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문집/용재유고이종준

[慵齋遺稿] [附錄] 戊午黨籍 <국역>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8. 11. 16. 18:45

용재유고(慵齋遺稿) / 附錄


戊午黨籍

先生與佔畢齋門下諸賢游好。及戊午禍作。畢翁爲禍首。以嘗作弔義帝文。濯纓爲史官。載畢翁事錄其文。以爲忠憤之發。李克墩見而惡之。以語柳子光。子光註釋其文。獻之燕山。以爲詆辱先王。大逆不道。畢翁禍及泉壤。一時從游之賢。竄殛無遺。或云。濯纓直書克墩醜惡于史。克墩見之怒。嗾子光起禍云。先生▣▣禍後。文籍散沒不出。墓石只書及第李某之墓。無碣銘無狀。其生年月日歷官敍次。文章節行。無由可攷。後 贈弘文館副提學。


李宗準。字仲匀。號慵齋。能文章。善書畫。 成廟乙巳。登第。嘗以書狀官赴京。見驛館畫屛不佳。以筆塗抹殆盡。驛官招通事怪詰之。通事曰。書狀能書畫。必以不滿其意而然也。驛官悟而首肯之。回程至其處。張新粧素屛二坐。宗準一書一畫。俱臻其妙。觀者歎賞。戊午。謫北界。路經高山驛。書李師中孤忠自許衆不與一律于壁上而去。監司以聞。燕山以爲有怨意。逮鞠殺之。洪貴達救解不得。

李宗準。字仲匀。號浮休子。又號尙友堂。又號太庭逸民。又號藏六居士。又號慵軒居士。能詩文。丁酉年進士。丙午年及第第二名。今爲平安評事。少時。不識君饒。君饒。權景裕字。剛毅識體。不喜作爲。深嫉姜公直以爲不近人情。晩聞實行。甚愛之。癸卯。進士。丙午。及第。調弘文正字。 與余及正中。宗室貞恩字。號月澗。又號楓谷。又號雪窓。拜秀川都正。音律冠於世。幽彈慷慨。行路必泣。爲人篤厚自謙。識量聰明。爲學。先理而後文。師不勞。爲詩。先格而後辭。人不厭。爲德。先內而後外。人不知。行身。不以位尊壓人。如最貧儒士然。 乘月玩花。到君饒家。余誣君饒曰。會賢坊杏花下。有異人吟詩。招與偕來。聞其語。倜儻不羈。見其詩。淸冷出塵。非煙火食人所道。世有仙者。無乃是耶。君饒倒屣出迎。相與坐月下。仲匀作詩。故作淸瘦態。君饒果大服跪曰。陋幕至僻。秀才何因我情友幸臨耶。豈非天幸也。幸望一宿。仲匀必欲去。君饒跪奉衣裾而請。雷談竟夜。朝明。始識於背洞 洞名 寓居進士李宗準也。相與拊掌大笑。仲匀君饒。遂爲知心交。

仲匀號浮休居士。性風流倜儻。少有時譽。乙巳試。登第。丁未秋。差日本護送官。至東萊縣。是年冬。受平安評事之命。秋江冷話下同

余嘗游關西。詩近百餘篇。李仲匀獨取箕子殿詩二聯。曰武王不憎受。成湯豈怒周。二家革命間。聖人無怨尤曰。此詩可駕右作。餘無足取。友儕疑其論太過。余惟李齊賢詩。拙翁全稿塗抹。只留應嗔宿客開門早。要看庭前雪壓松之句。李之詩才。可步大元。詩集不啻千萬篇。僕之學詩日淺。而關西詩數至小。且仲匀詩眼過於拙翁。則取僕四句。亦過分矣。歸而思之。李論甚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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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오사화의 전말과 서화(書畵)에 능했던 이종준의 행적‚ 권경유(權景裕)(字는 군요君饒‚ ?-1498)와의 기이한 만남 등에 대해 수록하였으며 이종준이 1487년(성종 18)에 평안평사(平安評事)가 되어 갈 때 ‘기자전(箕子殿)’이란 글귀를 가지고 4句의 시를 지어 놓았는데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관서지방을 유람하다가 이것을 보고 그 시재(詩才)에 감탄하였다는 ≪추강냉화(≪秋江冷話)≫의 글을 실어 놓았다.
≪추강냉화≫는 남효온이 시문(詩文)과 일사(逸事)에 대해 전해 들은 이야기와 단편적인 체험을 적어 놓은 글이다.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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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당적戊午黨籍』
선생이 점필재 문하의 제현과 교유하였는데, 무오년(1498)에 사화가 일어날 때 필옹畢翁(김종직)이 가장 먼저 화를 입었으니,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탁영 김일손이 사관史官이 되어 필옹의 일을 실으면서 그의 문장을 기록하니, 충분忠憤의 뜻을 편 것이라고 여겨서였다. 이극돈이 보고서 미워하여 이를 유자광에게 말하자 유자광이 그 글에 주석을 달아가며 연산군에게 바쳐 선왕을 비방하고 욕보였으니, 대역부도大逆不道하다고 하였다. 필옹은 무덤에까지 화가 미쳤고, 당시 종유하던 사람들이 남김없이 귀양을 가거나 죽었다. 어떤 사람은 “탁영이 직필로 이극돈의 추악한 행실을 역사책에 기록하니 이극돈이 보고서 노하여 유자광을 부추겨 사화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선생은 【원문빠짐】 사화 뒤에 글과 서적이 흩어지고 없어져 나오지 않고, 묘지석에는 ‘급제 이 아무개의 묘’라고만 쓰고 묘갈명이나 행장의 글이 없으니, 그의 생년월일과 관직을 지낸 순서와 문장과 절조 있는 행실은 고찰할 길이 없다. 뒤에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이종준李宗準의 자는 중균仲勻이며 호는 용재慵齋이니 문장을 잘 지었고 서화에 뛰어났다. 성종 을사년(1485)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을 때 역사驛舍의 그림 병풍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붓으로 거의 다 먹칠해 버렸다. 역관驛官이 통사通事를 불러 괴이하게 여기며 꾸짖자, 통사가 “서장관이 서화에 능하니 필시 그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러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역관이 깨닫고서 머리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곳에 이르자 새로 단장한 병풍 두 폭이 펼쳐져 있었다. 이종준이 하나에는 글을 쓰고 하나에는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 지극히 절묘한 품격을 겸비하니 보는 자들이 감탄하였다. 무오년(1498)에 강계로 귀양을 갈 때 고산역을 지나면서 이사중의 “외로운 충절을 자부해도 남들은 인정 않건만”이라는 율시 한 수를 벽에 쓰고 떠났는데, 감사가 이를 아뢰었다. 연산군은 원망하는 뜻이 있다고 여겨 체포하여 심문하고 죽이니, 홍귀달이 구원하려 하였으나 구할 수 없었다. 【『서애집』에 나온다.】

이종준은 자가 중균, 호는 부휴자浮休子, 또는 상우당尙友堂이라고도 하며, 태정일민太庭逸民이라고도 하고 장륙거사藏六居士·용헌거사慵軒居士라고도 하는데, 시문에 능하였다. 정유년(147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병오년(1486)에 제2등으로 급제1)하여 지금은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이다. 젊은 시절에 군요君饒를 몰랐는데 【군요는 권경유權景裕의 자이다. 강직하고 대체를 알며 인위적인 행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강공직姜公直2)을 매우 미워하여 인정에 멀다고 여겼으나 늦게야 그의 행실을 듣고 매우 사랑하였다. 계묘년(1483)에 진사가 되고 병오년(1486)에 문과에 급제3)하여 홍문관 정자를 지냈다.】 내가 정중正中 【종실 이정은李貞恩의 자이다. 호는 월간月澗이며 또 다른 호는 풍곡楓谷이고, 또 다른 호는 설창雪窓이다. 수천 도정秀川都正에 임명되었다.4) 음률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그윽이 강개하게 연주하면 지나가던 행인도 반드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사람됨이 독실하고 도타우며 겸손하고 식견과 도량이 있고 총명하여 학문을 하면 그 이치를 먼저 터득한 후에 문사를 다루어 스승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고, 시를 지으면 격식을 먼저 다룬 후에 수사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으며, 덕을 닦는 데 있어서는 내면을 우선하고 외면을 뒤로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고, 행실에 있어서는 그 지위가 높다고 남을 위압하지 않고 가장 가난한 선비와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과 더불어 달밤에 꽃을 감상하면서 군요의 집에 이르렀다. 나는 군요를 속여 “호현방好賢坊 살구꽃 아래에 기인이 시를 읊고 있기에 요청하여 같이 왔는데, 그의 말을 들어 보면 도량이 넓어 구애됨이 없고, 그의 시를 보면 맑고 차가워서 세상 티끌을 벗어나 있어 화식火食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니, 세상에 신선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니겠소.”라고 하였다. 군요는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와서 맞이하며 서로 달빛 아래 앉았다. 중균이 글을 짓는데, 짐짓 맑고 빼어난 정취의 시를 지어내니 군요는 과연 크게 감복하여 무릎을 꿇고 “누추한 집이 몹시 궁벽한데 수재께서 어떻게 나의 벗과 함께 오셨는지요. 천행이 아니겠습니까. 하룻밤 묵고 가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중균이 굳이 가려고 하자 군요는 꿇고서 옷자락을 붙잡고 머물기를 청하였다. 밤새도록 이야기 나누다가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어배동於背洞 【어배는 동네 이름이다.】 에 사는 진사 이종준임을 알고 서로 손을 붙잡고 크게 웃었고, 중균과 군요는 드디어 마음을 아는 벗이 되었다. 【『추강사우록秋江師友錄』】

중균의 호는 부휴거사이다. 성품이 풍류스럽고 대범하여 젊은 시절에 명성이 있었다. 을사년(1485)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정미년(1487) 가을에 일본호송관日本護送官에 차임差任되어 동래현東萊縣에 갔다. 이해 겨울에 평안도 평사의 명을 받았다. 【『추강냉화秋江冷話』. 아래도 같다.】

나는 일찍이 관서 지역을 유람하면서 100편 가까운 시를 지었다. 그런데 이중균이 오직 기자전箕子殿 시5)

무왕이 수6)를 미워하지 않았으니 武王不憎受
성탕이 어찌 주를 노여워했으랴7) 成湯豈怒周
상나라와 주나라를 혁명할 즈음에 二家革命間
성인들은 원망도 탓함도 없었다네 聖人無怨尤

라는 두 연聯8)만 취하고 말하기를 “이 시구는 옛사람의 시를 능가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고 나머지는 취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벗들은 그의 논평이 너무 지나친 듯하다 하였지만, 나는 “이제현李齊賢의 시를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원고를 다 지워 버리고, 단지 ‘응당 성내리라 유숙하는 손님이 일찍 문을 열어, 뜰 앞 눈 덮인 소나무를 보려는 것을.[應嗔宿客開門早 要看庭前雪壓松]’이라는 구절만 남겨 놓았다. 이제현의 시재詩才는 원나라에서도 당당하게 인정받을 만하고, 시집에 실린 시가 천만 편도 넘는다. 내가 시를 배운 시일이 얼마 되지 않고, 관서를 읊은 시는 지극히 적으며, 또 중균이 시를 보는 안목이 졸옹보다 높다. 그렇다면 나의 네 구절을 뽑아 준 것만도 분수에 넘는 일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이중균의 논평이 매우 온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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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오년(1486)에 제2등으로 급제 : 규장각 소장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을사년(1485) 별시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2) 강공직(姜公直) : 공직은 강응정(姜應貞, ?∼?)의 자이다. 호는 중화재(中和齋),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은진에 살면서 효행으로 이름이 있었다. 1470년 효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1483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연산군 때 『소학』의 모든 범절을 몸가짐의 바탕으로 삼고자 한 소학계(小學稧)를 주동하였다.

3) 병오년(1486)에 문과에 급제 : 규장각 소장 『국조문과방목』에 근거하면 권경유(權景裕)는 이종준과 함께 을사년(148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4) 종실……임명되었다 : 『대동야승(大東野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는 “이정은(李貞恩)은 자가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또는 남곡(嵐谷), 혹은 설창(雪窓)이라고도 하였다. 수천 부정(秀川副正)에 배수되었다.”라고 하였고, 「해동야언(海東野言)」에는 호를 ‘풍곡(風谷)’, ‘설창(雪牕)’이라 고 하여 호와 벼슬 이름에 차이가 있다.

5) 기자전(箕子殿)의 시 : 남효온이 지은 시는 『추강집(秋江集)』 권1에 「기자의 사당을 참배하며[謁箕子廟庭]」라는 제목으로 전문이 실려 있다.

6) 수(受) : 상(商)나라 마지막 임금 주왕(紂王)의 이름이다. 폭군으로 알려져 있다.

7) 성탕(成湯)이……노여워했으랴 : 무왕이 수(受)를 미워하여 정벌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성탕이 주(周)나라 건국에 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성탕은 하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내쫓고 상나라를 건국한 임금이다.

8) 두 연(聯) : 남효온이 지은 시는 모두 13연 26구로 되어 있으며 이 문집에 인용한 구절은 시의 처음에 나오는 1, 2연이다.


*출처: 『용재눌재양선생유고(慵齋訥齋兩先生遺稿)』 -안동역사인물문집국역총서11 한국국학진흥원(2020.10) > 용재선생유고 > 부록附錄 > 『무오당적戊午黨籍』
*한국국학진흥원: https://www.koreastudy.or.kr/



[大東野乘/海東野言] 戊午黨籍

李宗準字仲鈞。號慵齋。能文章善書畫。 成廟乙巳登第。嘗以書狀官赴京。見館驛畫屛不可。以筆塗抹殆盡。驛官招通事怪詰之。通事曰。書狀能書畫。必以不滿其意而然也。驛官悟而首肯之。回程至其處。張新粧屛二坐。宗準一書一畫。俱臻至妙。觀者嘆賞。戊午謫北界。路經高山驛。書李師中孤忠。自許衆不與。一律于壁上而去。監司以聞。燕山以爲有怨意。逮鞫殺之。洪貴達救解不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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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무오당적 (戊午黨籍)

○ 이종준(李宗準)의 자는 중균(仲均)이요, 호는 용재(慵齋)이다. 문장에 능하고 그림과 글씨를 잘 썼으며, 성종 을사년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가던 도중에 어느 역에서 쉬는데, 그 역관(驛館)의 병풍그림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붓으로 먹칠을 하여 거의 다 없애버리니, 역의 관원이 통사(通事)를 불러서 괴상한 일이라고 하면서 문책을 하였다. 통사가 말하기를, “서장관이 글씨와 그림에 능숙한데, 반드시 그 병풍의 그림이 자신의 뜻에 불만이 있으므로 그런 것이다.” 하였다. 그제야 역관이 깨닫고 수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또 그 역에 들렀는데, 새로 단장하여 만든 병풍 두 벌을 쳐 놓았으므로, 이종준이 한 벌에는 글씨를 쓰고, 또 한 벌에는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 지극히 오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무오사화 때에 북계(北界)로 귀양가던 도중에 고산역(高山驛)을 지나면서 이사중(李師中)은 외로운 충성으로 자처하나, 많은 사람들은 허여하지 않는다는 율시 한 수를 벽에다 쓰고 갔는데, 감사가 보고하여 연산군이 원망하는 의사가 있다 하여 잡아서 국문하여 죽였다. 홍귀달(洪貴達)이 구제하려고 힘썼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오 김익현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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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江集] 師友名行錄

李宗準字仲鈞。號浮休子。又號尙友堂。又號太庭逸民。又號藏六居士。又號慵軒居士。能詩文。丁酉年進士。丙午年。及第第二名。今爲平安評事。少時。不識君饒。與余及正中。乘月翫花。到君饒家。余誣君饒曰。好賢坊杏花下。有異人吟詩。招與偕來。聞其語。倜儻不羈。見其詩。淸泠出塵。非煙火食人所道。世有仙者。無乃是耶。君饒倒屣出迎。相與坐月下。仲鈞作詩。故作淸瘦態。君饒果大服。跪曰。陋幕至僻。秀才何因我情友幸臨耶。豈非天幸也。幸望一宿。仲鈞必欲求去。君饒跪奉衣裾而請。雷談竟夜。朝明。始識於背洞 於背洞名 寓居進士李宗準也。相與拊掌大笑。仲鈞,君饒遂爲知心交。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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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고전원문 > 대동야승 > 사우명행록 > 師友名行錄 南孝溫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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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이종준(李宗準)은 자가 중균(仲鈞)이고, 호가 부휴자(浮休子)이며, 또 다른 호가 상우당(尙友堂)ㆍ태정일민(太庭逸民)ㆍ장륙거사(藏六居士)ㆍ용헌거사(慵軒居士)이다. 시문에 능하였다. 정유년(1477)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병오년(1486)에 2등으로 급제하여 지금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로 나가 있다.


젊었을 때에 군요(君饒)를 알지 못하였다. 중균이 나와 정중(正中)과 더불어 달빛을 타고 꽃을 구경하며 군요의 집에 이르렀다. 내가 군요를 속여 말하기를 “호현방(好賢坊)의 살구꽃 아래에 어떤 이인(異人)이 시를 읊고 있기에 불러서 함께 왔소. 그의 말을 들어 보니 기개가 높고 구속됨이 없으며, 그의 시를 보니 맑고 시원함이 속진(俗塵)을 벗어나서 화식(火食)하는 사람이 말하는 바가 아니오. 세상에 신선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니겠소.” 하였다.

군요가 신을 거꾸로 신은 채 황급히 나와 맞이하여 서로 더불어 달 아래에 앉았다. 중균이 시를 지으면서 일부러 청수(淸瘦)한 격조의 시를 지어내니, 군요는 과연 크게 감복하여 꿇어앉아 말하기를 “누추한 오두막이 지극히 궁벽하거늘 수재(秀才)께서 어쩌다 나의 정다운 벗들로 인하여 왕림했으니, 어찌 천행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하룻밤 유숙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중균이 반드시 떠나가려 하니, 군요가 꿇어앉아 옷자락을 붙잡고 청하였다. 떠들썩하게 담소하며 밤을 지새우다가 아침이 밝아서야 비로소 어배동(於背洞) -어배는 동네 이름이다.- 에 우거(寓居)하는 진사 이종준임을 알고는 서로 더불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중균과 군요는 드디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되었다.

◈추강집(秋江集)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文集이다.
○남효온(南孝溫) 1454년(단종 2)~1492년(성종 23).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거사(秋江居士), 행우(杏雨),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시습(金時習) 등과 교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7

고전번역서 > 추강집 > 추강집 제7권 > 잡저 >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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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고전번역서 > 대동야승 > 사우명행록 >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남효온(南孝溫) 찬(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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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江集] 冷話

李宗準字仲鈞。號浮休居士。性風流倜儻。少有時譽。乙巳試。登科第二名。丁未秋。差日本護送官。至東萊縣。有妓年可十二三。李鍾愛。改名曰榜眼兒。待汝未嫁。再受使命。定作因緣也。謂其合琴徽曰改名。此其志也。是年冬。受平安評事之命。南北悠悠。重來無由也。

[번역문]
○ 이종준(李宗準)은 자가 중균(仲鈞)이고, 호가 부휴거사(浮休居士)이다. 성품이 풍류스럽고 대범하여 젊은 시절에 명성이 있었다. 을사년(1485, 성종16) 과거시험에 2등으로 급제하였고, 정미년(1487) 가을에 일본호송관(日本護送官)에 차임(差任)되었다. 동래현(東萊縣)에 이르렀을 때에 나이 열두셋가량의 기녀가 있었다. 이종준이 매우 사랑하여 개명(改名)하며 말하기를 “방안아(榜眼兒)*는 네가 시집가기 전에 다시 사명(使命)을 받아서 꼭 인연을 맺을 것이다.” 하였다. 거문고의 기러기발을 합하는 것을 개명이라 하니, 이것은 기념의 표시였다. 이해 겨울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의 명을 받으니, 남북의 거리가 아득하여 다시 올 길이 없었다.

*방안아(榜眼兒) : 과거에서 갑과(甲科)의 2등으로 급제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余嘗遊關西。詩近百餘篇。李仲鈞獨取箕子殿詩首二聯。曰。武王不憎受。成湯豈怒周。二家革命間。聖人無怨尤曰。此詩可駕古作。餘無足取。友儕疑其論太過。余惟李齊賢詩。拙翁全稿塗抹。只留應嗔宿客開門早。要看庭前雪壓松之句。李之詩才。可步大元。詩集不啻千萬篇。僕之學詩日淺。而關西詩數至少。且仲鈞詩眼過於拙翁。則取僕四句亦過分矣。歸而思之。李論甚穩。

[번역문]
○ 내가 일찍이 관서(關西)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가 근 100여 편이다. 이중균(李仲鈞)이 유독 기자전(箕子殿) 시의 첫머리인

무왕이 수를 미워하지 않았으니 / 武王不憎受
성탕이 어찌 주를 노여워했으랴 / 成湯豈怒周
상나라 주나라 혁명할 즈음에 / 二家革命間
성인은 원망도 탓함도 없었다네 / 聖人無怨尤

하는 두 연(聯)만 취하고, 말하기를 “이 시구는 옛사람의 작품을 능가할 만하고 나머지는 취할 것이 없다.” 하였다. 벗들은 그의 논평이 너무 지나친 듯하다 하였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현(李齊賢)의 시를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전체 원고를 지워 버리고, 단지 「응당 성내리라, 유숙하는 손님이 일찍 문을 열어 뜰 앞에 눈이 소나무를 누른 것을 보려는 것을.〔應嗔宿客開門早 要看庭前雪壓松〕」이라는 구절만 남겨 놓았다. 이제현의 시재(詩才)는 원나라에서도 활보할 수 있었고, 시집에 실린 시는 천만 편도 넘는다. 내가 시를 배운 것은 시일이 얼마 안 되고, 관서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는 편수가 지극히 적으며, 또 중균의 시를 보는 안목은 졸옹보다 높으니, 나의 네 구절을 뽑아 준 것만도 분수에 넘는 일이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이중균의 논평이 매우 온당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한국문집총간 > 추강집 > 秋江先生文集卷之七 > 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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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7

고전번역서 > 추강집 > 추강집 제7권 > 잡저(雜著) > 냉화(冷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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