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용재유고이종준

[慵齋遺稿] [附錄] 寄慵齋居士[鄭虛菴 希良]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8:37

용재유고(慵齋遺稿) / 附錄


寄慵齋居士[鄭虛菴 希良]

客魂銷盡瘦崢嶸。咄咄長齋夢自驚。片月照心臨故國。殘星隨夢落邊城。故人字跡千金重。孝子聲名一髮輕。莫話陳雷生死地。從今粗亦識詩情。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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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거사에게 부치다[寄慵齋居士]
허암虛菴 정희량鄭希良1)

나그네 혼은 다 녹고 몸 여위어 앙상한데 客魂銷盡瘦崢嶸
돌돌하며2) 음식 끊고 꿈에조차 놀라네   咄咄長齋夢自驚
조각달은 마음을 알고서 고향을 비추고  片月照心臨故國
성긴 별은 꿈 따라 변방 성에 떨어지네   殘星隨夢落邊城
벗의 필적은 천금처럼 중한데              故人字跡千金重
3)의 명성은 한 올 털처럼 가볍구나    孝子聲名一髮輕
진뢰4)의 막역한 교분을 말하지 말라     莫話陳雷生死地
이제야 대략 세상 인정5)을 알게 되었네  從今粗亦識詩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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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희량(鄭希良, 1469∼?) :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菴),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1492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1495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이듬해 김전(金詮)·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하였다.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무오사화 때 사초 문제로 탄핵을 받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장형을 받고 의주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나 어머니가 죽자 고양에서 여묘살이를 하다가, 1502년 5월 산책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저서로는 『허암집』이 있다.

2) 돌돌(咄咄)하며 :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은호(殷浩)가 폐출당한 뒤에 종일 손가락으로 ‘돌돌괴사(咄咄怪事)’라는 네 글자를 끼적이면서 신세를 한탄했다는 고사가 있다.(『世說新語』 「黜免」)

3) 나 : 원문의 효자(孝子)는 부모를 잃은 뒤 상중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니, 정희량이 여묘살이 할 때임을 알 수 있다.

4) 진뢰(陳雷) : 한나라 진중(陳重)이 한고을에 사는 뇌의(雷義)와 친하게 지내었는데, 뇌의가 무재(茂才)에 천거되자 진중에게 사양하였다. 자사(刺史)가 듣지 않자 뇌의는 진중을 위하여 거짓 미쳐 도망해 숨었다.

5) 세상 인정 : 원문은 ‘詩情’으로 되어 있으나 『허암집』 권1에 근거하여 ‘時情’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용재선생유고 > 제현이 준 시문[附諸賢投贈詩文] > 용재거사에게 부치다[寄慵齋居士]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속동문선] 기 용재거사(寄慵齋居士)

정희량(鄭希良)

나그네 혼이 녹아 다하고 여위어 앙상한데 / 客魂銷盡瘦崢嶸
돌돌하며 홀로 앉아 스스로 놀라네 / 咄咄長齋默自驚
조각달은 마음을 비추어 옛 나라에 다다랐고 / 片月照心臨古國
쇠잔한 별은 꿈을 따라 변방 성에 떨어지네 / 殘星隨夢落邊城
옛 친구의 필적은 천금처럼 중한데 / 故人字跡千金重
늙은이의 명성은 한 오리 털처럼 가볍구나 / 老子聲名一髮輕
진뢰*의 교분을 이야기하지 말라 / 莫話陳雷生死地
지금부터는 조금이나마 세상 인정을 알게 되었네 / 從今粗亦識時情

*진뢰(陳雷) : 한(漢) 나라 진중(陳重)이 한 고을에 하는 뇌의(雷義)와 친하게 지내었는데, 뇌의가 무재(茂才)에 천거되자 진중에게 양여(讓與)하니, 자사(刺史)가 듣지 아니 하였다. 뇌의는 진중을 위하여 거짓 미쳐 도망해 숨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9
고전번역서 > 동문선 > 속동문선 제8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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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량(鄭希良)

1469년(예종1)~1502년(연산군8).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 동지중추부사 정충석(鄭忠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정침(鄭忱)이고, 아버지는 철원부사 정연경(鄭延慶)이다. 어머니는 경간(慶侃)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92년(성종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성종이 죽자 태학생(太學生)·재지유생(在地儒生)과 더불어 올린 소가 문제되어 해주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승문원의 권지부정자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김전(金詮)·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될 정도로 문명이 있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한국민족문하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