게 오셨느냐고 이 사람을 칭송하리라11) 應歌來暮頌斯人

고을에 부임한 처음에 향교가 퇴락한 것을 보고 터를 골라 옮겨 세우고 봉급을 내어 공사를 도우니 규모가 크고 넓게 되었다. 경내에서 명망 있는 선비를 초빙하여 고을의 자제를 가르치면서 한결같이 시 외고 예 익히는 것을 옛 법도대로 하였다. 예악을 익히는 소리가 늘 들리자 당시 사람들이 문소聞韶(의성義城의 옛 이름)를 무성武城12)에 견주었다. 객관 남쪽에 죽루竹樓를 짓고 공이 물러나 쉬는 장소로 삼으며 기문을 지어 걸자, 당시의 문사文士들이 전해 가며 외었고, 심지어 소송하는 문서에 휘갈기듯 쓴 글씨조차 사람들이 모두 보배로이 여겨 간직하였다.
무오년(1498)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당시에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의 무리가 청류淸流를 무고에 얽어 넣으니 화가 조만간에 미칠 일이었으나 선생은 편안히 스스로 즐기며 근심하지 않았다. 망헌忘軒 이주李胄13)와 함께 행정杏亭에서 바둑을 둘 때 바깥사람이 한 무리의 붉은 옷을 입은 관원이 곧장 골짜기로 들어온다고 전하자 주위에서 바둑을 그만두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천천히 “체포의 명을 듣지 않았으니 아직은 한산인閑散人14)이다.”라고 하고 여전히 대국하였다. 이윽고 의금부 도사가 과연 도착하였다. 선생이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영결하고 싶다.”라고 하자, 의금부 도사가 불쌍히 여겨 허락하였다.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니 어머니는 범방范滂의 일15)을 끌어와서 비유하며 “네가 제대로 된 죽음을 얻게 되었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겠느냐. 너는 가거라. 잘 죽어서 나를 염려하지 마라.”라고 하였다.
망헌忘軒과 한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국문하는 날에도 정신과 낯빛이 변함없었고, 손으로 땅을 그어 긴 막대기 같은 한 글자를 쓰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글자를 아는 한 명의 종이 있었는데 함께 심문받다가 그도 땅에 획을 긋고 나서 말이 없었다. 죄를 정하던 날 곤장 80대에 북쪽의 국경 지대로 유배되었다. 고산역高山驛을 지나면서 “외로운 충절을 자부해도 남은 인정하지 않건만[孤忠自許衆不與]”이라는 율시 한 수를 벽에 쓰고 떠났더니 감사가 이를 아뢰었다. 교동주喬桐主(연산군燕山君)는 원망하는 뜻이 있다고 여겨 체포해서 국문하여 죽이니, 당시 조정에서는 두려워하며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고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만이 글을 올렸으나 구할 수 없었다. 형을 받던 날 안색이 평소와 다름없었고, 다만 소리 높여 “수양산이 아득해졌으니 나를 묻을 곳이 없구나.[首陽邈矣 埋我無地]”라고 하자, 듣는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금계金溪 사망동沙芒洞 간좌艮坐의 터에 반장하였다.
선생의 용모는 단아하여 맑은 물속의 연꽃 같았고, 지조는 맑고 깨끗하여 얼음 호리병에 든 가을 달 같았다. 문장을 지으면 평범함을 벗어나서 붓 가는 대로 도도하게 흘러, 바로 그 문체와 품격이 한나라나 당나라 때의 문장과 동일하였다. 시 또한 한가롭고 넉넉하면서 여유로워 성정에서 우러나와 옛 시인의 풍치와 운이 있었고, 서화와 의약, 복서卜筮와 음률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점필재 김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선생이 소중히 여기며 “이 아무개를 만나고부터 흉금이 깨끗해졌다.”라고 하였다. 정일두·김한훤 두 선생과 도의道義의 교제를 하였고, 또 김탁영·남추강 등과는 벗으로 잘 지냈으며, 추강은 그중에서도 가장 공경하고 중히 여긴 분이었다. 무풍 부정茂豐副正16)이 한번 보고는 남다르게 여겨 “공은 우리 동방의 시선詩仙이다.”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다그치는 말이나 발끈한 표정이 없었고 아무리 갑작스러운 때라도 어쩔 줄 몰라 한 적이 없었다. 경연에서 강론할 때는 한결같이 하남 부자河南夫子(정호程顥와 정이程頤)를 따랐고, 사헌부에서 직언을 할 때는 한나라 조정의 급장유汲長孺17)에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기개 높고 맑은 풍모는 바로 해동의 노중련魯仲連18)이었다. 사화 때문에 그의 아름다운 말과 행실, 웅건한 문장과 굳센 필체가 세상에 전하지 않으니 안타깝다.
중종 때 억울함을 씻고 관직이 회복되었고, 숙종 때에 유생의 상소로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영가 권씨永嘉權氏 진사 권작權綽의 따님이다. 혈육이 없어 아우 공준公準의 셋째 아들 덕연德淵을 후사로 삼았으니 참봉이다.
덕연이 3남 3녀를 낳으니 장남은 윤공胤恭이고 차남은 윤검胤儉이니 둘 다 참봉이다. 삼남은 윤양胤讓이니 진사이다. 권경전權景銓과 직장 권명權銘이 사위이다.
윤공이 아들 둘을 낳으니 환煥과 엽燁이다. 윤검은 아들 하나를 낳으니 민각民覺이고, 호는 삼은三隱이다. 윤양의 양자는 전연사典涓司 정수廷秀이다.
직장 환은 복창復昌을 낳았고 엽은 재창再昌을 낳았다. 민각은 아들 셋을 낳으니 장남은 상육尙堉이고 다음은 상돈尙墩과 상연尙堧이다. 정수는 아들 넷을 낳으니, 장남은 익杙이고, 차남은 추樞, 삼남은 은檼, 사남은 각桷이다.
상연이 아들 셋을 낳으니 진영震英, 장영章英, 최영最英이다.
진영에게 아들 다섯이 있으니 시화時華·원화元華·익화益華·복화復華·춘화春華이고, 최영에게 아들 셋이 있으니 천화天華·기화箕華·성화盛華이다.
복화의 양자는 동집東楫이니 나를 찾아와 행장을 지어 달라고 한 학경學慶이 바로 그의 아들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하늘이 빼어나고 특출한 인재를 내었음에도 큰 길거리를 활보하며 간직한 포부를 크게 펼쳐 보지도 못하고, 마침내 헐뜯는 자의 간사한 비방에 걸려 일시에 도륙되는 화를 면치 못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다행하게도 천지의 운행이 돌고 돌아 임금님이 사면하여 원통함을 씻어 주고 벼슬을 추증하니 은택이 천지에 넘쳐흘렀다. 선생의 부자父子 같은 경우에는 떳떳한 공론이 백대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아서, 선생은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되고 눌재는 내성柰城의 백록리사栢麓里社19)에 제향되었다. 근래에는 또 도의 의논이 일제히 일어나 금호공琴湖公(이종준과 이홍준의 부친 이시민李時敏)을 하단계河丹溪의 창렬사彰烈祠20)에 모시자고 하니 그제야 천도가 밝게 빛나 인심이 후련하게 여긴다.
저 이극돈과 유자광 등이 마르고 썩은 살점으로 지옥에서 달게 천만년을 충신과 현인을 죽인 창귀倀鬼21)가 되니, 사람들이 다투어 그들의 관을 찍어내고 살점을 나누어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 먹이려고 하지만 개조차도 먹지 않는다. 화가 한때에 참혹하였으나 공론은 백년이 지나도 엄하니, 이에 백세 뒤 어진 자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으리라.
학경은 행실이 단정하고 신중하며 선조에게 독실하니, 상대해 보고서 명문가의 후예임을 알 수 있었다. 왔다 갔다 하면서 정성스럽고 간절함이 사람을 감동하게 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늙어 흐릿한 정신을 가다듬고 정신을 수습하여 대략 세계世系와 덕행을 갖추어 기록하고, 끝에 이와 같이 자손록을 보충하여 그의 요구를 채워 주며, 아울러 스스로 고산경행高山景行22)의 생각을 부친다.

금상(순조) 6년 병인(1806) 10월 아무 날 통정대부通政大夫 전 행 돈녕부 도정前行敦寧府都正 풍산豐山 류규柳氵+奎23)가 삼가 행장을 짓다.


-------------------------
1) 선생은……태어났다 : 『성종실록』에 이종준이 성균관 전적으로 있을 당시(1491년) 사간원의 서경(署經)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올린 상소를 보면, “갑술년에 아버지 이시민(李時敏, 1430∼1473)이 동모(同母)와 이모(異母)의 구별에 상관없이 연좌되면서 예안현(禮安縣)에 정속되었다.……그때 신은 태어난 지 3개월의 어린아이로, 강보 속에 있었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갑술년은 1454년이며, 예안현에 정속된 것이 9월 9일이므로 태어난 지 3개월 되었으면 6월경에 태어났다.(『端宗實錄』 2年 9月 9日, 『成宗實錄』 22年 1月 17日)

2) 칠보시(七步詩) : 위 문제(魏文帝)가 자신의 아우인 조식(曹植)을 제거하려고 일곱 걸음을 걸을 동안에 시를 완성하게 하고, 만일 시를 짓지 못하면 사형을 내리겠다고 했다. 이때 조식이 지은 오언시를 칠보시라고 하며, 흔히 재주가 민첩함을 일컫는 전고로 쓰인다.

3) 계사년(1473) : 앞의 출생 연도와 관련된 주석을 참고하면 이종준이 20세 되던 해이다.

4) 정유년(147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 바로 앞의 각주를 참조하면 1477년의 정유년은 이종준이 24세 되던 해이다.

5) 병오년(148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 장각 소장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을사년(1485) 별시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6) 영주(瀛洲)에 오른 것 : 신선들이 산다는 영주에 오른다는 뜻으로, 마치 선계(仙界)에 오른 것처럼 학사가 영광된 자리에 올라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홍문록(弘文錄)에 들거나 홍문관의 관원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7)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이……간하니 : 신수근의 자는 근중(勤仲)·경지(敬之), 호는 소한당(所閑堂),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연산군의 처남이며, 중종의 장인이다. 1504년 임사홍(任士洪)과 함께 모의하여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가 폐위·사사된 내막을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중종반정 때 박원종 등에 의해 수각교(水閣橋)에서 살해당했다. 청현직(淸顯職)은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임명하는 벼슬로, 규장각·홍문관·선전관청(宣傳官廳) 등의 벼슬을 말한다.(『燕山君日記』 4年 7月 29日)

8) 귀양 온 신선 : 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귀양 온 신선이란 뜻으로, 문재(文才)가 뛰어난 사람에게 쓰이는 표현이다. 이백(李白)이 지은 「술을 마주하고 하감을 그리다[對酒憶賀監]」라는 시의 서(序)에 나오는 말이다.

9) 세 가지……이루고 : 『주례』 「대사도(大司徒)」에서 “고을에 세 가지 일로 만민을 가르치고 빈객으로 예우하여 천거하여 국학에 올려 보낸다.”라고 하였는데, 세 가지 일이란 육덕(六德)·육행(六行)·육예(六藝)를 말한다. 육덕은 지(知)·인(仁)·성(聖)·의(義)·충(忠)·화(和)이고, 육행은 효(孝)·우(友)·목(睦)·인(婣)·임(任)·휼(恤)이며, 육예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이다.

10) 한나라 순리(循吏) : 수령으로서 선정을 쌓으라는 말이다. 순리는 법을 지키면서 성실하게 근무하는 관리를 말하는데 한나라 때에는 지방관으로서 탁월한 경력을 쌓은 뒤 조정에 들어와 고관이 된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종준에게 덕담을 한 것이다.

11) 명성이……칭송하리라:수헌집(睡軒集) 권1과 이 문집의 뒤에 나오는 「의성으로 부임하는 이중균 을 전송하며[送李仲匀之任義城]」에서 모두 네 수의 절구를 싣고 있다. 여기서는 제1수와 제4수만 실었다.

12) 무성(武城) : 문교(文敎)를 상징한다. 노(魯)나라 고을 이름인데,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이곳의 재(宰)로 있을 적에 공자가 그곳을 지나다가 거문고를 타고 시가(詩歌)를 읊조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고사가 있다.(『論語』 「陽貨」)

13) 이주(李胄, 1468∼1504) : 자는 주지(胄之), 호는 망헌(忘軒),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진도(珍島)로 귀양 갔다. 갑자사화 때는 전에 궐내에 대간청(臺諫廳)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김굉필(金宏弼)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성품이 어질며 글을 잘하였고, 시에는 성당(盛唐)의 품격이 있었다.

14) 한산인(閑散人) : 벼슬을 내놓고 한가히 지내는 한량(閑良)과 일정한 직업 없이 한가하게 지내는 산인(散人)을 합한 뜻으로 한 말이다.

15) 범방(范滂)의 일 : 범방은 후한(後漢) 때 절의를 지킨 사람이다. 그가 당고(黨錮)의 화에 휘말려 죽게 되자 그의 어머니에게 영결을 고하였다. 어머니가 “너는 지금 이응(李膺)·두밀(杜密)과 명성이 같은데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 훌륭한 명성이 있고 오래 살기를 요구하는 이 두 가지를 겸할 수는 없다.”라고 하며 오히려 그 아들을 위로하였던 고사를 말한다.(『後漢書』 卷67 「黨錮傳」)

16) 무풍 부정(茂豐副正) : 이총(李摠, ?∼1504)을 말한다. 태종의 아들 온녕군(溫寧君) 이정(李䄇)의 손자이다. 자는 백원(百源),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구로주인(區鷺主人)·월창(月牕)이다. 무오사화 때 유배되고 갑자사화 때 부자가 처형되었다. 청담파(淸談派)의 중심 인물로 시문에 능하고 필법에 뛰어났다. 『연산군일기』 3년∼10년 사이의 기사를 보면 연산군 3년 두원 부정(豆原副正)으로 있었던 기록은 있으나 무풍 부정으로 있었던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연산군 4년부터 무오사화를 당할 때까지 이총은 무풍정(茂豐正)이었다.

17) 급장유(汲長孺) :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신인 급암(汲黯)으로, 장유는 그의 자이다. 황제 앞에서도 기절(氣節)을 굽히지 않고 강직하게 바른말을 서슴없이 하였기 때문에 무제가 그를 꺼리면서도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고 일컬었던 인물이다.(『史記』 卷120 「汲鄭傳」)

18) 노중련(魯仲連) :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이다. 그가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천자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천자를 참칭(僭稱)한다면 나는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라고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후퇴시켰다고 한다.(『史記』 卷83 「魯仲連傳」)

19) 백록리사(栢麓里社) : 1652년에 세웠다. 안동의 내성(柰城)에 있었던 사당으로 용재 이종준과 눌재 이홍준 형제를 모셨다.

20) 하단계(河丹溪)의 창렬사(彰烈祠) : 단계는 하위지(河緯地, 1412∼1456)의 호이다. 자가 천장(天章)·중장(仲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사육신의 한 사람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804년 경북 안동시 서후면 교리에 하위지의 학문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렬서원(彰烈書院)을 짓고 창렬사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21) 창귀(倀鬼) : 범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혼(魂)으로,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범의 부림을 받아 범이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닐 때 앞장서서 먹이를 찾아 준다고 한다. 못된 짓을 하는 데 앞장서는 사람을 비유한다.

22) 고산경행(高山景行) : 고인의 큰 덕행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시경』 「거할(車舝)」에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高山仰之 景行行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3) 류규(柳氵+奎, 1730∼1808) : 자는 사극(士極)·수부(秀夫), 호는 임여재(臨汝齋),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류성룡(柳成龍)의 6세손이다. 천거로 벼슬을 하여 사헌부 감찰·경산 현령·돈녕부 도정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저서로는 『임여재집』이 있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용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행장行狀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용재선생행장 역문(慵齋先生行狀 譯文)

-풍산(豊山) 유구(柳) 지음

용재(慵齋) 이선생(李先生)을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봉안한지 몇 해 후에 선생(先生)의 묘소 앞에 비석을 세우고 선생(先生)의 팔(八)대손 학경(學慶)이 유적(遺蹟)을 소매에 넣고 나에게 찾아와 말하되 『우리 선조(先朝)의 절행(節行)은 다만 문충공(文忠公-호 서애西厓 이름 성룡成龍)이 지은 무오(戊午-1498)년 당적(黨籍)이 세상에 발행 되었고 가장(家莊)의 원본은 학경(學慶)의 종선조(從先朝) 눌재공(訥齋公)이 지었으나 당시 숨김에 구애받아 세덕(世德)을 상세히 갖추지 못하였고 또 세대(世代)가 멀어서 글자의 획이 좀먹어 완편(完編)이 되지 못하였으나 감히 청하옵건대 보충하고 삭제하여 먼저 선생(先生-서애西厓)의 기록한 의사를 이어 주옵소서』하니 보잘 것 없는 내가 늙고 병들어 감당할 수가 없으나 다만 세의로는 그러하니 감히 힘쓰지 않으리요 삼가 본상(本狀)에 의거하여 대강 아래와 같이 바로잡고 부첨한다.

선생(先生)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는 종준(宗準)이요 자는 중균(仲勻)이니 스스로 호를 장육당(莊六當)이라 또 용재(慵齋)라고 칭했다.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말기에 지수(之秀)라는 어른이 있으니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월성군(月城君)을 봉했다.

이분이 규(揆)를 낳으니 벼슬이 사재(四宰)로 시호는 정렬(貞烈)이요 이분이 윈림(元林)을 낳으니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가 되었고 이분이 만실(蔓實)을 낳으니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선생(先生)에게 증조가 된다.

할아버지의 휘는 승직(繩直)이니 진사(進士)로 세종조(世宗朝)에 벼슬하여 양주목사(楊州牧使)와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를 행직하고 대사헌(大司憲)으로 벼슬을 마침에 청백(淸白)으로 조정에 추중을 받았다.

선고(先考)의 휘는 시민(時敏)이니 생원(生員) · 진사(進士)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문장(文章)과 명절(名節)로 한 세상에 무거운 명망이 있었는데 김상국(金相國) 절재(節齋) 종서(宗瑞)의 화에 연좌되어 금고(禁錮)를 당하였으므로 금계(金溪)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생도(生徒)들을 가르치어 성취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호를 금계(琴溪)라 했다. 고을 사람들이 바야흐로 사우(祠宇)에 숭봉할 것을 의논하고 있다.

어머니는 영가 권씨(永嘉權氏)니 현감(縣監) 계경(啓經)의 따님이다. 선생(先生)이 영가(永嘉-안동安東)의 금계촌(金溪村)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재주와 기품이 준수하여 오(五)세때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칠(七)세에 글을 읽으매 큰 뜻을 통하니 생원공(生員公)이 시(詩)로 경계하여 이르되 『한번 밥 먹는 순간에도 세월이 흐름을 잊는다면, 어찌 이 세상에 명성(名聲)을 심을 수 있으리요, 한가한 몸 창앞에 앉았으나, 방탕한 뜻은 들판으로 달리듯 하느리라』고 하니 선생(先生)이 비록 어린 나이었으나 이 시(詩)를 크게 외우며 더욱 공부를 힘썼다.

십(十)세에 생원공(生員公)께 말씀을 여쭈어 이르되 『경서(經書)는 모두 성현(聖賢)들이 전해준 글이지만 혹은 문인(門人)들의 기록에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주역(周易)에 이르러서는 문왕(文王) · 주공(周公) · 공자(孔子) 세 성인이 손수 썼으니 이게 참으로 성인(聖人)의 글이며 배우는 자가 가장 존중하게 여겨야 합니다.』하니 생원공(生員公)이 듣고서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선생(先生)이 손수 한 그루의 은행나무를 대청(大廳)앞에 심었는데 생원공(生員公)이 말씀하기를 『이 나무는 공자(孔子)께서 학문을 강마하던 나무이니 다른 날에 마땅히 덕망이 성대한 군자(君子)로 더불어 이 나무 아래에서 학문을 행하면 모두 성인의 무리가 될 수 있거든 하물며 우리 동국(東國)은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이 지금껏 유전되고 있으니 어찌 성인(聖人)과 군자(君子)가 없다』하리요.

십삼(十三)세에 문장이 성취되고 글씨 쓰는 법도 고체(古體)를 모방했다. 향해(鄕解-지방에서 보이는 문과초시)에 가고저 하니 생원공(生員公)이 학업이 완성하지 못했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일찍이 서울에 가서 유학하고 있었는데 생원공(生員公)이 그 재주만 믿을까 염려하여 매양 편지를 써서 경계하였으니 두 번째 쓴 편지에 대강 이르기를 『너의 유학하는 것이 호협(豪俠)한 무리에 견줄 바가 아니니 언행(言行)을 조심하고 주색(酒色)을 경계하여 낭만히 놀지 말고 방랑한 사람을 사귀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조(先祖)들이 나라에 명신(名臣)이 되었었는데 나의 몸에 이르러 불행히도 묻히게 되었으니 나는 할 수 없거니와 적선(積善)한 지가 오래니 어찌 남은 경사가 없으리요 네 형도 배우지도 못하고 재주도 없으며 네 아우도 역시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니 나의 바라는 바는 너 뿐인데 너도 역시 학문에 정성이 없구나 정성이 부족하면 실상이 없기 마련이다. 내가 말한바 실상이라는 것은 덕행을 이름이요 재화(才華)가 아니다. 진실로 그 행실이 없으면 비록 칠보(七步)의 재주*1)가 있은들 무엇을 취할까』했다. 선생(先生)이 이 교훈을 복종하여 비록 미미한 말과 세쇄한 행실에도 감히 삼가지 않지 않았다.

계사년(癸巳年)에 생원공(生員公)의 상사를 당하여 애통하기를 예절에 지나게 하고 복을 벗은 후에도 어머니 명령으로 산에 들어가 글을 읽었는데 같은 마을에 배공(裵公) 인(裀)이 같이 가서 공부하는데 정신이 피로하면 배공(裵公)이 책을 덮고 쉬는데 선생(先生)은 밤을 지새워 거두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기를 몇 개월이 되어도 정력이 처음과 같았다.

배공(裵公)이 말하기를 『자네가 혈기로 된 몸인데 근고가 남보다 이와 같이 지날 수가 있는가?』하니 선생(先生)이 말씀하기를 『지극한 즐거움이 여기에 있느니 무슨 피권이 있겠는가』했다. 매월에 어머니를 와서 뵙고 한 달 읽은 공부를 어머니 앞에 외우는데 한자도 틀리고 빼놓은 적이 없은 후라야 어머니께서 별찬을 마련하여 주었다.

정유년(丁酉年)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고 서울에서 우거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남추강(南秋江) 효온(孝溫)으로 더불어 행화방(杏花坊)에서 놀았다. 권경유군요(權景裕君饒-이름과 자)라는 사람이 그 의용(儀容)이 청수함을 보고 맞아서 자리에 앉게 하고 말하되 『자네는 속세의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선학(仙鶴)이 인간에 있다고 하며 군요(君饒)가 먼저 사운(四韻)을 불렀다.

선생(先生)이 응구첩대로 글을 지었는데 참으로 속진(俗塵)에 벗어난 태도가 있었다. 군요(君饒)가 크게 놀라며 이르되 『사람들이 말하기를 적벽부(赤壁賦)에는 인화(烟火)의 기운이 없다*2)고 했는데 자네의 시(詩)가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보다도 지난다』하고 인하여 한잔 술을 권했다.

산생(先生)이 일어나 가려고 하니 군요(君饒)가 손을 잡아 만유하며 가지 못하게 하고 문을 닫고 촛불을 켜놓고 밤을 새워 시를 읊고 아침에 보니 동대문(東大門) 밖에 우거하는 이진사(李進士)였다. 크게 웃고 작별했는데 이후로부터 막역간의 친구가 되었다. 매일 추강(秋江)으로 더불어 단종(端宗)의 지난 일을 말하다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적이 없었다.

병오(丙午)년에 과거에 오르고 정미년(丁未年)에 정자(正字)로 이조좌랑(吏曹佐郎)에 옮기었다. 이해 가을에 일본(日本) 사신이 나오매 위에서 관방(關防-국가의 방어)이 심히 중대하고 또 저나라 사진이 문재(文才)도 있으니 극력으로 호송사(護送使)를 선택하라는 명령이 있으므로 이조(吏曹)에서 선생(先生)으로써 응대한 것이다. 선생(先生)이 명령을 받들고 동래(東萊)에 이르니 외국 사신이 선생(先生)의 글씨와 그림을 보고 절하고 받으며 말하기를 『처음으로 천하(天下)에 소중한 보물을 받았다』했다.

겨울에 또 평안도(平安道) 평사관(評事官)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상원군(祥原郡)에 이르러 삼소도(三笑圖)의 시(詩)를 썼는데 선생(先生)의 문집 가운데에 실려있다. 후일에 남추강(南秋江)이 여기에 지내다가 크게 놀래어 이르되 『이 글은 반드시 우리 친구의 수단이라』했다.

무오년(戊午年)에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제수했는데 어세겸(魚世謙)의 선출로 호당(湖堂)에 옮기고 여가를 주어 글을 읽게 했다. 왕(王)께서 환취정(環翠亭)에 행차하시었는데 선생(先生)이 환취정 시(詩)를 응제(應製)하매 일(一)등을 차지하므로 성명이 자자하여 선봉(先鋒)을 경쟁하는 자가 있으나 한때의 언론들이 선생(先生)을 제일이라 하여 맑은 명망을 영주(瀛州-선경仙境을 말함)에 오른 것으로 비유했다.

얼마 후에 정언(正言)을 배수하니 이때에 신수근(愼守勤)이 처음으로 청현(淸顯)의 자리에 올랐다. 선생(先生)이 외척(外戚)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 불가하다 하여 힘써 간하므로 곧다는 말이 조정(朝廷)에 가득했다.

임자년(壬子年)에 부수찬(副修撰)을 배수하여 소장(疏章)을 올리고 돌아와 부모를 뵈었다. 계축(癸丑-1493)년에 검상(檢詳)으로 사인(舍人)에 승진하고 또 서장관(書狀官)으로써 중국(中國)에 들어갔는데 여관에 그림 병풍이 좋지 못함을 보고 붓으로 전체를 뭉개었는데 역관(譯官)이 통사관(通事官)을 불러 괴이하게 여겨 힐책하였다. 통사관(通事官)이 말하기를 『서장관(書狀官)이 서화(書畫)에 능숙하므로 필시 그 뜻에 만족치 못하여 그러한 것이다』하니 역관(譯官)이 머리를 끄덕이고 말았다.

돌아오던 길에 그 처소에 이르러 새로 꾸민 흰 병풍 두 좌를 펴놓고 선생(先生)이 하나는 그 시를 쓰고 하나는 그림을 그리었는데 다 같이 절묘한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보는 자들이 모두 감탄하여 완상(玩賞)했다. 또 시율(詩律)을 잘하므로 중국(中國)에 까지 소문이 났는데 뒤에 중국(中國) 사신이 와서 전하며 외웠다.

갑인(甲寅-1494)년에 의성현령(義城縣令)을 제수했는데 어머니께서 이때까지 강녕(康寧)했다.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뜻으로 사십(四十) 운자를 지어 주니 선생(先生)이 절하여 받고 항시 외쳤다.

권수헌(權睡軒)이 시(詩)를 지어 전송 하였는데 『성명(聲名)은 소년 시절부터 남극성(南極星) 같이 높았으니, 유현(儒賢)의 풍류(風流) 적선(謫仙-이태백李太白)과 같으네. 경연(慶筵)에서 명망이 높았으니 일찍 벼슬에 나갔고, 부절(符節)을 나눈 명이 내려오니 한 고을을 맡았네. 향군(鄕郡)애는 삼물(三物)*3)로 가르치어 주(周)나라 교화를 이루었고, 일천(一千) 가호(家戶)에 인화(烟火)가 끊기지 않았으니 한(漢)나라 순리(循吏)를 이었네. 아전들 바삐 다니며 무엇 하나 아침저녁으로 태평가 부르며 이 사람을 기리네.』라고 하였다.

현감으로 부임하던 처음에 향교(鄕校)가 퇴락한 것을 보고 터를 가리어 세우고 봉급을 덜어서 공역(工役)의 비용을 보조하므로 규모가 굉장하였다. 고을 안에 유림의 명망이 있는 자를 불러 고을 자제들을 가르치어 시(詩)를 외우고 예를 익히되 한결같이 예전 법도를 따라서 현송(絃誦)의 소리가 항상 들리니 땟 사람들이 문소(聞韶)를 무성(武城)*4)에 비유했다.

죽루(竹樓)를 관사(館舍)의 남쪽에 지어놓고 공사(公事)에서 물러와 휴식하는 곳을 삼고 기문을 지어 걸었는데 한때 문사(文士)들이 전하여 외웠다. 소장(訴狀)에 마구 쓴 글씨까지도 고을 사람들이 모두 보배로 삼아 감추어 두었다.

무오(戊午-1498)년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왔다. 이때에 유자광(柳子光) 아극돈(李克墩-무오사화戊午士禍의 장본인) 무리가 청백한 사류(士流)를 무고로 얽어서 화가 조석으로 이르게 되었다. 선생(先生)이 태연히 스스로 즐기며 근심을 삼지 않고 이망헌(李忘軒) 주(胄)로 더불어 행정(杏亭)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밖에서 사람이 전하는 말에 붉은 옷을 입은 관리 한 부대가 직접 동네로 들어오고 있으니 좌우(左右)에서 청하기를 『바둑을 거두십시오』 선생(先生)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잡아오라는 명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공연한 소리라』 하고 바둑을 대하여 처음과 같이 두고 있었다.

조금 후에 금오랑(金吾郞-금부도사禁府都事)이 과연 도착했다. 선생(先生)이 말씀하기를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영결하고 나온다』하니 금오랑(金吾郞)이 측연히 여기어 허락했다. 인하여 어머니께 절하고 하직하니 어머니가 범재(范滓)의 일*5)로 개유하며 이르되 『네가 죽을 곳을 얻었으니 내가 무었을 슬퍼 하리요 네가 가서 잘 죽어야 하고 나를 염려하지 말라』하였다. 이망헌(李忘軒)으로 더불어 좌석을 같이하고 있다가 체포 되었다.

국문을 받던 날에 얼굴 빛을 변하지 않고 손으로 한일 자를 긴 장대 같이 그리고 한말도 없었다. 종 하나를 데리고 갔었는데 능히 글자를 알을 정도였다. 같이 국문을 받는데 또한 땅을 그면서 말이 없었는데 죄가 결정되던 날에 곤장 팔십(八十)대를 때리고 북계(北界)로 유배하였다.

길이 고산역(高山驛)을 지나는데 『외로운 충성을 자신하나 사람들은 더불어 주지 않는다』는 한 시를 벽 위에 쓰고 갔다. 감사가 위에 올리니 연산군(燕山君)이 원망하는 뜻이 있다하여 옥에 가두었다가 죽이고 말았다. 이때 조정에서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고 유독 홍허백(洪虛白) 귀달(貴達)이 상소(上疏)하여 물어줄 것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형을 받던 날에 얼굴빛이 평일로 더불어 다르지 않았고 다만 소리를 가다듬어 말하되 『수양산(首陽山-백이伯夷·숙제叔齊가 죽은 곳)이 막연하여 나를 묻을 땅이 없구려』하니 듣는 자가 눈물을 흘리었다. 금계(琴溪) 사망동(沙芒洞) 간좌(艮坐)의 언덕으로 반장하였다.

선생(先生)의 용모가 단정하고 아담하여 맑은 물에 연꽃과 같고 지조(志操)가 맑고 정결하여 얼음 위에 비춘 가을 달과 같았다. 글을 지으매 활발하여 붓을 드는 대로 물이 흐르듯 하여 직접 한(漢) · 당(唐)의 글로 체격이 같으며 시(詩)도 또한 넉넉하고 급박하지 않아 성정(性情)에서 울어나므로 옛 시(詩)하는 사람의 풍치가 있었으며 서화(書畫) · 의약(醫藥) · 점술 · 음악에 정하고 교모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을 선생으로 섬기었는데 김선생(金先生)이 큰 그릇으로 여기며 말하기를 『이군(李君)을 본 후로부터 가슴이 상쾌하다』했다. 정일두(鄭一蠧-이름 여창汝昌 문묘文廟에 배향) 김한훤(金寒暄-굉필宏弼 문묘文廟에 배향) 두 선생으로 더불어 도의(道義)에 벗을 삼고 또 김탁영(金濯纓-이름 일손馹孫) · 남추강(南秋江-이름 효온孝溫) 제현으로 벗을 삼았는데 추강(秋江)이 가장 공경하고 중하게 여기었다. 무풍(茂豊) 부정(副正)이 한번 보고 기어하게 여기며 아르거늘 『공은 우리 동방(東方)의 시선(詩仙)이라』했다.

공이 어릴 때부터 빠른 말과 급박한 빛이 없으며 비록 창졸에 있어서도 일찍이 지조를 잃은 적이 없으며 그 경정(經筳)에서 강론함은 한결같이 하남부자(河南夫子-정명도程明道 · 이천伊川)를 따르고 상대(霜臺-사간원司諫院)에서 곧은 말은 한(漢)나라 조정에 급장유(汲長孺-한무제漢武帝때 직관直官인 급암汲黯의 자字)에게 부끄러움이 없으며 보통에 뛰어난 맑은 의논을 문득 해동(海東)에 노중련(魯仲連)*6)이라 할 수 있는데 애석하게도 그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며 웅건한 문사(文詞)와 건장한 필법이 세상에 전하지 못함은 사화(士禍)의 집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종조(中宗朝)에 원통함을 닦게 되고 벼슬을 회복해 주었다. 숙종(肅宗)때에 유림의 상소로 인하여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증직했다. 부인(夫人)은 영가 권씨(永嘉權氏)니 진사(進士) 작(綽)의 따님인데 소생이 없어서 아우 공준(公準)의 셋째 아들 덕연(德淵)으로 아들을 삼았으니 참봉(參奉)이다.

덕연(德淵)이 3남2녀(三男二女)를 두었으니 맏이는 윤공(胤恭)이요 다음은 윤검(胤儉)이니 다 참봉(參奉)이요 그 다음은 윤양(胤讓)이니 진사(進士)요 권경전(權景銓) 직장(直長)과 권명(權銘)은 사위다.

윤공(胤恭)은 3남(三男)을 낳았으니 환(煥) · 엽(燁) · 찬(燦)은 수직(壽職-나이가 많은 이에게 내리는 직첩)으로 가선(嘉善)이요 윤검(胤儉)은 민각(民覺)을 낳았으니 윤양(胤讓)은 2남1녀(二男一女)를 두었으니 정수(廷秀) · 민석(民奭)이요 딸은 김익수(金益粹)에게 시집갔다.

환(煥)은 복창(復昌)을 낳았고 엽(燁)은 재창(再昌)을 낳았고 찬(燦)은 2남(二男)을 낳았으니 귀실(貴實) · 기실(起實)이요 민각(民覺)은 3남(三男)을 낳았으니 상육(尙堉) · 상돈(尙墩) · 상연(尙堧)이요 정수(廷秀)는 4남2녀(四男二女)를 두었으니 익(杙) · 추(樞) · 은(檼) ·각(桷)이요 사위는 이지백(李知白) · 곽륭(郭窿)이요 민석(民奭)은 1남(一男)을 두었으니 선언(善彦)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하늘이 영걸의 특출한 재주를 내어 능히 태평한 거리에 활보하여 크게 쌓인 포부를 펴지 못하고 마침내 참소하는 자들의 입줄에 오르게 되어 한때에 죽이는 화를 면하지 못했음은 어찌 함인가? 다행히 전지(天地)의 운수가 들어오고 우레와 비가 내리어 원통함을 씻고 벼슬을 주어 혜택이 천지(天地)사이에 가득하였다.

선생(先生)의 부자(父子)에게도 떳떳한 공의(公議)가 민몰하지 않으므로 선생(先生)은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배향되었고 눌재(訥齋)는 내성(柰城) 백록사(栢麓祠)에 배향 되었으며 근래에 또 도내의 의논이 일제히 발기되어 금호공(琴湖公)을 하단계(河丹溪) 창렬사(彰烈祠)에 봉안 되었으니 여기에서 하늘의 도가 밝고 사람들의 마음도 한번 쾌할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극돈(李克墩) · 유자광(柳子光) 같은 무리는 마른 백골과 썩은 시체를 잘라서 집에 먹이는 개를 주어도 먹지 않을 것이다. 화변은 한때에 참혹 하였으나 공의(公議)는 백년(百年)에 엄중함이니 여기에서 백세(百世)에 자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것이다.

학경(學慶)은 행검이 아담하고 공경하며 선조(先祖)의 일에 돈독한 분이다. 서로 대하매 명가(名家)의 후손이 됨을 알겠다. 이미 갔다가 다시 와서 정성의 간칙함이 사람을 감동할 만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리요 노혼함을 헤치고 정신을 수습하여 대강 선계와 덕행을 갖추어 그 청함에 대하여 나의 높고 크게 우러러 보는 생각을 부친다.


--------------------------------
1) 칠보(七步)의 재주 : 위(魏)나라 조식(曹植)의 재주를 말함. 그는 형님 문제(文帝)의 미움을 받아 칠보내(七步內)에 시(詩)를 지으면 죽이지 않는다 하니 칠보내(七步內)에 시(詩)를 지어 천하(天下)에 유명하였다.
2) 적벽부(赤壁賦) …… 기운이 없다. : 송(宋)나라 문장가(文章家) 소식(蘇軾)이 적벽강(赤壁江)에 뱃놀이하며 지은 글이 적벽부(赤壁賦)이다. 그 글은 익은 음식을 먹지 않는 신선(神仙)이 지은 것 같다하여 연화(烟火)의 기운이 없다고 한다.
3) 삼물(三物) : 주(周)나라에서 만민(萬民)을 가르키던 세가지 일이다. 일(一)은 육덕(六德)이니 지(智) · 인(仁) · 성(聖) · 의(義) · 충(忠) · 화(和)이고, 이(二)는 대행(大行)이니 효(孝) · 우(友) · 목(睦) · 인(婣) · 임(任) · 휼(恤)이고, 삼(三)은 육예(六藝)니 예(禮) · 악(樂) · 사(射) · 어(御) · 서(書) · 수(數)이다.
4) 무성(武城) : 공자제자(孔子弟子) 자유(子游)가 고을살이 하던 땅이름이다. 자유(子游)가 그 고을에서 문학(文學)에서 숭상해서 현송(絃誦)의 소리가 들림을 공자(孔子)가 기뻐한 일이 있다.
5) 범재(范滓)의 일 : 동한(東漢)시대 당고(黨錮)의 화(禍)에 걸리어 죽은 사람이다. 화(禍)를 당해 죽으려 갈 때 어머니가 이르기를 『네가 죽어서 이응(李膺) ·두밀(杜密)과 같이 이름이 있게 되리니 오히려 영광이라』했다.
6) 노중련(魯仲連) : 중국(中國)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사람이다. 진(秦)의 폭기(暴䎛)를 반대((反對)한 유명한 사람으로 천하고사(天下高士)로 일컬어졌다.

*출처: 1987년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