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용재유고이종준

[慵齋遺稿] [雜著] 前赤壁賦書帖跋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8:25

용재유고(慵齋遺稿) / 雜著


前赤壁賦書帖跋

子昂云。僕與伯幾同學書。雖極力追之。而不能及。伯幾已矣。世謂僕能書。所謂無佛處稱尊耳。其趙之推之如此。則其人之筆之妙可知。余購得此本於燕都。倩工入石。欲與同志者共。弘治丁巳孟秋。仲匀書于慵齋。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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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7. 명나라 연도(燕都)에서 구한 서첩을 돌에 새기면서 쓴 발문.
백기(伯幾)와 더불어 글씨를 배워 힘을 다하였으나 그에게만은 미치지 못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자신이 글씨를 잘 쓴다고 하니 이것은 글씨를 가지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며‚ 이제 서첩을 돌에 새겨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받들고자 한다고 함.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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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벽부」1) 서첩의 발문[前赤壁賦書帖跋]

조자앙趙子昻2)이 이르기를 “내가 백기伯幾3)와 함께 글씨를 배웠는데 힘을 다해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했다. 백기가 세상을 떠난 뒤 세상에서 나를 두고 글씨를 잘 쓴다고 하는데, 이른바 부처가 없는 곳에서 존자尊者라 일컬어지는 것4)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조자앙이 이렇듯 추대하였고 보면 그 사람의 신묘한 필법을 알 수 있다. 내가 이 서첩을 연경燕京에서 구입하였는데 공인工人을 고용하여 돌에 새기고 뜻을 같이하는 자들과 함께하려고 한다.

홍치弘治 정사년(1497) 초가을에 용재慵齋에서 중균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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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적벽부」 : 송나라 신종(神宗) 때 임술년(1082) 7월에 소식(蘇軾)이 황주(黃州)에 있는 적벽강에서 뱃놀이하며 지은 문장이다.
2) 조자앙(趙子昂) : 자앙은 원나라 때의 화가이자 서예가인 조맹부(趙孟頫)의 자이며 호는 송설(松雪)이다.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萬卷堂)을 지어 우리나라 학자들과 조맹부를 비롯한 중국의 학자들이 이곳에서 활발히 교유한 것을 계기로 그의 필적이 국내로 많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그의 글씨가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3) 백기(伯幾) : 웅검(熊釗)의 자이며 또 다른 자는 백소(伯昭)이다. 진현(進賢) 사람으로 원나라 지정(至正) 갑신년(1344) 춘추 영(春秋領)으로 향천(鄉薦)을 받아 숭인학관(崇仁學官)에 임명되었고, 명나라 홍무(洪武) 초에 교서회동관(挍書會同館)을 지냈다. 저서로는 『학용사록(學庸私錄)』이 있다.(『江西通志』 卷67, 『經義考』 卷199)
4) 부처가……것 : 황정견(黃庭堅)의 「동파가 쓴 한식 시에 발문을 쓰다[跋東坡書寒食詩]」에 “소자첨에게 보인다면 응당 나를 두고 부처가 없는 곳에서 존자라 불린다고 비웃으리라.[使蘇子瞻見之 應笑我于無佛處稱尊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이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2020년 10월) > 용재선생유고 > 발跋 > 「전적벽부」 서첩의 발문[前赤壁賦書帖跋]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慵齋 李宗準의 文學思想』
-15세기 사림파 문학 연구의 일환으로-


이러한 이종준의 서화에 대한 관심은 1493년 당시 중국 연경을 갔을 때 書帖을 구해오는 한 예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바로 ≪前赤壁賦書帖≫을 구하여 온 다음 뒷날 이를 손보면서 소감을 적은 글이다.

趙孟頫가 말하기를, “나는 鮮于樞와 더불어 글씨를 배웠는데 비록 힘을 다하여 쫓으려 했으나 미칠 수가 없었다. 鮮于樞가 죽고나자 세상에서 이르기를, 내가 글씨에 능하다고 하지만 이른바 부처님이 없는 곳에서 존귀하다고 칭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조맹부의 생각이 이와 같으니 그 사람의 필체의 묘함을 알 수 있다. 내가 이 서본을 연경에서 구입하여 예쁘게 치장하고 돌에 넣어 뜻을 같이하는 자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정사년(1497) 초가을에 중균이 용재에서 쓰노라.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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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慵齋遺稿』 雜書, ≪前赤壁賦書帖跋≫, “子昂云 僕與伯幾同學書 雖極力追之 而不能及 伯幾已矣 世謂僕能書 所謂無佛處稱尊耳 其趙之推之如此 則其人之筆之妙可知 余購得此本於燕都 倩工入石 欲與同志者共 弘治丁巳孟秋 仲匀書于慵齋”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원 강사 (한문학 전공) 조기영(趙麒永)


[조선 시대 고문서 초서체 연구] 경주손씨 서백당본 《초서전적벽부첩》 (심영환)

경주 경주손씨 서백당에는 《선우추 · 김생서법첩》과 함께 또 다른 선우추의 초서첩이 전한다. 선우추가 소식蘇軾의 〈전적벽부〉를 초서로 쓴 것을 새겨서 찍은 탁본첩拓本帖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초서전적벽부첩草書前赤壁賦帖》이라고 명명한다.
《초서전적벽부첩》의 전래 경위를 서첩의 발문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앙子昂(조맹부)이 이르기를 “내가 백기伯幾(필자주:선우추)와 함께 글씨를 배웠는데, 비록 힘을 다해 따라가고자 하였으나 미칠 수가 없었다. 백기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세상에서는 나를 글씨를 잘 쓴다고 하는데 이른바 부처가 없는 곳에서 세존을 청하는 꼴이다.”라고 하였다. 글씨 잘 쓰는 조맹부가 추숭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선우추의 필법의 묘함을 알 수 있겠다. 내가 [일찍이] 연경에서 이 본本을 사서 공인을 사서 돌에 새겨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하였다. 홍치 정사(1497)년 맹추에 중균仲鈞은 용재慵齋에서 쓰다.*1)

『용재유고慵齋遺稿』「잡저雜著」에 따르면 이 서첩은 이종준李宗準(?~1499)이 언경에 서장관으로 갔다가 구입하여 새겼음을 알 수가 있다. 사신의 일행으로 갔다가 중국의 서첩을 구입해 오는 것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2) 이종준이 중국에 간 것은 《행장》에 따르면 계축년인 1493년(성종24)이다. 이 해에 이종준은 언경에서 이 선우추의 초서 필첩을 구입하였음이 분명하다.

《초서전적벽부첩》은 크기가 40.5×26㎝이다. 본문은 18장이고, 마지막에 발문이 1장이다. 제 1장의 전적벽부 제목 아래에 인장이 두 개가 찍혀 있다. 위에 있는 인장은 원인圓印으로 ‘鮮于’라고 되어 있고, 아래에는 방인方印으로 ‘困學齋’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두 인장은 선우추의 인장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 19장인 발문에는 맨 마지막에 방안이 있는데, ‘中鈞’이라고 적혀 있어 이는 이종준의 인장임을 알 수 있다. 이 법첩은 매 장마다 4행으로 되어 있다.

《초서전적벽부첩》의 각刻한 자양은 앞의 《선우추 · 김생서법첩》의 고아한 선격과는 달리 약간 거친 듯 하면서도 표일한 맛을 주고 있다. 다만 ‘東望武昌’이란 구절에서 ‘무’자가 빠져 있고, 마지막 구절인 ‘不知東方之旣白’이 빠져 있다.
앞의 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선우추의 초서는 조선중기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전래 경위는 대개 중국에 사행을 가서 필첩을 구해오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선우추의 글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초서는 아마도 실록 기사와 이종준의 발문에서 보듯이 당시까지 유행하였던 조맹부의 서체를 능가하다는 평가에 힘입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서예가로써 선우추 초서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이라는 기록이 『야승野乘』과 『묵재기문록黙齋記聞錄』에 보여 주목된다.*3) 청송 성수침(1493-1564)이 선우추의 초서에 영향을 받았다는 위의 기록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선우추 · 김생서법첩》은 1550년(명종5)에 간행되었는데 이 때 성수침은 58세였다. 이는 성수침의 재생 기간과 겹칠 뿐 아니라 굳이 이 선우추의 글씨가 아니더라도 당시 성수침은 다른 방법으로 글씨를 보았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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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前赤璧賦書帖跋》 子昂云: “僕與伯幾同學書, 雖極力追之而不能及, 伯幾已矣, 世謂僕能書, 所謂無佛處稱尊耳.” 其趙之追之如此。則其人之筆之妙可知, 余[嘗]購得此本於燕都, 倩工入石。欲與同志者, 共之. 弘治丁巳孟秋, 仲匀[鈞]書于慵齋. 이 글은 李宗準의 문집인 『慵齋遺稿』 (韓國文集叢刊 16, 民族文化推進會, 1988) 「雜署」에도 실려 있는데, 이 跋文과 글자의 가감이 있다. 위 인용문의 []에 들어 있는 글자가 문집에 있는 글자이다.
2)『成宗實錄』 19년(1488) 윤정원 29일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武靈君柳子光, 進歷代名臣法帖, 赴京時所購也.’ 이 기사는 柳子光이 중국의 북경에 가서 『歷代名臣法帖』을 구입하여 왔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조선초기부터 중국의 북경에 사신으로 같던 사람들은 대개가 필첩과 서적을 구입하여 돌아왔으며 이러한 필첩들은 우리나라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3) 秦弘燮, 『韓國美術史資料集成』 5(一志社, 1996), 312쪽과 390쪽.

*출처: 심영환의 『조선 시대 고문서 초서체 연구 (朝鮮時代古文書草書體硏究)』 (고문서연구총서 1, 소와당, 2008)
2. 조선시대 초서의 연원 > 3. 법첩류(法帖類) > 3) 선우추 초서 > 3-3) 경주손씨 서백당본 《초서전적벽부첩》 85~87쪽에 실린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