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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서후면 금계마을 이야기

용재공 16세손 이제민 2019. 1. 14. 15:45

금계마을 이야기


안동 > 서후북후권 > 금계마을

- 거문고 모양으로 생긴 마을

금계리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금지라 불렀으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이곳으로 옮겨와 검재로 고치고 한자로 금계라 적었다.

금계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원주변씨(原州邊氏), 의성김씨(義城金氏), 안동장씨(安東張氏)의 집성 마을이다. 금계 1리에 복당(福堂), 사망(仕望), 알실[知谷], 음지, 검제 등 5개 마을, 금계 2리에 경광(鏡光), 마누이[晩雲], 텃골[基谷], 미리미, 작장골 등 5개 마을이 있다.

『영가지(永嘉誌)』에 “금음지 또는 금계라 한다. 옛날부터 ‘천년 패하지 않는 땅[千年不敗之地]’이라 했다. 사복정 배상지가 여기에 살았는데 백죽당이 있다. 용재 이종준, 판서 권예도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학봉 선생이 임하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고 적고 있다. 이것으로 조선 전기에 금계 마을의 대표 성씨는 흥해배씨(興海裵氏)와 안동권씨(安東權氏)였고, 조선 중·후기에는 학봉 선생의 후손인 의성김씨라 할 수 있다.

학봉 선생은 금계에 사는 권덕황의 사위가 되어 1582년에 이주하였다. 학봉 선생은 이 금계에 1년 반 정도밖에 살지 않았지만 『주자서절요』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자성록』을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청성산 기슭에 석문정사를 지어 이 지역 학문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금계 1리에 있는 학봉종택(鶴峯宗宅)은 원래 현 위치에 지었으나 침수가 자주 된다 하여 8대손인 광찬(光燦)이 1762년에 소계서당(邵溪書堂)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그러나 그 후 다시 현 위치로 옮겼다. 소계서당은 구한말 학봉 선생의 11대 종손이자 영남을 대표하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강학소다.

복당은 금계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석복산(石復山) 밑에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은 복(福)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 복당이라 불렀다 한다. 단정(丹井)은 복당 북동쪽에 있다. 소복당(召福堂)은 소복산(召福山) 위에 있는 사당으로 매년 정월에 제사를 지낸다.

사망은 소복산 동편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이 마을에 사는 선비가 과거시험에 매번 낙방한 나머지 자신의 소망을 담아서 마을 이름을 ‘벼슬 사(仕)’자에 ‘바랄 망(望)’자를 써서 사망(仕望)이라 하였다고 한다. 알실은 이곳에 사는 한 선비가 아는 것이 많고 앞일의 예언이 적중하여 알실이라 부른다고 한다.

경광은 금계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경광서원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공민왕 때 음사(蔭仕)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판사복시사에 오른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가 정국의 문란함을 보고 이곳에 낙향하였다. 그는 집 주위에 대나무와 잣나무를 심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나타내고 당호를 백죽당이라 하였다. 인조 때 사림의 발의로 금계동에 경광정사를 짓고 사당을 세워 그의 절의를 기렸다. 숙종 때 병조판서의 증직되었으며 경광정사가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마누이는 텃골 남쪽 마을로 효자 정문(旌門)이 있어 효자문(孝子門)이라 하였다. 지금은 변씨(邊氏)가 살고 있다. 텃골은 효자문 위에 있는 마을로 옛터가 있어 텃골이라 하였으며 위쪽은 동무지라 하였다.

*출처: 유교넷. 경광서원

http://www.ugyo.net/tu/rin/ruins.jsp?sSiteCode=ansb007&sMenuType=0